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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저자 : 허만하
출판사 : 솔
출판년 : 2002
ISBN : 8981335893

책소개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의 작가인 허만하 시인의 신작. 『길과 풍경과 시』라는 산문집과 함께 출간된 이 시집은, '풍경의 시학'으로 불릴 정도로 길 위에서 마주친 낯선 풍경들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나의 길은 낯선 장소와의 사귐"이라는 시인에게 "미지와 설렘으로 차 있는 길의 공간은 바로 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도 한 줄의 시를 찾아 "두려움과 호기심에 떨면서 새로운 길 위에 선다"

목차


새롭게 출간된 그의 세번째 시집 『물은 목마른 쪽으로 흐른다』는 그의 두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이어 한층 더 깊은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집이 지닌 안팎의 의의를 간략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두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에서 지적된 과도한 지적 편향성을 뛰어넘어 과학과 철학과 서정을 아우르는 새로운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 두번째 시집에 대해 일각에서는 시인의 시경향을 두고 꼿꼿한 지적 탐구에 의한 시작詩作이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은 김종길 시인(고려대 명예교수)이 지적하듯 개인적 서정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따스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이번 시집에서 심정의 비중이 증가한 증거로는 앞의 시집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언급이나 그것에 관한 작품이 눈에 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가족 가운데서도 시인의 부인에 대한 언급은 '아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루어지기까지 한다.……

잎 진 상수리나무 잔가지를 헤치는 가파른 내리막 길목. 돌부리에 걸려 허공을 잡고 허우적거리는 내 손의 당황. 흘러내리는 체중의 중심을 옆에서 꽉 잡아주는 손. 신의 손이 아닌 따뜻한 사람의 손이었다. 아내의 손이 그렇게 큰 것인 줄은 몰랐다. 두 개의 무게중심이 하나로 겹치는 그날 아침의 눈부신 평형……
-「평형의 풍경」에서

이번 시집에서 보이는 이 시인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사랑하는 가족에게'라는 책머리의 '헌사'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애정은 비단 가족에게만이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것에 대한 시인의 시선視線에서 느껴진다는 점이 앞의 시집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이 시집의 특징이다.……

나무 그늘은 한번이라도 물 안에 잠기고 싶다. 그늘에는 무게가 없다. 무게가 없는 나무그늘은 언제나 물 위에 떠 있다. 물 위에 거꾸로 서서 나무의 꿈은 밤안개에 젖은 가로등 불빛처럼 가늘게 떨기만 한다. 도라지 꽃색 동해 물빛 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햇살. 돌 위에 고인 해맑은 별빛. 아름다운 것은 가늘게 떤다. 땅 위에 눕기 직전의 가을 나뭇잎. 새가 날아오른 뒤의 빈 자리. 보일락 말락 떨고 있다. 분명히 떨고 있다. 가시관을 쓰고 돌아온 자식의 싸늘한 몸무게를 무릎에 껴안고 흰 미사포 쓴 어머니의 두 어깨.
-「아름다운 것은 가늘게 떤다」

이 작품은 그 제목이 말해주듯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시인의 섬세한, 즉 애정 어린 관찰을 보여준다. 여기서 열거된 아름다운 것들은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동해 물빛 위의 햇살, 돌 위에 "고인" 별빛에서 죽은 예수를 무릎에 껴안은 성모 마리아의 두 어깨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떨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떨림은 그것들에 공통된 아름다움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인의 섬세한, 즉 애정 어린" 시선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한편으로는 지성의 시에서 심정 내지 의지의 시로의 이행移行을 암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주의에서 휴머니즘으로의 전향轉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 변화가 점진적인 것이지 급격한 것이 아니며 사실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징후의 단계에 있다는 점이다. 시인 허만하의 압도적인 인상은 여전히 지성의 시인으로서의 그것이지만 이번 시집에 관한 그의 지성은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크게 선회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김종길 시인의 해설 중에서)

2. 이번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는 임우기(문학평론가)가 지적하듯이 두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에서 보여준 수직성을 넘어서서 수평을 향하는 '고갯마루의 시학'을 보여주며, 이는 오르막 뒤에 오는 내리막, 수직 뒤에 오는 수평으로 둥근 원의 형태를 띈다. 이는 두번째 시집의 정신 세계를 한 단계 뛰어넘는 성과를 이룬 것이며, 이 원환적 세계관은 '근원적이고 한국적인 세계관'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풍경의 깊이를 보고 풍경이 지닌 한국적 가락과 장단을 느낀다는 것은 허만하의 시선이 어떤 깊은 세계관에 심취해 있음을 알려준다. 시집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세계관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이고 한국적인 세계관'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아마도 '고갯마루의 세계관'이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고갯마루는 둥근 원환圓環을 상징한다. 그런 고갯마루에 몸과 마음을 의탁한 시인의 모습은 다름아닌 그 둥근 고갯마루을 닮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고갯마루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자연 풍경을 바라보고 마침내 스스로 그 풍경의 일원이 되어버린 시인의 마음은 이미 자연과 생태의 근원에 가 닿아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허만하 시인의 근작시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곳이 바로 고갯마루인 셈이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치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에서 보듯, 마음에 포착된 고갯마루에 기댈 때, 시인은 빈/부, 높이/낮이, 음지/양지, 풍경/나그네의 차별이 '근원적인 시선 속으로' 차츰 지워짐을 자연스레 체험하고 있다. 시인 허만하의 근작시를 이해하는 데 이 점은 중요하다. 이미 보았듯이, 마음의 고갯마루는 삶의 수많은 차별들을 깊이 껴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기서 낯선 물리적 생태계는 시의 생태계, 마음의 생태계로 변화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시의 생태계를 풍경이란 말로 아주 짧게 요약했다. 풍경은 바람과 햇빛이란 뜻이다. 그것은 대자유와 생명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게 고갯마루에 기대어 시인은 자연과 아픈 삶에 대한 대긍정의 눈을 갖게 된다. 이때 시인은 삶과 대자연에 외경심을 갖게 되고 그 속에 깃든 신비함과 거룩함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
전횡專橫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생태계이며 이런 인식은 동양적 사유의 오랜 전통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시인은 '고갯마루에 기대어' 세상 풍경을 보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고갯마루에 기대어 본다는 시인의 시적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한 관조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담겨있음을 보았다. 시인의 의지는 표상으로서 의지일 뿐, 시인의 한겨울 검푸른 밤바다의 절벽같은 수직의 의지는 마침내 고갯마루에 즉 생태계에 몸을 낮추고 거기에 기대는 것이다. 이 말은 시인의 의지가 수직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수직적 의지가 부드러운 원환성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허만하의 시적 바탕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잇고 아우르는 거대한 원圓의 세계이다. 그것은 야생野生과 인간이 하나로 이어진 세계이다. 시인의 어법으로 바꾸면 풍경의 세계. 이러한 그의 시에서 허무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허무주의 탓이 아니라 그의 시정신이 삼라만상을 그 내부에서 꿰뚫는 거대한 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임우기의 해설 중에서)

3. 그 밖의 의의

환갑을 넘은 나이의 시인이 이제야 세번째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시집 출간을 너무 쉽고도 안이하게 생각하는 우리 시단의 풍토 속에서 시 쓰기의 어려움과 진실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성찰을 안겨준다.

문학사적으로 본다면, 청마 유치환의 후배로서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갈 삶의 현장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생명의 환희와 역사 그리고 문명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토착적 생명파 시인'의 시집이라는 점. 이는 소위 생명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유행으로서의 생명시, 정치적 선택으로서의 요즘의 '생명파 시인'과는 구별되는, 청마와 청록파, 그리고 그 밖의 전후 생명파 시인들의 정신사적 맥락을 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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