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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태양꽃
저자 : 한강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 : 2002
ISBN : 8982814795
책소개
2000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작가의 어른을 위한 동화. 어둡고 습한 담장 밑에서 어린 싹이 머리를 내미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땅속에서 나오기만 하면 환한 빛이 가득할 줄 알았던 어린 싹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어두운 빛깔뿐. 담쟁이는 부지런히 자라나서 담장을 넘어가버리고 어린 싹은 자신이 담장을 넘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 고개만 수그릴 뿐인데...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가 태양보다 밝고 빛보다 환한 꽃으로 성장하기 위해 치러내야 했던 독한 가슴앓이를 통해 상처와 절망의 극한에서 기적처럼 마주하는 생의 경이로움을 담았다.
목차
낮고도 어두운 곳에 흐르는 삶의 기적
1993년에 시로, 1994년에 소설로 등단한 이후 존재의 내면에 드리운 생래적 어둠과 고독의 근원지를 집요하게 탐사하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뤄온 소설가 한강은 처음으로 선보이는 동화 『내 이름은 태양꽃』에서 어둠 속에 잠재된 빛의 실재를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작가는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가 태양보다 밝고 빛보다 환한 꽃으로 성장하기 위해 치러내야 했던 독한 가슴앓이를 통해 상처와 절망의 극한에서 기적처럼 마주하는 생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슬프도록 아름답게 이어지는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에 김세현씨의 부드러운 삽화가 조화를 이룬 이번 동화는 소설가 김연수씨의 지적처럼 "어둠 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에 답하는 이야기"이며 "그 낮고도 어두운 곳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를 조용히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왜 슬퍼하지 않느냐구요? 이제는 알고 있는걸요. 나에게 꽃이 피기 전에도,
그 꽃이 피어난 뒤에도, 마침내 영원히 꽃을 잃은 뒤라 해도,
내 이름은 언제나 태양꽃이란 걸요"
어둡고 습한 담장 밑에서 어린 싹이 머리를 내미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땅속에서 나오기만 하면 환한 빛이 가득할 줄 알았던 어린 싹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어두운 빛깔뿐. 담쟁이는 부지런히 자라나서 담장을 넘어가버리고 어린 싹은 자신이 담장을 넘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 고개만 수그릴 뿐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뎌 '조금' 키가 자란 싹은 "저릿저릿 잔뿌리들이 소스라치고, 이마에 홧홧 열이 올랐다가 이내 내리는" 아픔을 겪고 꽃잎을 가지게 된다. "내 꽃이 피었다구!" 기쁨은 잠시, 어린 싹에 돋아난 꽃잎은 빛깔이 없어 잠자리 날개, 해파리, 말미잘 촉수같이 투명하다. "꽃잎이 하도 이상해서, 예쁘다고는 못 하겠어. 못생겼다기보단, ……그냥 이상하게 생긴 것뿐이야." 꽃잎이 안 보이니 저녁바람은 세차게 꽃잎에 부딪히고, 나비 꿀벌 들은 꿀을 빨아먹은 뒤에 상처를 덧나게 한 후 날아가버린다. "모두, 모두! 내 앞에서 없어지란 말이에요!" 상처받은 꽃의 꿀은 더이상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지도 않게 되고 꿀은 맛을 잃어간다.
어느 날 밤, 혼자서 이를 악물고 괴로워하는 나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담장 바로 밑에서 싹을 틔워내려고 애쓰는 작은 풀의 목소리. "애써 흙 밖으로 눈과 귀를 내밀었다 싶으면 언제나 비가 내"려 흙구멍이 막혀 한 번도 세상에 제대로 나올 수 없었던 풀. "땅속에서 눈을 뜨면, 잠깐 동안 보았던 기억이 얼마나 눈부신지 몰라. 세상에는 바람이 있고, 바람이 실어오는 냄새들이 있고, 온갖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이 있고, 별과 달이 있고 검고 깊은 밤하늘이 있잖아. 그것들이 견딜 수 없게 보고 싶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져. (……)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또다시 비가 내려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한 풀의 흔적을 보며 꽃은 이제 울지 않는다. 비에 무참히 꺾인 장미송이들과 봉숭아 맨드라미를 보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볼품없고 흉측하고 지저분한 꽃이라고 해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 모든 것들을 생생한 눈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것. 처음으로 참새들의 왁자지껄한 노랫소리, 상냥한 아침바람, 부지런한 실개미들, 산바람이 실어오는 청솔 냄새, 여린 새털처럼 일렁이는 흰구름떼를 좋아하게 된 꽃은 다시 달콤한 꿀을 되찾고, 몸 어느 구석에선가 탁, 소리와 함께 성냥불 하나가 당겨진 것 같은 통증을 겪으며 꽃잎의 빛깔도 갖게 된다.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부신 빛깔을 확인하는 그 순간 회오리바람 한줄기가 매서운 통증을 주며 스쳐 지나간다. 꽃은 자신의 찬란한 꽃잎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 황금빛 꽃가루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 꽃받침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꼿꼿이 고개를 들고 바라본다. 이제 꽃은 안다. 꽃이 피기 전에도, 그 꽃이 피어난 뒤에도, 마침내 영원히 꽃을 잃은 뒤라 해도, 자신의 이름은 언제나 태양꽃이라는 것을.
새는 울고 꽃은 핀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정현종 시집 『나는 별아저씨』 중에서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절망하려야 절망할 수 없는 것들. 오히려 내 절망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생생히 찰랑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들. 그리고 끈질긴 설득력으로 내게 살아 있다는 것의 기적을 가르쳐”주는 것들. 작가의 말처럼 이 동화는 극한 슬픔과 절망의 바닥에서 발견하는 '생의 기쁨'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모든 것을 우리 앞에 펼쳐주는 시간을 마주하고, 아픈 성장의 과정을 딛고 자신의 이름을 찾고, 아파하고 절망하는 대신 세상 모든 것을 생생한 눈으로 사랑하기. 태양꽃의 꽃잎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유는 작가가 태양꽃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하늘이 얼마나 깊은지, 달빛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밤 공기는 얼마나 촉촉하게 젖어 있는지, 이제 독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