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본문

절망의 구
절망의 구
저자 : 김이환
출판사 : 예담
출판년 : 2009
ISBN : 9788959133987

책소개


1억원 고료 '제1회 멀티문학상' 수상작
정체불명의 구에게 쫓긴다. 붙잡히면 죽는다!


출판 및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발굴하고자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영화투자배급사 쇼박스, 방송사 SBS 등이 만든 '멀티문학상' 수상작. 작가가 정체불명의 검은 구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난 후, ‘정체불명의 구에게 붙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소재로 쓰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동안 판타지 및 SF 소설 등 장르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는 과감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감정, 즉 공포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절망의 구』는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검은 구’가 지구에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느 평범한 남자가 겪게 되는 지극히 평범하지 않은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나타났는지, 왜 사람을 빨아들이는지 모른 채 오로지 구를 피해 쫓기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공포, 불안, 절망감에 휩싸인 사람들은 점점 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혼란이 벌어지고, 이 혼란을 틈타 무차별한 강도, 폭도들까지 등장한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시각각 위협해오는 불안, 가늠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포는 평범했던 일상을 순식간에 뒤흔들며 산산 조각낸다.

정체모를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긴장감 있게 표현해낸 기묘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긴장시키고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과 내면에 대해 다시 생각게 하는 작품으로서 한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목차


정체불명의 그것은 남자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물체였다. 높이는 이 미터쯤 되고, 완전히 둥글고, 표면은 검은데 광택은 없어서, 꼭 둥그런 그림자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그것과 남자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 단지 몇 발자국밖에 되지 않았다.
“저게 뭐야?” --- p.12

마침내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산의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가 올라온 쪽에서는 많은 사람과 차가 도로를 막고 있어 일대가 매우 혼잡했고, 그가 내려가야 하는 쪽에는 어둡고 정적에 잠긴 도시가 있었다. 기묘한 대비였다. 남자는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 p.83

갑자기, 남자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차갑고 오싹하고 괜히 기분이 나빴다. 등 뒤에서 누군가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차가운 비나 바람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한밤중 이상한 공포를 느끼고 눈을 떴을 때 목덜미로 올라오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남자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고, 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등 뒤에 검은 구가 있었다.

구가 거실을 가로질러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 괴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무생물처럼, 그를 집어삼킬 어둠처럼 생긴 것이 그에게 다가왔다. --- p.98

눈을 뜨면 검은 구는 남자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음 순간 커다란 눈동자로 보였다가, 잠시 동안 끝없는 심연으로, 그러고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로 보였고, 사방이 막힌 동굴로도 보였다. 남자는 두려웠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마치 관에 갇힌 것 같았다. 돌 더미에 파묻히고 땅에 매몰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36

시간이 흘렀다. 흐르고 또 흘렀다. 두 사람은 친했지만 친하지 않고, 늘 붙어 있었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했고, 돕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면서도 상대방을 믿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상당히 많은 대화를 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대화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남자는 청년에게 자신의 정확한 신상을, 어디에 살았는지, 어떤 일을 겪고 이곳까지 왔는지 말하지 않았고 그것은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 p.271

시선마다 검은 구가 앞을 틀어막고 있었다. 침대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그것들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 것만 같았다. 너는 언제 죽을 거야? 우리가 기다리고 있잖아, 죽으려면 빨리 죽어, 우리는 너를 흡수하고 싶어. 그러면 남자는 대답했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든가. --- p.307

남자는 가구 매장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왔다. 그는 눈을 감았지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다. 끝도 없이 불안했다. 무서웠다. 잠도 달아났다. 그는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다 죽어도 싸, 개새끼들.” --- p.311

나는 길을 걸어가다가 구를 만났어. 뭐지?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얼굴부터 구에 닿아서 흡수됐어. 그리고 까만 암흑에 갇혔는데, 꼭 가위 눌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 몸이 없는데 생각은 있고, 죽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의식은 있는, 그런 상태였어.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랬어. 그리고 다시 살아나더라. 깨어보니 길바닥이었어.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었는지 바닥에 누워서 엉엉 울었어. --- p.359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왜 구에 흡수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은 ‘궁금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남자는 그 호기심 뒤에 있는 섬뜩한 집요함을 간파했다. 그들에게 붙잡혔다가는 죽는다. 남자는 확신했다. 그들은 남자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분명 모든 증오를 남자에게 퍼부을 것이다. --- p.371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도 왜 구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모른다. 그리고 왜 자신이 흡수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왜 구가 다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해답을 모르는데 왜 사람들은 그를 쫓는단 말인가? 정말로 구가 처음 나타나자마자 남자가 구를 신고했다면 피해가 적었을까? 남자가 구에 흡수되지 않는 사람임을 빨리 알아내고 그와 접촉한 사람 역시 흡수되지 않는 걸 알았다면 피해가 적었을까? 그걸 몰랐던 게 남자의 잘못인가? 그는 끝없이 자신에게 되물었고 잘못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왜 아무 죄도 잘못도 없는 나를 끝없이 쫓아오는가?
“다 죽어도 싸, 개새끼들.”

Quick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