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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저자 : 배수아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 : 2003
ISBN : 8982817786
책소개
19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으로 데뷔하여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특한 색깔을 선보여온 배수아의 장편소설. 이 책에는 눈에 띄는 스토리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소설에서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나'가 사랑했던 M에 대한 기억이 그 후의 무미건조한 일상과 교차되며 펼쳐진다. M과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나'는 요아힘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다가, 또 어쩌다가 성탄절 전날이나 연말을 맞아 별 생각 없이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그와 함께 방문한다거나 파티에 참석한다거나 하면서 소일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나'가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회상하는 듯한 그와 같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의 나열이다. 그리고 거기에 M과 함께 했던 시간의 기억이 끼어든다. 아니, 거꾸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찌 보면 M에 대한 기억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은 M과 함께 음악을 듣던 '나'의 기억과 음악에 대한 관념적인 진술로 시작해서 M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고 있고, 그 중심에는 M과의 사랑과 이별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M과 헤어진 후 서술되는 독일에서의 일상이나 한국에서의 연재는 오히려 그 중간에 끼여드는 일종의 후일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 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