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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단편선)
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단편선)
저자 : 나쓰메 소세키
출판사 : 현암사
출판년 : 2016
ISBN : 9788932318301

책소개


「이백십일」, 「열흘 밤의 꿈」,
「긴 봄날의 소품」, 「유리문 안에서」

내면의 고독을 마주한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내는 진진한 삶의 관찰

나쓰메 소세키 작품 세계의 시작점이자
그 이상과 그 너머를 발견할 수 있는 단편들


일본 근대 문학의 출발이자 ‘소설이 없던 시절의 소설가’, 천년의 문학가라는 평가를 받는 나쓰메 소세키의 사후 100년을 맞아 그의 작품 세계를 되짚어볼 수 있는 중편소설과 수필을 엮은 책이 출간됐다. 나쓰메 소세키는 10여 년의 짧은 작가 생활을 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이 『긴 봄날의 소품』에는 중편소설 「이백십일」, 「열흘 밤의 꿈」과 수필 「긴 봄날의 소품」, 「유리문 안에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백십일」은 두 친구가 궂은 날씨에 아소 산을 오르며 티격태격하는 대화를 그린 만담 같은 소설로 소세키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열흘 밤의 꿈」은 어딘가 미스터리한 열 개의 꿈을 나열하였는데 각각의 꿈은 미묘하게 쓰인 방식이 달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수필집 이름이기도 한 「긴 봄날의 소품」에는 주로 따뜻한 봄날의 일상이나 런던 유학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고, 소세키의 마지막 수필인 「유리문 안에서」는 건강 악화로 인해 주로 서재의 유리문 안에서 지내게 된 소세키가 내다본 바깥 이야기들이 담담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목차


“되려고 생각해봤자 세상이 되게 해주지 않는 게 꽤 있겠지?”
“그래서 딱하다는 거네. 불공평한 세상에 태어나면 어쩔 수 없으니까 세상이 하게 해주지 않아도 뭐든지 스스로 되려고 생각하는 거지.”
“생각해도 되지 않는다면?”
“되지 않아도 뭐든지 생각하는 거지. 생각하는 사이에 세상이 해주게 되는 거네.”
---「이백십일」중에서

“뭐,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지. 부자나 귀족이 그렇게 난폭한 짓을 하면 그렇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니까 말이네. 보게, 저렇게 으르렁거리며 뿜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지.”
---「이백십일」중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첫 번째 목적은 이런 문명의 괴수들을 때려죽이고, 돈도 힘도 없는 평민에게 얼마간이라도 안도감을 주는 데 있을 거네.”
“그렇지, 음, 그렇고말고.”
---「이백십일」중에서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차가운 이슬이 맺힌 하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백합에서 얼굴을 떼면서 무심코 먼 하늘을 봤더니 단 하나의 새벽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
---「열흘 밤의 꿈」 p.84

“네가 나를 죽인 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이지?”
이 말을 듣자마자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분카 5년 용의 해에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이 삼나무 밑둥치 옆에서 한 맹인을 죽였다는 자각이 홀연 내 뇌리에 떠올랐다. 나는 살인자였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은 순간 등에 업힌 아이가 갑자기 지장보살의 석상처럼 무거워졌다.
---「열흘 밤의 꿈」중에서

지난 두세 달 동안 읽어야 했는데도 읽지 못한 책이 책상 옆에 수북이 쌓여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기만 하면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들 의논할 거리를 가지고 왔다. 게다가 위가 아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은 다행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추워 마음이 내키지 않고 화로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긴 봄날의 소품」중에서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네 살배기 딸아이가 혼자 묘 앞으로 갔다. 나는 그때 서재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잠시 칠하지 않은 막대기인 묘표를 보고 있다가 손에 든 장난감 국자를 내리더니 고양이에게 올린 그릇에 담긴 물을 떠서 마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싸리 꽃이 떨어져 흩어져 있는 물은 조용한 황혼 속에 몇 번인가 아이코의 작은 목을 적셔주었다.
---「긴 봄날의 소품」 p.147

나는 그때 비로소 사람의 바다에 빠졌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 바다는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넓은 것치고는 무척 조용한 바다다. 다만 나아갈 수가 없다. 오른쪽을 봐도 막혀 있다. 왼쪽을 봐도 막혀 있다. 뒤를 돌아도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조용히 앞쪽으로 움직여간다. 오직 이 한 줄기 운명 외에 나를 지배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수많은 검은 머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보조를 맞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긴 봄날의 소품」 p.152

하지만 내 머리는 이따금 움직인다. 기분도 다소 변한다. 아무리 좁은 세계라고 해도 나름대로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은 나와 넓은 세상을 격리하고 있는 이 유리문 안으로 때때로 사람이 들어온다. 그들은 또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 나는 흥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맞이하거나 보낸다.
---「유리문 안에서」중에서

가까스로 병이 나아 잠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객실 툇마루에 서서 초저녁 어스름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곧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산울타리 옆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헥토르는 아무리 불러도 도통 내 마음에 응하지 않았다. 내가 한 달쯤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헥토르가 이미 주인의 목소리를 잊어버린 건가 해서 희미한 애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문 안에서」중에서

숨이 막힐 만큼 괴로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날 밤 오히려 인간다운 좋은 마음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귀한 문예 작품을 읽은 후의 기분과 같은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라쿠자나 데이코쿠 극장에 가서 의기양양했던 자신의 과거 그림자가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유리문 안에서」중에서

불쾌감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한번은 이르러야 하는 죽음이라는 지경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 편한 것이라고만 믿고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일도 있다.
---「유리문 안에서」중에서

지금의 나는 바보여서 사람들에게 속거나 아니면 의심이 많아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을 것 같다. 불안하고 불투명하고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그것이 평생 계속된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불행한 존재일까.
---「유리문 안에서」중에서

뜰에서는 아직도 휘파람새가 이따금 운다. 봄바람이 가끔 뭔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구화란 잎을 흔들러 온다. 집도 마음도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유리문을 활짝 열고 조용한 봄 햇살에 싸여 넋을 잃은 채 이 원고를 끝낸다. 그런 후 나는 이 툇마루에서 잠깐 팔꿈치를 구부려 베개로 삼고 한숨 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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