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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언어의 무게
저자 : 파스칼 메르시어
출판사 : 비채
출판년 : 20230403
ISBN : 9788934981190

책소개


모두가 잊은 낭만을 되살리는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후 16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전세계를 매혹한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로 독자들을 만난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배경으로 여러 문학인의 삶을 다채롭게 조명한다. 유서 깊은 출판사를 경영해온 레이랜드는 생의 끝자락에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번역가로서 살아온 세월과 흘러간 인연,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인…….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은 이 모든 사람을 돌아보며 레이랜드는 그동안 외면해온 창작을 향한 열망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섬세하면서도 깊은 사색, 문학에 기대어 살아가는 인물들의 극적 에피소드와 유럽의 낭만적 풍경. 『언어의 무게』는 ‘파스칼 메르시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든 강점이 담겼다’는 극찬을 받고 〈슈피겔〉 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작가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될 자격을 증명하고 있다.

목차


문장이 마음에 들면 늘 그렇듯이 레이랜드는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며 그 리듬에, 음색의 리듬과 뜻의 리듬에, 그리고 그 두 리듬이 서로 섞이는 방식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에 그는 자신이 말의 울림을 즐기는 것 말고 다른 일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비아에게 문장을 낭독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11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집중하는 방식은 그를 사로잡고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2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트리에스테 집에서 둘은 계단 제일 위쪽 층계에 앉아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독일어와 영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가끔은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 p.23

밤마다 접수처에 앉아 있던 3년 동안 레이랜드는 그 전에는 책으로만 알던 일을 직접 보고 들었다. 술에 취해 돌아온 손님들은 자기 객실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서류를 잃어버리고 숙박비를 갚지 못하기도 했다. 복통이 심해서 의사를 불러야 한 손님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산통이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어 구급차가 달려왔다. 경찰이 나타나 누군가를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 정신 나간 어떤 음악가는 새벽 3시에 트럼펫을 연주했다. 너무 급해서 미처 침대까지 가지 못하는 연인도 있었다. 어떤 영화 팀은 하필 한밤중에 촬영하려고 했다. 낯선 도시에 와서 급하게 변호사를 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모국어를 할 줄 아는 레이랜드를 반가워했다. 실망과 불안, 고독에 대한 토막 난 이야기들이었다.
--- p.60

“난 약사였습니다. 아버지 약국을 넘겨받았지요. 이스트 엔드의 해크니 지역이었어요. 그곳에는 노동자와 빈민, 서류가 없는 외국인도 많이 삽니다. 의사는 적고, 오래 기다려야 하지요. 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명백한 질병, 명백한 증상이었지요. 내가 알아본 건 의사도 똑같이 판단했을 겁니다. 난 첫해에는 약사가 해야 하는 말을 했어요.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팔 수 없다고. 그러다가 힘든 겨울이 왔어요. 전염병과 폐렴, 위험한 질병이 많이 돌았지요. 기침을 하는 엄마와 병든 아이들. ‘의사에게 갈 수 없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들이 말했지요. 그래서 처방전이 필요한 약을 처방전 없이 주기 시작했습니다. 약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와서 감사 인사를 했지요. 소문이 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난 회계장부를 조작했지요. 직원은 그걸 보며 침묵하다가 말했어요.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이러는 게 옳아요. 불법이긴 하지만 옳다고요.’
--- p.131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네. 2년이 넘게 걸렸는데, 예상보다 긴 시간이었지. 거의 모든 문장마다 다른 버전도 썼으니까. 바스크어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일관된 러시아어 음색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했네. 시작하고서야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지만, 죽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살아 있게 해주는 그 어려움이 고마웠지.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공황상태에 빠졌네. 수감 기간이 아직 6년이나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이 이야기를 바꿔서 써보자는, 나를 구원해줄 아이디어가 떠올랐지. 앙투안을 파괴적인 친밀함에서 해방시킬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보자고 말일세. 이중적인 의미에서 흥미로운 계획이었네. 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의 문장과 장면으로 쓰고, 앙투안에게 그 감정을 겪게 함으로써 내 감정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
--- p.360

인생에서 일어나는 반복…… 이게 소설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질서와 안전감을 주는 반복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그런 반면 삶이 지루하다는 권태와는 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레이랜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랫동안 은밀하게 동행해오다가 이제 거기에 맞는 정확한 언어를 찾을 만큼 명백해진 감정, 소설의 주제는 그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생겨나는 걸까? 은퇴한 노인, 모든 것이 지겨워진 남자,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이 되풀이되는 일들이 지겨워진 남자에 관한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서서히 인정하는 과정을 다루는 게 중요할 듯했다. 불현듯 그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베레모 아래로 헝클어진 허연 머리카락이 보이는 마른 남자, 담배 파이프와 지팡이와 개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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