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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저자 : 에쿠니 가오리
출판사 : 소담출판사
출판년 : 2003
ISBN : 8973817795
책소개
이상한 말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
『낙하하는 저녁』서두에 나오는 이 글을 읽어주자, 대뜸 누군가가 "사랑에 대한 환상이로구먼." 한다. 그러게. 오래 전 어떤 이의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고 헤어짐을 선언했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좋은 모습으로 헤어지기? 웃기지 말아. 남녀가 헤어지려면 온갖 지지리궁상을 떨어야 해. 좋은 감정이 있는데, 어떻게 헤어지냐. 정 뗄 만큼 냉혹하거나 진저리쳐질 만큼 비굴한 뒷모습으로 남기. 그래야 다신 생각나지 않는 법." 그게 연애의 신조였는데,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사 이렇게 초연하기 그지 없고, 나는 여전히 그녀의 소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나는 사랑의 환상에 빠진 자인가.
사랑 이야기를 쓰는 작가 가오리의 소설에는 크게 몇가지가 없다. '부부'와 '상처'. 정확히 말하면 '정상적인 부부관계'와 '정상적인 상처의 처리'가 없다고 할까. (너무 윤리적 잣대에 치우쳐진 발언이라고 매도하지 마시길. 그것이 동시에 가오리 소설의 매력임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연인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상처를 받아도 너무 세련되게 처리되어 있어 상처같지가 않다. 호모인 남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여자는 남편의 애인을 곁에 두고 소꼽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낸다(『반짝반짝 빛나는』). 이 책『낙하하는 저녁』의 주인공 '리카'는 8년 동안 동거한 애인 '다케오'가 다른 여자 '하나코'에게 눈 멀어 자신을 떠날 때에도 태연하게 말한다. "그와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당장 그와 같이 잘 수도 있다"고. 더 나아가 하나코를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함께 지낸다. 그녀를 통해서나마 다케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곤 금방 하나코의 존재에 익숙해지는 자신에게 깜짝 놀라며 하는 독백. '함께 사는 사람이 다케오든 하나코든,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낙하하는 저녁』은 무려 15개월을 두고 천천히 실연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집착하고 질투하고, 여전히 곱지 못한 사랑의 흔적들. 하지만 현실과 달리 그녀의 작품에서는 그런 감정들이 전혀 구질구질하지 않다. 담담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20,30대 젊은 여성들이 가오리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 없는, 하지만 현실이고픈 이야기. 사랑이든 실연이든 아름답고 싶은 것. 젊은 여자들은 꿈꾸기 마련이니까. 1996년 작이다.
목차
그렇게 우리의 공동 생활은 시작되었다. 하나코가 살 곳을 찾을 때까지. 하나코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치고 뜻밖일 정도로 우수했다. 하나코는 타인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약무인이다. 그리고 타인이 신경쓰도록 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일이듯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하나코는 동물 같지도 식물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음의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 예를 들어,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난 곁에 하나코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옆에 새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는, 그런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