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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1
저자 : 좌구명
출판사 : 한길사
출판년 : 2006
ISBN : 8935656828
책소개
『춘추』는 공자가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역사서로, 노은공(魯隱公) 원년(기원전 722)부터 노애공(魯哀公) 27년(기원전 468)에 이르기까지 총 255년에 걸쳐 명멸한 열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 『춘추』에다 역사가 좌구명이 해설을 단 주석서가 『춘추좌전』이다.
유교의 문文, 사史, 철哲을 대표하는 기본 텍스트를 들라면 문학의 『시경』과 사학의 『춘추좌전』, 철학의 『논어』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춘추좌전』은 중국 문명의 뿌리가 되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다. 중국 문명의 연수(淵藪)는 시대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이고, 중국 사상의 연원은 공자를 포함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자백가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바로 당시의 인물 및 사건을 정확히 기록해놓은 『춘추좌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춘추학은 『좌전』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때 신문왕이 세운 국학에도 『좌전』은 교과목의 하나였고, 독서삼품과가 설치된 뒤에는 상품과(上品科)의 고급과목으로 설정되었다. 당시 이 작업에는 정조는 물론 채제공과 정약용, 성해응 등 당대 학자들이 모두 참여했다.
이렇듯 『춘추좌전』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또 경학과 사학은 물론 제자학과 문학을 연구할 때에도 반드시 참고해야만 하는 소중한 자료다.
목차
좌구명(左丘明, ?~?)은 대략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춘추좌전』(春秋左傳)과 『국어』(國語)를 저술한 노나라의 현대부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약력은 알 길이 없다. 『논어』 「공야장」편에 그에 관한 공자의 호평이 실려 있는 점에 비추어 실존인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좌구명은 실명(失明)한 뒤 『국어』를 지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좌구명의 실명 원인과 『춘추좌전』 저술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후한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사마천전찬」(司馬遷傳贊)에서 “공자가 노나라 사서를 바탕으로 『춘추』를 짓자, 좌구명이 그 내용을 논집(論輯)하여 『춘추좌전』을 짓고 동시에 나머지 이동(異同)을 찬(纂)하여 『국어』를 지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위소(韋昭)는 이를 이어받아 『춘추좌전』을 ‘춘추내전’(春秋內傳), 『국어』를 ‘춘추외전’(春秋外傳)으로 정의했다. 이후 이 견해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으나 좌구명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한제국 초기의 공안국(孔安國)은 좌구명을 노나라의 태사(太史)라고 주장했는데, 『한서』「예문지」(藝文志)도 이를 좇았다. 북송대의 형병(邢昺)은 노나라 태사로서 공자로부터 『춘추』를 수업한 자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남송대의 주희(朱熹)는 ‘좌구’와 ‘좌씨’를 구분해 『논어』에 나오는 좌구명과 『춘추좌전』을 저술한 좌구명을 별개의 인물로 간주했으며, 정이천(程伊川)은 아예 옛날의 문인(聞人: 전설적인 인물)으로 평해놓았다. 사실 좌구명이 과연 노나라 태사로서 『춘추좌전』과 『국어』를 저술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고증할 길은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볼 때 좌구명은 공자시대에 노나라에서 활약한 사관으로 보이나, 그가 『춘추좌전』과 『국어』를 전적으로 저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은 대략 전국시대 초기에 주왕실과 열국의 역사에 밝은 사관들이 개입해 현재의 『춘추좌전』과 『국어』를 완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누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