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Powered by NAVER OpenAPI
-
철의 시대
저자 : 존 쿳시
출판사 : 들녘
출판년 : 2004
ISBN : 8975274160
책소개
2003'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M.쿳시의 대표작. 1980년대 후반, 인종차별로 얼룩진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도 결국은 그 정권의 수혜자로 일조할 수 밖에 없었던 한 백인 여인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적과 동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분법적인 현실에서 'YES-NO'가 공존하는 중간 지점의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묻고 있다.
------------------
1986년 가을, 남아프리카. 이 글의 화자인 엘리자베스 커런은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는다. 죽음의 선고가 있던 날, 그녀의 집 안마당에는 부랑자 '퍼케일'이 찾아들고 커런은 미국으로 건너간 딸에게 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한편 흑인거주 지역에서는 소요가 계속되고 어린 흑인 소년들은 학교를 나와 투쟁에 나선다. 커런의 가정부 플로렌스는 이런 소란을 피해 아들과 그 친구를 커런의 집에 데려오고 청교도적 엄격성에 전도되어 어린시절의 천진함을 잃어버린 두 소년을 보며 주인공 '커런'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로 이분되어 버린 당대의 현실을 '철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생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해 왔지만 그 실상을 미처 알지 못하던 커런은, 플로렌스와 함께 흑인 거주지역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차디찬 주검으로 변한 플로렌스의 아들 '베키'를 발견한다.
커런이 일련의 시련을 겪는 동안 커런 곁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정체불명의 '퍼케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철저히 타자로 남아 있는 그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음에도 사랑해야만 하는 인간. 이 책은 여기에 진정한 구원이 있음을 암시한다.
목차
정직하게 그려내는 공모자의 초상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권력의 허위를 심도 있게 파헤쳤던,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의 또 다른 작품 <철의 시대>가 쿳시 전문가인 전북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발간되었다.
쿳시의 대표작인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제국의 모순뿐 아니라 제국의 일원으로 봉사할 수밖에 없는 판사 개인의 부조리를 담고 있었다면 <철의 시대>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도 결국은 그 정권의 수혜자로서 그 정권의 존립에 일조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한 백인 여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암에 걸렸다. 나는 평생 참아왔던 수치심이 누적되어 암에 걸렸다. 암이란 그렇게 생기는 거다. 자기혐오감 때문에 몸이 악의를 띠고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것이 암이라는 거야.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와 마찬가지로, 쿳시는 극도로 절제된 스타일을 미학적 기반으로 하여, 지배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해부하면서 주인공인 백인 여인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시킨다. 정직하고 성실한 작가인 쿳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구석으로 몰리고 죽음을 당하는 흑인들의 경험을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고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자칫 허위나 감상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오히려 가해자와 같은 부류인 백인들의 내면을 언어화하면서 그 모순과 현실을 직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인 퍼케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인물로 남아 있는 것도,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흑인들이 화자인 엘리자베스 커런을 향해 각을 세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쿳시를 성실하고 정직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죠? 목소리를 내는 나는 누구죠? 내가 어떻게 떳떳이, 그러한 부름에 등을 돌리라고 그들에게 얘기할 수 있죠? 입을 꼭 다물고 구석에 앉아 있는 것말고는 나한테 무슨 일을 할 자격이 있죠? 나는 목소리가 없어요. 나는 오래 전에 그걸 잃어버렸어요. 어쩌면 아예 없었는지도 몰라요. 나는 목소리가 없어요. 그게 그거죠. 나머지는 침묵이어야 해요.
따라서 <철의 시대>의 핵심은 흑인들의 고통이나 비극적인 삶이 아니라, 암에 걸려 죽어가는 백인 여성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공모성이며 그 여성이 그것을 낱낱이 추적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쿳시는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적에 더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철의 시대에도 동정심은 침묵하지 않는다
<철의 시대>가 집필된 ‘1986~9년’은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이 남아프리카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시기이다. 화자의 말처럼, 종족차별과 불의로 얼룩진 1980년대 후반의 남아프리카는 그렇게 가라앉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 산다는 것은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는 것과 흡사했다.’ 단테가 자신이 살던 이탈리아를 ‘분노의 폭풍 속에 떠 있는 선장 없는 배’라고 했던 것처럼 쿳시의 소설에 나타나는 남아프리카는 ‘가라앉는 배’에 비유된다, 그래서 ?철의 시대?는 침몰위기에 몰린 그 배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혐오하면서도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는 백인 여성의 몸부림과 내적 고뇌에 관한 이야기이다.
쿳시는 백인 여성을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남성 식민주의자들과 피식민주의자들 사이의 중간자적 존재인 백인 여성의 실존적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화자는 자신의 모순적인 입장을 자각하고 실토하면서도, 적/동지, 피해자/가해자 등의 이분법으로 ‘예스’와 ‘노’를 강요하는 양자택일적 논리가 능사가 아니라, 그것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예스노’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스노’의 중간자적인 답을 허용하지 않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어린 시절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비정한 ‘철’이 되어 정권에 저항하다 죽어가는 흑인아이들과 그들을 잃은 어머니를 향한 안쓰러움과 동정심 같은 일말의 감정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얘기해주마. 그건 자신의 목숨을 건 재판에서 오직 두 마디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재판관들이 ‘예스 혹은 노, 다른 말은 하지 마시오’ 하고 경고하지. 그래서 ‘예스’라고 하는 거야. 그러나 그러는 동안, 다른 말들이 뱃속의 생명체처럼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거야. ……들어보렴! 그 말들은 공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가슴에서, 내 뱃속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것은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뭔가 다른 것이다. 뭔가 다른 말이다.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것이 질식당하지 않도록 싸우고 있는 거다. ……삶과 죽음 사이의 차이는 별 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것은, 분명치 않은 모든 것은, 힘이 가해지면 굴복하는 모든 것은 귀에 들리지 않을 운명에 처해 있다. 나는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동정심이 식민주의자로서의 공모성을 희석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철의 시대’를 ‘더 부드러운 찰흙의 시대’로 바꿀 수도 없을 것이고,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성을 근절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정심이 아무리 무력하고 지탱하기 힘들며 모순된 것이라고 해도, “이러한 철의 시대에도 동정심이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철의 시대?는 자칫, 예스와 노의 양자택일적이고 이분법적인 논리에 묻히거나 압도되어 들리지 않을 목소리, 즉 ‘예스노’에 관한 이야기다. 쿳시의 소설은 많은 경우, 그처럼 중간자적인 목소리 혹은 가치의 회색지대에 관한 사유이고 담론이다. 쿳시라는 작가에게서 이보다 더 큰 목소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음 말을 곰곰이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은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고통만이 아니라 다른 고통까지 포함한 숱한 고통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고 압도당한다. 나의 소설들은 이렇게 압도당하는 것에 대한 하찮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방어일 뿐이다."
이러한 작가적 입장이 그를 겸손한 작가로 만든다. 그가 사회의 양심을 자처하지도 않고, 또한 계몽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도 아니면서, 윤리성과 정치성과 역사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소설들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