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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저자 : 이철수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 : 2003
ISBN : 8982817565
책소개
하얀 배꽃 지던 밤에 사람도 결국 지고 마는 것이라는, 별 보고 꽃 보는 우리도 때가 되면 그렇게 떨어진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작가 이철수 판화산문집으로 "동양의 자연관과 선(禪)불교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길이 멀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일상사들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각 쪽마다 왼편에는 판화, 오른편에는 짧은 글귀들이 있어 글과 그림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목차
우리 시대 대표적인 판화가의 판화산문집
해어스름, 저물어가는 마을을 배경으로 구수하게 피어오르는 밥냄새나 쇠죽 끓이는 내음새 같기도 하고, 심오한 영적 세계와 현실의 온갖 굴레를 가볍게 벗어난 선적 세계를 그린 선화 같기도 한 이철수의 판화, 이제 우리는 한국 현대미술사를 논할 때 그의 이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조정권의 말대로, 1980년대 중반 예쁜 꽃그림이 판을 치던 판화시장에 이철수가 등장한 것은 민중미술의 영역에서 '판화'를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한 사건이었다. 이철수는 현실주의의 화맥을 판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생활 저변에서 얻어낸 소재와 현실감 있는 표현으로 질박하면서도 구수한 판화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이철수의 판화는 1990년대 들어 생활 저변의 언어를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한편, 점차 동양의 자연관과 선불교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정신의 언어'를 중요한 한 축으로 삼았다.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판화산문집이다.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는 1996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중쇄를 거듭해오다가 이번에 판형을 달리하고 해설을 추가하고 영문 번역을 실어서 다시 펴내게 되었다. 이번 개정판을 토대로 일본 동방(東方)출판주식회사에서 일본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자연을 향한 큰 귀와 생명력 가득한 여백
이철수 판화의 일차적인 소재는 소리·바람·물·소나무·새·길 등 자연물이다.
<낙엽>(8쪽)이라는 작품은 석 장의 낙엽이 떨어져 내리는 장면을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는 "길이/멀다"라는 짧은 글을 옆에 붙였다. 낙엽의 길은 정해진 바가 없다. 나무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의 과정이 곧 낙엽의 길이고, 바람에라도 날려간다면 또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낙엽이 어떻게 떨어질지, 어디로 날려갈지는 바람밖에 모른다. 아니 바람조차도 모른다. 그러기에 낙엽의 길은 알 수 없고, 끝이 없으며, '먼' 것이다.
"잘 있거라/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라고 말하면서 단풍잎이 떨어진다(<적멸>, 14쪽). 이 작품에는 "어제도 마을 골목길에 밝은 주황색으로 불켠 조등 하나 조용히 내걸렸습니다. 근조(謹弔)!"라는 산문을 붙였다. 단풍잎은 별을 상징하고, 떨어지는 별은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이라는 '이별'로 그려내고 있음이다.
이렇게 이철수의 판화에 묘사되는 자연물은 삶의 진실에 대한 기막힌 비유가 된다. 이런 그림들은 또 동양화의 가장 큰 특징인 '여백'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화면을 꽉 채우지 않은 그림의 시원한 여백은 곧 보는 이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가끔은 화면을 꽉 채운 그림이 있다.
새떼들이 대나무숲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림 <대나무는 그 빈자리를 얻고>(52쪽)라는 작품은 하늘을 가득 메운 새떼들의 날갯짓과 울음소리가 실제로 들릴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여기서 새떼들은 통상 여백으로 남겨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점으로 묘사된 새떼들은 마치 하늘로 솟구쳐오르다가 돌연 마음이 변해 작렬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대로 천공에 제각기 얼어붙어버린 불꽃과도 같아 보인다. 그런데 조정권의 견해에 따르면, 이 한 폭의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상승하는 점들이 갖는 생동적인 이미지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그림의 생기발랄한 생명력은 군집되어 대우주를 운행하는 듯한 점들이 보여주는 공간의 진동에 있다. 무수한 점들이 일종의 생명력 가득한 여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충허공적(沖虛空寂)'의 세계이다. 그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세계는 곧 불교의 '선(禪)의 세계'와 통한다.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삶에 새로운 성찰을 갖게 하는 '선'의 세계
조정권은 <차 한 잔>(6쪽)을 선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의 백미로 꼽는다. 화면을 중심으로 차받침 위에 찻잔이 놓여 있고 그 위로 댓이파리가 그려져 있는 담백한 구도이다. 찻잔은 마치 맑고 안정된 마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차받침 접시는 찻잔에 비해 넓고 후덕하다. 찻잔 속에 담긴 쓴차는 처음에는 끓는 물처럼 자신을 고누지 못하고 있다가 서서히 안정감을 찾아 평점심을 이룬 듯 고요하다. 차를 마시는 선승을 그리지 않고도 선사의 깨달음을 깊이 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선의 세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이른바 <좌탈(坐脫)> 연작이다. 좌탈이란 앉아서 몸을 벗는다는 말이니, 곧 좌선한 채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오늘은/장오던 새가 안 온다./어서/가라는/소리라/내/간다"라는 글귀가 붙은 작품(76쪽)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또다른 <좌탈>(88쪽)에서는 "깨달음이/내 손님으로 오실 때야/피해가지 못하지만/나가서/불러들일 일이야 아니지./내 생애가 적적하기만 하여/손님 받을 겨를이/없었다./이제 되었으니/그만 나가서/문 닫아 걸어라"라고 말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선승은 깨달음의 실체를 구경하지 못했다. 깨달음은 일종의 손님이어서 그 깨달음이 자신을 방문한다면 피할 수 없지만, 선승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더이상 손님(깨달음) 받을 힘이 없으니 문 닫아 걸라는 것이다. 오직 깨달음을 참구하며 평생을 좌선에 임해온 선승이 이토록 쉽게 깨달음을 포기할 수 있다니, 우리는 여기서 서늘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깨달음에 대해 초탈한 경지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선'은 불교에서 피어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승이나 선종의 전유물은 아니다. 법정 스님은 선은 정신의 안정과 집중을 거친 침묵의 세계이며, 그 침묵을 배경으로 생동하는 무한한 정신공간이라고 말한다. 선의 세계를 그린 이철수의 판화는 선적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추상적인 설법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삶에 새로운 성찰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잔잔한 기쁨을 선사함으로써 선의 세계를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림을 보고 난 후 더 깊이 울리는 긴 여운
이 판화산문집에는 이처럼 이철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연을 향한 큰 귀, 불교와 선을 해석하는 깊이와 위트, 우리 마음속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순수를 어루만지는 넉넉한 마음 품새가 담뿍 녹아 있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나에게 고요하다"라고 말하는 이철수는 작은 그림에 큰 이야기를, 짧은 글에 긴 여운을 담아 우리의 내면을 두드린다. 그러기에 이철수의 판화를 온전하게 감상하려면 그만큼 우리 마음도 비워둘 일이다. 비어 있는 마음자리만큼 그림을 보고 있는 시간보다 보고 난 후 사색하는 시간과 그 여운이 더 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