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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저자 : 미야모토 테루
출판사 : 비채
출판년 : 20230517
ISBN : 9788934981282
책소개
“한 사람의 생에 얼마나 막대한 우주의 에너지가 쏟아지는지,
한 사람의 생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지,
그러니까 인간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인생은 깊은 것이니까요.”
_미야모토 테루(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환상의 빛』의 거장 ‘미야모토 테루’의 매혹적인 새 소설
삶의 환희, 죽음과 상실 그리고 남겨진 행복에 대하여
1977년 자전소설 「흙탕물 강」으로 다자이오사무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래, 서정적이면서도 정묘한 문장,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현대 일본 문단을 이끌어온 거장 미야모토 테루. 그의 신작 장편소설『등대』가 비채에서 출간되었다.
『등대』는 갑작스레 아내를 떠나보낸 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인 주인공이 우연히 등대 여행에 나서며 이를 통해 일상을 회복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간 진격하듯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며 삶의 의지를 되찾는 재생의 기록이자 서툰 남편, 무심한 아버지의 반성과 성장을 담은 따뜻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 출간 즉시 ‘인생의 가치를 전하는 작품’ ‘서민의 소박한 일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소설’이라며 「요미우리 신문」「산케이 신문」「마이니치 신문」 등 주요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독자들 역시 ‘서툰 사람들의 선한 이야기’ ‘조용하게 마음을 씻어주는 소설’이라며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목차
아버지는 약한 불에도 세 단계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하룻밤 찬물에 우린 마른 멸치와 말린 고등어포를 ‘마키노’에서는 가장 약한 불로 조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바로 불을 끄고, 내용물을 헝겊 주머니째로 꺼낸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당시 창고로 쓰던 2층에서 커다란 종이를 가져왔다.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 셋째도 청결, 넷째도 청결, 다섯째가 맛과 영양,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수행이다. 밤에 가게 닫으면 주방 구석구석까지 번쩍번쩍하게 닦아. 스테인리스 선반, 벽, 조리대, 가스레인지, 육수냄비, 조리 도구, 환풍기 주변까지, 기름얼룩은 물론이고 먼지 한 톨 없게 씻고 닦아. 매일 밤이야. 하루도 거르지 말고. 영업중엔 설거지. 면기, 숟가락, 앞접시. 뭐든지 뽀드득뽀드득 씻어. 꾀부릴 생각은 말고. 손님 가시면 바로바로 카운터와 테이블을 깨끗한 행주로 닦아.”
--- pp.24~25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 p.206
고헤는 어쩐지 아쉬워 선뜻 떠날 수 없었다. 조금 더 그곳에서 백아白牙의 시리야사키 등대를 바라보고 싶었다. 안개 속에 서 있는 자못 우아한 자태가 한 인간의 기나긴 과거에서 온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
--- pp.301~302
“응. 그래도 얘기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왜요?”
“뭔가 소중한 것이 비눗방울처럼 터져 사라질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이 뭔데?”
고헤는 대답을 고민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는 왜 이리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