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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
저자 : 요한 바오로 2세
출판사 : 따뜻한손
출판년 : 2003
ISBN : 8995378441
책소개
올해로(2003년) 교황취임 25주년을 맞이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과거 작가 시절로 돌아가 쓴 명상시 모음. 자연과 예술, 신앙에 관한 명상시 10편이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인 폴란드의 자연풍광과 함께 실려 있다. 작가 김남조 씨의 감수로 다시 태어났으며, 부록으로는 번역노트와 역자해설 등이 실려 있다.
목차
1. 「시냇물」
자연은 신의 묵시이며 예술은 인간의 묵시라고 롱펠로우가 말했던가. 첫 번째 시는 생명의 원천인 자연에 대한 명상을 담은, 짧지만 매우 서정적인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자연 속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은 시인은 울창한 산림을 흐르는 시냇물을 보면서 생의 근원을 떠올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동적인 명상이나 심미적 탐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찾아보라고 시인은 외친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은 틀림없이 어딘가에 물줄기가 솟아나는 원천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대가 물의 근원을 발견하려거든 / 물길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니.
용감히 나서라, 끝내 찾아라, 굴하지 마라, / 어딘가 반드시 발원지는 있으리라.
근원이여, 너는 어디에 있는가 / 정녕 어디쯤에서 맑게 샘솟고 있는가.
조류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시냇물은 바로 험난하고 고달픈 인생역정을 상징한다. 시냇물이 흐르듯 우리네 인생도 세월과 더불어 굽이쳐 흐른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과 절망이 산처럼 우리를 가로막아도, 그래도 삶은 축복이자 선물이라는 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존재했다 언젠가는 사라지듯 / 사람도 홀연히 사라질 존재이건만,
유독 사람에겐 / 경탄의 물결 밀려오고 / 넘치는 감동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예로부터 동양에는 ‘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을 생각하라’(飮水思源)는 교훈이 있다. 이 시에도 ‘물의 근원을 찾아 생명수를 마신다’는 구절이 나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진리에 목마른 존재일까.
2. 「시스티나 소성당 문턱에서 ‘창세기’에 관한 명상」
목가적인 서정시로 서두를 열고 난 뒤, 시인은 이제 교황의 전용 채플인 시스티나 소성당에 있는 심오한 예술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서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벽화가 신앙을 묵상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 시의 특징은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문턱’이라는 시어다. ‘문턱’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근원과 종말, 천상과 현세, 창조와 심판을 가르는 하나의 경계선이다. 문턱의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는 탄생과 죽음, 희망과 좌절, 만남과 이별 같은 무수한 생의 무늬가 그려지고 있다. 반면 문턱의 안쪽에는 시작과 끝 ― 창조와 심판이 장쾌하게 형상화되어 우리의 시선을 압도한다. 시인은 바로 이 문턱의 경계에 서서 미켈란젤로가 형상화한 「천지창조」를 바라보며 만물의 근원인 ‘창세기’를 묵상하고 있다.
시스티나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보면서 창조의 신비에 경탄했던 시인은 이제 성당 정면에 위치한 제단화 앞에 다다르게 된다. ‘모든 것을 압도하며 명백한 절정으로’ 장엄하게 형상화된 「최후의 심판」을 보면서 시인은 우리에게 종말에 대해서 일깨워준다.
심판, 최후의 심판, / 우리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거쳐갈 그 길을 / 일깨우고 있느니. // ( ... ) 바로 여기에서 그들은 / 시작과 종말 사이 / 창조의 날과 심판의 날 사이에 놓인/
스스로를 보게 되리라.
문턱을 넘어선 이 곳,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존하는 이 곳에서 ‘나’는 더 이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니다. 그저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83세의 인간 카롤 보이티와일 따름이다. 자신이 태어난 모천(母川)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하는 연어처럼, ‘나’는 창조와 심판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근원으로의 회귀’를 선택한다.
그렇게 세대가 바뀐다/ 맨 몸으로 세상에 와서 맨 몸으로 흙에 돌아가리니
자신이 잉태되었던 원형으로 환원되리라/ “먼지에서 태어나서 먼지로 돌아갈지니라.”
형체는 시초의 무형으로 바뀔 것이요/ 생명체는 무기력한 무생물로
아름다움은 황폐한 흔적으로 바뀌게 되리라.
생의 유한성에 대한 고통스런 굴복이 아니라 존재의 시작으로 회귀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런 순명의 자세다. 일찍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소성당에 근원과 종말의 신비를 형상화했듯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를 통해 생의 경이로운 비밀을 우리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일러준다.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문학의 세계로 복귀한 시인은 ‘에필로그’에서 로마의 서정시인 호레이스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조용하나 분명한 어조로 부활을 예언한다. “내 전부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닐지니, 나의 시 속에서 나는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
3. 「모리야 땅의 언덕」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연의 장’과 ‘예술의 장’을 지나 마침내 다다른 귀착지는 바로 ‘신앙의 장’ 「모리야 땅의 언덕」이다. 이 작품은 문장 속에 운율과 리듬감이 살아있어 세 편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의 운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명으로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봉헌해야만 했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모리야 땅의 언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의미를 역설하면서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모리야 언덕’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문턱’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그 문턱은 존재의 근원인 태초의 땅으로 향하는 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회하는 곳은 / 언젠가 아브라함이 떠나갔던 자리
목소리를 들었던 그 곳, 약속이 실현되었던 그 곳, / 우리가 헤매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문턱에 서기 위해서 / 계약의 근원에 다다르기 위해서.
‘문턱’이라는 메타포에는 선명한 희망의 징후가 담겨있다. ‘문턱’은 그 너머에 ‘집’이 있음을 의미한다. 헌신과 사랑에서 비롯된 생의 원형, 거기에 인간이 되돌아갈 안식처가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는 누추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는 인식과 사유 이전에 우리 영혼에 직접 손을 내밀고 있다.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각성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픈 곳을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는 ‘위안의 문학’이다. 전쟁과 불신, 대립과 반목이 난무하는 불안한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양보와 배려에 인색한 각박한 세태 속에서, 니힐리즘이 판을 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이러한 진솔한 고백과 겸허한 성찰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