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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무 핑궈리
저자 : 한수영
출판사 : 민음사
출판년 : 2006
ISBN : 8937480875
책소개
2004년 장편소설 『공허의 1/4』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한수영이 2002년 등단 이후 3년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첫 소설집.
이번 소설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에서 한수영은 여전히 그리고 집요하게 다양한 인간 군상, 특히 우리 사회의 약자이면서 타자인 노인들, 조선족·외국인 여성 노동자,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보는 관조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현대인의 단절된 인간관계와 통신의 문제를 완성도 있게 형상화한 점도 돋보인다.
표제작 『그녀의 나무 핑궈리』,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작 『나비』를 포함, 등단 후 발표한 『구리 연』, 『벽』, 『피뢰침』, 『번지점프대에 올라서다』, 『꽃이 진다』, 『스프링벅』의 총 여덟 편의 단편들을 모았다.
목차
변두리 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바라보는 시선 ― 『나비』, 『그녀의 나무 핑궈리』, 『번지점프대에 올라서다』
『나비』는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시 “수공예의 직무처럼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인 소설”, “간명하고 정확한 묘사로 빈틈없는 사실성을 확보한 소설”이라는 심사평을 받았다. 도둑이었던 외할머니와 그로 인하여 힘든 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어머니의 삶을 어린 소녀의 천진하지만 아프고,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나비』의 소녀가 바라보는 대상인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머릿속에 병이 생기고, 임신 중에 남편을 잃고서 힘겹게 살아가면서, 이제는 당뇨병 환자가 되어 얹혀사는, 자신을 버린 바로 그 어머니를 보살핀다. 그 어머니를 딸인 소녀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나비』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소녀가 엄마의 머릿속 병을 ‘나비’로 표현한 것이죠. 엑스레이에 찍혀 나오는 병이 검은 나비인 양……. 그 소녀는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사기 위한 방법으로 날마다 꽃을 그리는 것이고요. 이 소설은 나쁜 가정환경을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아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어요.”
―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이후 작가와의 인터뷰
작가가 밝혔듯이, 검은 나비로 형상화된 어머니의 머릿속 병은 그저 어둡고 불길한 삶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소녀가 그리는 꽃 그림과 머릿속 이를 통해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러한 한수영의 따뜻하지만 아픈 시선은 표제작인 「그녀의 나무 핑궈리」에서도 이어진다. 핑궈리란, 사과와 배를 접목하여 재배한 과일로 연변 지방에만 난다. 연변에서 조선(한국)으로 시집 와 행복한 삶을 살고자 했던 만자 씨는, 조선족 여성 노동자로서의 힘든 노동과 남편의 불륜, 그의 폭력, 여성으로서 견디기 불임에 이르기까지 삼중의 고통을, 지금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 핑궈리를 꿈꾸며 견뎌낸다.
사과와 배를 접목한 독특한 나무 핑궈리. 연변에만 있는 그 나무는 그녀, 만자 씨가 꿈꾸는 천상의 나무다. 그 나무에 대한 환상이 있기에 그녀는 살아간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쇠붙이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환상이다. 만자 씨를 고향으로 이어주는 나무. (...) 이 모든 것들은 쇠붙이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알려주는 생명체이고 아우라다.
― 권택영(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만자 씨를 바라보는 시선(화자)은 그녀가 기르는 개의 눈. 화자의 연민과 공감이 어린 눈은 만자 씨가 결국 가위를 들고 그 고통의 삶을 잘라내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 처연한 아픔을 드러내준다. 『번지점프대에 올라서다?에서도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우릴 잡으러, 잡아가려고 사람들이 왔, 어요.”)과 그녀가 그리워하는 바다(“아이 워너 고우 투 씨!”)의 대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화자는 그녀의 힘든 삶을 관조하고(어떤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는 점에서) ‘오로라’라고 부름으로써 오히려 그녀를 자기 삶의 희망으로 삼고 있다. 그 자신 노동자로서 어렵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화자의 시선은 결국 ‘오로라’의 낮은 외침에서 삶의 길을 찾게 하는 노래를 발견하고 “이글루에서 새어 나오는 빛처럼 길 저 끝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는 것”으로 향한다.
죽음에 다가선 노년의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 ― 『벽』, 『꽃이 진다』
『번지점프대에 올라서다』는 ‘오로라’라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아픔과 동시에 죽음을 앞에 둔 어머니(노인)의 마지막 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들어 있다. 마른 몸, 축 늘어진 팔, 독한 약물로 빠진 머리카락 등 죽음으로 향하는 노인을 연민과 아픔으로 바라보던, 아들인 화자는 <무덤-집>(“박옥님의 집”,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세워질 이 비석은 어머니의 빛나는 문패가 되어줄 것이다.”)을 지어주고 싶어 한다. 아들이 마련해 줄 “어머니의 정남향 집에는 일 년 내내 해가 들 것이다.”
이와 같이 한수영 소설에서 노인의 문제는 죽음 그리고 <무덤-집>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데, 이는 『벽』에서 특히 천착하고 있는 문제이다.
한수영의 『벽』에는 나이 칠순의 아버지가 이런 죽음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벌이는 사투로서의 두 가지 벽(癖), 즉 ‘평생 빚지고 살기’와 ‘집 고치기’가 등장한다.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인 채” 태어났다는 할머니의 말을 줄기차게 듣고 자란 아버지는 자신의 불완전한 몸에 내재한 나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몸에 좋은 것이면 뭐든지 한다. 그러나 자신보다 앞서 간 아들의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아버지의 공포는 더 커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세상의 중심이자 고구려 무사 같았던 아버지는 점차 빈 거푸집으로 변해 버리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바뀐다. 아버지가 지닌 두 가지 벽이 이승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는 빚을 다 갚거나 집을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뚜렷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스스로를 순장시킨 무덤과 다름 아닌 공간이 된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죽음과 더불어 죽음을 산다. 극복할 수 없다면 같이 사는 것이 현명한 것임을 터득한 아버지의 역설적 생존 전술이 되어 아버지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김윤식ㆍ김미현, 『소설, 노년을 말하다』 (황금가지, 2004)
고구려유물기획전시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의 아버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함께했고, 아들의 죽음을 목도했으며, 이제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화자가 경멸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던 아버지의 기이한 두 가지 벽(癖)은, 실은, 아버지를 둘러싼 <무덤-집>의 벽(壁)이 되어 그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공감의 눈으로 변화하게 된다.
『꽃이 진다』에서는, ‘죽음’과 ‘삶’이 <집>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남편의 실직과 보증 때문에 이십여 년간 살아온 집에서 이사 가기 전, 주인공 정옥은 군대에 가서 젊은 나이에 죽은 동생의 제사상을 차리고 그 상에 옥상에 핀 꽃들을 꺾어놓는다. 동생의 제사는, 이 집에서 계속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초혼 의식, 죽음의 초대이다. 정옥이 동생의 죽음에 어떤 죄책감 섞인 아픔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죽음에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아들의 죽음에 처절하게 아파했던 어머니. 이제 죽음에 더욱 가까이 가 있는 그 어머니의 모습을 정옥은 바라본다. 그러면서, “한 몸이던 시절”, 즉 어머니의 자궁이 자신의 집이었던 시절을 떠올린다. 정옥의 자궁이 딸의 집이었고, 또 그 딸의 자궁이 손녀의 집으로―어머니와 딸 사이는 탯줄(긴 끈)로 이어져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자궁-집>은 죽음과 삶의 장소임을 조용히, 그리고 쓸쓸히 깨닫게 된다.
현대인의 단절된 인간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 『구리 연』, 『피뢰침』, 『스프링벅』
『구리 연』, 『피뢰침』, 『스프링벅』의 경우는 앞서의 소설들과 같이 연민과 아픔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현대인의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화선을 연결하는 데 쓰는 구리선, 번개와 지상을 연결하는 피뢰침, 그리고 이제는 필수품이 되어버린 통신 수단인 휴대폰.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연결의 고리가 되어주어야 할 이 세 가지 모티프들은 결국 어떤 깊은 단절을 보여 주는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구리 연』에서, 5년 전 일어난 교통사고로 단란했던 가정이 파괴된(“남자의 맨홀은 엉뚱한 곳에서 무너졌다.”) 전화회선 기술자인 ‘남자’는, 도박판의 룰렛으로만 죽은 아이에 대한 상처를 달랠 수 있는 ‘여자’의 목을 조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리 회선(전화회선)은 ‘여자’와 ‘아이’를 잃은 후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로 날아가 닿고자 하는 구리 연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남자’는 이것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만다.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실감하고, 그 간극을 메울 수 없어 몸부림치는 모습은 『피뢰침』에서 잘 나타난다.
그 짧은 순간, 어쩌자고 번쩍하는 빛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거리, 그 아득하고도 분명한 거리를 보게 되었을까.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단숨에 드러나고 있었다. 남자는 바로 앞에 여자가 앉아 있었지만 도저히 그녀에게 가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여자를 향한 지독한 외로움과 지독한 그리움, 그만큼이나 지독한 거리 때문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것들―그녀의 머리핀과 가위 등을 대신 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홀로 서서 (의연하게) 번개를 기다리는” 피뢰침에서 발견하고, 그 숙명을 받아들인다. “이제 막, 번개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메울 수 없는 거리는 “번쩍이는 번개”로 짧은 순간 극복되지만 역시 그 단절은 해결될 수가 없다.
『스프링벅』에서는, 이제는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휴대폰을 통해 서로가 끈끈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아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잘못된 전화번호 때문에 형이 칼에 찔린 사건이 일어나고, 이처럼 “부메랑처럼 칼이 되어 돌아온 휴대폰”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함을 보여 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형수에게 걸려 온 아내의 전화는 이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아내의 이야기는 끊어지다 이어지다 한다. 전화기 너머에서 보스포루스의 다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저 현대인들의 휴대폰을 통한 통신의 모습은 “한 떼의 스프링벅들이 덩달아 달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