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Powered by NAVER OpenAPI
-
원시적 열정
저자 : 레이 초우
출판사 : 이산
출판년 : 2004
ISBN : 8987608360
책소개
'여성'과 '아시아'를 원시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종래의 민족지적 시선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시선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새로운 민족지 또는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의 문화번역으로서의 현대중국영화 읽기. 영화비평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이론적 정교함을 보여주는 문화연구의 압권.
목차
<루쉰이 본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너무나도 유명한 루쉰의 충격적인 체험을 재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강의가 일찍 끝날 때, 선생님은 종료시간까지 자연풍경이나 뉴스 슬라이드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는 러일전쟁 중이었고 그래서 전쟁에 관한 영화[슬라이드]가 많았다. 나는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환호하면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고 있던 영화에 오랜만에 중국인 몇 명이 나왔다. 그들 중 한 명은 묶여 있었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체격이 건장했지만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손이 묶인 사람은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한 자로 본보기로서 공개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될 참이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쿄를 향해 떠났다. 이 영화를 본 뒤부터 의학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소한 후진국 국민은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이처럼 무의미한 본보기의 대상이나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병으로 많이 죽어간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당시 나는 문학이야말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문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소설집 <납함>의 '자서'에서 밝힌 이 루쉰의 체험은 지금까지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문학에 투신하게 된 동기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해석되어왔고, 수많은 중국문학 비평가들은 루쉰의 이 고백에 감동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비평가들의 그런 문학적인 해석에는 무언가 간과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레이 초우는 지금껏 절대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이 루쉰의 고백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루쉰이 받은 시각적 충격에 주목한다. 루쉰은 자기나 자기의 동포들이 세계의 눈에는 구경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국민의식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강력한 미디어가 전통적인 문학의 역할을 빼앗고 그것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이 초우는 루쉰의 문학 안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미지의 역할에 주목하고 루쉰의 문학을 문자와 시각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원시적 열정>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변혁기,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통문화의 기호를 대체하는 때 등장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이다. 여기서 '원시적'이라는 말에는 이중의 의미가 각인되어 있다. 어떤 권위를 가진 '기원' 혹은 '낙후된 것.' 따라서 '원시적 열정'은 잃어버린 순수한 기원 혹은 뒤쳐진 어떤 것으로서의 '원시적인 것'을 되찾고자 하는 정념이다. 이 '원시적인 것'은 문화변혁기에 시간과 언어의 개별성을 뛰어넘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공통의 기반으로 상상되거나 발명된다. 그것은 늘 환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페티시즘이나 이국취미 또는 오리엔탈리즘의 형태를 띤다. 저자가 이 책에 '원시적 열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타자 안에서 '낙후성'이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서양적인 응시에 대한 비판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에서 근대는 이런 서양적인 '원시적 열정'을 스스로 내재화하는 과정이자 결과로 나타난다. 저자는 중국 안에 '제1세계'적 제국주의와 '제3세계'적 내셔널리즘이 공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레이 초우는 중국영화 안에서 원시적인 것이 머무르는 장소로 '여성' '자연' '어린이'에 주목한다. 1930년대 롼링위(玩玲玉) 주연의 무성영화에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이미지를 거쳐, 1980년대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 등의 영화를 공동체, 국가, 일, 학습, 사랑, 혁명, 젠더 등과 같은 범주가 뒤섞이는 교차점으로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논의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녀가 영화제작과 유통이라는 국제영화시장에서의 권력구조의 문제, 다시 말해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제적·권력적 격차라고 하는 문화정치학의 근본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오늘날 문화비평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화두―내셔널리즘, 오리엔탈리즘,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페티시즘, 정체성, 해체, 포스트콜로니얼, 문화표상, 미디어, 시각(視覺), 민족지 등등―와, 수많은 사상가들―마르크스, 프로이트, 하이데거, 그람시, 벤야민, 푸코, 알튀세, 제임슨, 데리다, 아탈리, 스피박 등등―의 담론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진지하고 정교하게 자신의 논의에 이용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영화제작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상황을 포함시켜 영화를 '정독'하는 레이 초우의 자세와, 스크린 상의 이미지만을 끄집어내서 '정독'하는 태도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녀의 독해는 이미지를 세부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위에서 인종, 젠더, 민족성(ethnicity) 등과 같은 문화비평의 틀을 비판적으로 적용한다. 즉 이미지 비평도, 주제 비평도 아닌 제3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화번역>
레이 초우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서양에서 비서양을 향한 응시에 기초한 일방통행적인 민족지를 비판한 3부이다. 그녀가 서문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만, 현대중국영화라는 이 책 전체의 관심사와, 3부의 서양중심적인 민족지에 대한 비판 사이에는 얼핏 거리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3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현대중국영화와 민족지를 구분하여 별개의 것으로 다루는 권력적인 행위를 이 책은 문제 삼고 있다.
그녀의 비평의식이 어떤 문화를 '타자'로 삼아서 논하는 사회조직이나 담론의 구조를 비판하고 그것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을 근거로 그녀는 현대중국영화가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에서 문화번역―서로 다른 문화권끼리, 서로 다른 계급문화끼리, 서로 다른 미디어끼리의 교섭과 경합―의 획기적인 예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번역'의 관점을 결여한 영화론이나 문화론은 사회조직이나 담론구조의 정치적·경제적 역학을 분석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레이 초우의 관심은 하나하나의 영화작품을 논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현대중국영화와 같은 문화를 '타자'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영화비평과, 서양 이외의 문화를 타자화하는 기존의 민족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태도 사이의 유사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데 있다. 나아가 그녀는 메리 루이스 프랫의 '자기민족지'(auto-ethnography)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타자'의 시선을 중심에 둔,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객체'의 이항대립을 허물어뜨리는 양방향적인 새로운 민족지로 현대중국영화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자기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 책은 이른바 제3세계 영화에서 두 가지 측면, 즉 영상 이미지의 해석과, 반(反)오리엔탈리즘 혹은 반제국주의 비평담론이 양방향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비평의 방향으로 영화연구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런 방향성을 가진 영화론은, 이를테면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적인 경향을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상의 이미지가 얼핏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세부에서는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전술이나 비판이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홍수 속에서 국내 대중과 비평가의 호응을 받지 못했거나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주목받은 영화들, 특히 다큐멘터리적인 영화와 저예산 영화에 대한 '정독'에 큰 기여를 할 것이고, 영화 제작과 유통의 권력구조가 반영된 영화비평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