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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요법 문화 (실존적 불안 시대에 취약한 주체 계발하기)
치료요법 문화 (실존적 불안 시대에 취약한 주체 계발하기)
저자 : 프랭크 푸레디
출판사 : 한울아카데미
출판년 : 2016
ISBN : 9788946058989

책소개

영미권 사회에서 치료요법적 정명이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탐구하는 『치료요법 문화』.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 프리즘을 통해 일상생활의 문제를 틀 지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하고 병들었다고 느끼게 한다. 푸레디는 대중문화, 정치, 사회적 삶에서 진전되고 있는 치료요법적 전환에 대해 개척자적 분석을 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프랭크 푸레디가 이 매혹적이고 쉽게 읽을 수 있는
- 그리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 책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치료요법은 실제로 새로운 ‘인민의 아편’이다.
_버지니아 아이언사이드(virginia Ironside), ≪인디펜던트≫


『치료요법 문화』는 영미권 사회에서 치료요법적 정명이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탐구한다. 최근 몇십 년간 실제로 삶의 모든 영역이 새로운 감정 문화에 예속되어왔다. 푸레디는 최근의 이러한 감정 영역으로의 문화적 전환이 인간임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것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점점 더 취약성이 사람들의 심리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위험에 처한’, ‘상처받은 삶’ 또는 ‘감정적 손상’ 같은 용어들이 사람들에게 유례없는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푸레디는 치료요법적 전환을 감정으로의 문명화된 전환으로 바라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테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의 관리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순응을 강요한다.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 프리즘을 통해 일상생활의 문제를 틀 지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하고 병들었다고 느끼게 한다. 푸레디는 대중문화, 정치, 사회적 삶에서 진전되고 있는 치료요법적 전환에 대해 개척자적 분석을 하고 있다.

역자의 변, therapy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어쩌면 독자들은 이 책을 마주하자마자 책의 제목에 생소해 하거나 어색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 책을 번역한 옮긴이에 따르면, 책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therapy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기존 번역서에서는 ‘치료’, ‘치료법’, ‘치유’, ‘치유법’ 등으로 옮기거나, 복합명사로 사용될 경우 ‘요법’ - 심리요법, 식이요법 등 - 으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아예 영어를 그대로 읽어 ‘테라피’로 표기하기도 한다.
앞의 우리말 용어들은 therapy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들로는 논자에 따라서는 therapy와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용어들인 treatment, cure, healing과 구분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 푸레디는 therapy는 치료법(treatment)으로 장려되기도 하지만 치료법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therapeutist들은 therapy를 치유(healing)의 하나의 방법, 즉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는 치유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therapy와 healing은 이 책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치료 또는 치유라는 용어는 이 책에서 사용하는 therapy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 요법이라는 용어는 앞서의 예와 같은 복합명사로 사용할 경우 그 의미를 잘 전달하지만, 독립적인 단어로 사용할 경우 그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책의 제목처럼 ‘요법’이라는 단어와 ‘문화’라는 단어가 결합할 경우 매우 어색하다.
따라서 대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therapy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테라피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therapeutic, therapeutist, therapeutics 등 therapy의 파생어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어, 테라피라는 용어들을 사용할 경우 그러한 용어들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데서 더더욱 어색함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궁리 끝에 중복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역자가 새로 선택한 것이 ‘치료요법’이라는 말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이지만, 아직은 더 좋은 표현을 만들지 못함을 양해해달라는 역자의 전언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치료요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의 저자 푸레디도 치료요법 에토스가 아직 형성과정 중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그것을 정의하기를 망설인다. 다만 그는 로버트 벨라의 정의를 인용하여, 치료요법은 “심적 장애를 치료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유방식”이라고 언급한다. 푸레디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방식이 개인과 치료요법사 간의 관계를 인도하는 것에서 다양한 이슈들에 관한 공중의 인식들을 틀 짓는 것으로 확대될 때, 그 문화는 치료요법적이 된다. 그 지점에서 그것은 임상기법이기를 중단하고 주체성의 관리를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된다.” 이러한 논의에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듯이, 이 책에서 푸레디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임상기법으로서보다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치료요법”이다.

‘치료요법 문화’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치료요법 문화’란 무엇인가? 푸레디에 따르면, ‘감정주의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어지는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에 권위를 부여하고, 감정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푸레디는 이러한 치료요법적 사유방식의 작동을 영미사회 도처에서 찾아낸다. 먼저 정치 영역을 보자. 정치인들은 특정한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에 의해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9·11 직후 미국 공중은 조지 부시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 후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정치인들 역시 대의와 신념보다는 감정표출 - 특히 눈물- 을 통해 유권자에 호소한다. 그리고 유권자들 또한 그도 우리와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끼고 동정심을 드러낸다. 영국의 경우 산업세계에서도 치료요법은 “경영통제권을 유지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한다. 경영자들은 피고용자들을 해고하고 그들의 생존적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해고자들에게 카운슬링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마감한다. 노동조합들은 단체교섭을 통해 의미 있는 이득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스트레스로 감정적 고통을 받는 조합원들을 위한 보상을 받아내는 일에 더 집중한다.
이처럼 감정은 치료요법 문화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치료요법 문화가 그간 사회인식에서 무시되어온 감정을 문화적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푸레디에 따르면,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 그 자체보다는 ‘감정적 결함’에 관심을 가진다. 치료요법적 세계관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가 고통을 받는 것은 감정적 결함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이 낳은 트라우마는 ‘평생의 상처’로 남아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또 다른 학대와 범죄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감정결정론’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 중 많은 것이 감정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한다. 그 결과 처리되거나 관리되지 않은 감정은 사회를 괴롭히는 질병의 원인으로 간주되게 된다. 이러한 감정적 결함의 담론은 나쁜 감정을 ‘병리화’하고, 치료요법의 대상이 되게 한다.

치료요법적 자아, ‘축소된 자아’

이러한 감정에 대한 관심은 치료요법 문화에서 자아, 특히 ‘감정적 자아’에 주목하게 한다. 치료요법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는 내적인 감정적 삶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윙클의 표현으로 “나의 감정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나이다.” 이렇듯 치료요법 문화는 감정영역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인식한다. 따라서 치료요법은 “감정적 자기발견을 통한 자아재구성 프로젝트”로 자신을 채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푸레디에 따르면, 치료요법 문화는 자아를 유례없이 취약하고 무력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왜냐하면 감정적 결함을 통한 자아의식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실존적 불안감을 강화하고, 자신의 행동을 문제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하고, 스스로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성된 치료요법적 자아, 즉 ‘축소된 자아’는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취약한 주체’가 되고, 그러한 시도를 하는 개인은 ‘완벽주의자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 다시 말해 치료요법적 개입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된다. 반면 자신의 감정적 결함을 세세히 드러내고 치료요법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은 치료요법의 세계에서 ‘용감하고’ ‘솔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칭찬받는다. 푸레디에 따르면, 치료요법 문화는 결국 끝없이 자기계발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고 자율적 개인이 아닌 수동적이고 의존적 개인을 만들어낸다.

치료요법적 전환이 초래한 문제들

푸레디는 계속해서 이러한 치료요법적 전환이 초래한 문제들을 사회학적으로 명쾌하게 분석한다. 그중 하나가 사적 영역의 병리화 내지 해체이다. 전통적으로 사적 영역은 친밀성과 자기표현 그리고 자기탐색이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감정형성의 핵심적 장으로 인식되어왔다. 반면 치료요법적 세계관에 따르면, 사적 영역은 (특히 여성과 아동에게) 내밀한 폭행과 학대가 가해지는 장소이자 감추어져 있는 공간이다. 이렇듯 사적 영역이 병리화되고 범죄의 공간으로 상정됨에 따라 이제 사적 영역은 ‘공적 감시’ 내지 치료요법적 관리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사적 영역의 친밀한 관계가 감정적 고통의 원천으로 간주됨에 따라 비공식적 관계는 자아를 증진시키기보다는 위험을 내재한 관계로 인식되고, 친밀한 관계에서까지 불신의 분위기가 지배하게 한다. 따라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자기소외는 이제 근대인의 감정적 손상의 원인이 아니라 자기 생존의 원리가 된다. 이렇듯 치료요법 에토스는 연대의 해체를 넘어 인간불신의 문화를 조장한다.
푸레디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취약하고 소원해진 자아가 취하는 치료요법적 생존전략이 ‘감정적 순응’과 ‘인정의 정치’이다. 먼저 치료요법적 사유방식을 따를 때, 취약한 자아의 이면에는 개인들이 조절하거나 다스리지 못한 부정적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 관리는 자기계발의 중요한 기제가 된다. 그러나 무력한 주체는 자기계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인은 부정적 감정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고, 그러한 감정을 유발한 사회적 조건을 개선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취약한 자아는 공적 제도와 치료요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들에 도움을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치료요법은 감정교양의 함양이라는 이름하에 그리고 자존감 고취라는 명분 아래 개인들에게 사회에 감정적으로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결국 치료요법의 자기발견 프로젝트는 사회에 대한 감정적 순응의 강요로 귀착되고 만다.
다른 한편 취약한 주체가 느끼는 실존적 불안은 자아로 하여금 계속해서 긍정받고 싶어 하게 한다. 하지만 특정한 성과와 공적 행동이 없는 취약한 주체의 경우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자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적 상처이다. 왜냐하면 무력한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자신들이 고통받는 희생자 내지 피해자 또는 환자라는 것이다. 푸레디는 이것이 바로 치료요법 문화에서 ‘희생자 정체성’이 중요한 무기가 되고, 또 희생자 옹호자들이 그 무기를 전략적으로 개발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치료요법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새로운 ‘인민의 아편’이다”

푸레디에 따르면, 이러한 치료요법의 세계에서 정부의 일 역시 변화한다. 국민들의 엄청난 감정적 상처가 유발하는 사건에 대해 정부는 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것의 재발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피해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을 돕는 일에서 그것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 또한 경제 영역에서도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보다 실업자들이 ‘실업이라는 곤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쪽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푸레디는 오늘날의 치료요법은 “계몽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생존의 도구”라고 결론짓는다. 치료요법은 오늘날의 허약한 자아를 만들어낸 조건을 고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개인들에게 “긍정과 인정이라는 모호한 축복”을 제공할 뿐이다. 푸레디가 직접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에 대한 한 논평자의 말을 인용하면, 치료요법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인민의 아편’이다.”

치료요법 문화를 통한 현대 문명 비평

지금까지 푸레디의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국과 미국의 경우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고통과 힐링 사이를 헤매는 수많은 한국인들, 끝없는 자기계발의 노력을 경주함에도 항상 허전함에 빠져 있는 청년들, 세월호 이후의 대통령 눈물 논쟁과 그 원인은 애써 외면하며 생존자 트라우마 치유에 허둥대던 정부와 심리 전문가들이 거듭 교차하는 것은 왜일까? 한국사회도 지금 치료요법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일까? 한국 정부도 치료요법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가? 치료요법 문화를 통한 현대 문명 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우리와 같은 관심을 공유한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통해 자아 찾기에 전력을 다하면서도 무력함과 허무함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그러한 ‘노오력’이 왜 기쁨의 과정이 아니라 고통의 과정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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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서론
감정적 결함 | 치료요법적 개입 | 치료요법의 의미체계 | 우리 시대의 의미체계 | 이 책에 대하여

제1장 감정주의 문화
사회적 문제를 감정적 문제로 바꾸어 놓기 | 감정에 대한 애매한 태도 | 관리 대상으로서의 감정 | 감정 드러내기 | 고백실의 부활

제2장 감정정치
공적 삶에서 감정의 지위 변화 | 감정의 얼굴을 한 관리주의 | 공중의 치료요법적 정치 참여 | 치료요법적 정치 스타일 | 치료요법 정치의 제도화

제3장 프라이버시와 비공식적 관계 겨냥하기
사생활에 숨어 있는 추악한 비밀들 | 그리고 공적인 것의 놀라운 타락 | 비공식적 관계 겨냥하기 | 대인관계 범죄화하기 | 결론

제4장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전통의 쇠퇴 | 종교와 공유된 도덕적 규범의 쇠퇴 | 정치의 사망 | 사회통제 | 일상생활의 전문화 | 결론: 사적 영역의 해체

제5장 축소된 자아
취약한 자아 | 상황의 희생자들 | 중독이라는 물신 | 수동적 주체의 사회화

제6장 위험에 처한 자아
위험에 처한 자아: 자아의 객체화 | 두려워하는 주체 | 위험한 관계들

제7장 허약한 정체성: 자존감에 대한 집착
내부로의 전환 | 소원한 정체성 계발하기 | 끝없는 정체성 요구 | 자존감: 우리 시대의 문화적 신화 | 자존감 신화에 대한 반발 | 반지성주의적인 감정 에토스

제8장 인정해주기: 정체성 추구와 국가
인정 국가 | 존중에서 도덕적 내용물 비우기 | 인정과 진단의 혼동 | 결론

제9장 치료요법식 주장 제기하기와 진단의 요구
치료요법식 주장 제기하기 | 희생자의 권위 | 도덕적 진실 주장 | 자원에 대한 요구 | 치료요법의 책임 기준 | 우리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가?

맺음말: 무엇이 문제인가?
반대하는 감정들에 대한 불관용 | 감정적 순응의 요구 | 신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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