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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의 즐거움
식사의 즐거움
저자 : 하성란
출판사 : 현대문학
출판년 : 2010
ISBN : 9788972754565

책소개


자신이 다른 이와 뒤바뀐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는 한 남자
소외된 실존과 억눌린 욕망을 지니고 있는 우리 시대 가족의 이야기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다수의 국내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하성란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1998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출간되었다. 자신이 갓난아기였을 때 병원에서 다른 아기와 뒤바뀌었다고 믿는 한 남자가 생의 비의秘意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이 작품은 세밀하면서도 절제된 필치로 ‘가족’이라는 보편적 테마 속에 담긴 인생의 본질과 인간의 실존에 대해 탐구해가며 삶과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현재의 부모가 자신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환상에 시달리는, 이른바 ‘기억과잉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 남자와 역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재경이라는 소녀의 이야기와 주인공을 둘러싼 갈등, 즉 화가 치밀 때마다 밥상을 뒤엎어버리는 아버지와 그에 짓눌린 채 살아온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한 스토리다. 저자는 소외된 실존과 억눌린 욕망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과 가족의 모습을 통해 삶의 희망이 부재한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위기에 처한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목차


라디오가 있다면 93.5메가헤르츠를 들을 것. 새벽 두 시.
공책 한 귀퉁이를 찢어 보낸 쪽지에는 그 말이 전부였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쪽지를 전해준 학생을 향해 누구에게로부터 쪽지가 전해졌는지 물으려 했지만 그 학생은 귀찮은 표정으로 책 속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칠판을 향하고 있었고 거북이 갑처럼 구부린 학생들의 등허리로 쪽지의 임자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난데없이 책상 위로 날아든 그 쪽지 때문에 남자는 10년 동안 93.5메가헤르츠로 주파수를 맞추고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깨어 있다. --- p.43

순식간에 밥상이 엎어진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밥그릇과 국그릇, 접시 들이 방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면서 김칫국물이 방 사방 곳곳으로 튄다. 육각형의 밥상이 데굴데굴 장롱 쪽으로 굴러간다. 방 안은 금방 온갖 음식물이 뒤섞여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아버지가 밥그릇을 발로 걷어찬다. 남자는 아버지를 벽 쪽으로 밀어 자신의 두 팔 안에 아버지를 가두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남자는 아버지를 피해 문가로 달아나면서 이틀을 소리나게 부딪친다.
이런 벼엉신.
아버지가 남자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고 마루로 나간다. 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와 방안에 흩어진 것들을 두 손으로 쓸어담는다. 어머니는 음식물 범벅이 된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친다. 이미 여러 군데 귀가 떨어진 흠집투성이인 포마이카 밥상에 또 다른 흠집이 생긴다. 남자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밥상을 노려본다.
이 밥상이 반으로 부서지기 전에 나는 이 집을 나갈 것이다. --- pp.50-51

남자는 밤새 끙끙 앓았다.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꾸는 똑같은 꿈이다. 남자는 누군가의 품속에 안겨 있다.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따뜻하다. 남자를 품에 안은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렸다. 멀리 커다란 십자가가 꽂힌 흰색의 둥근 돔형 지붕이 보인다. 저벅저벅 발짝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자, 이곳이 너의 집이야. 좀 보렴. 후끈한 입김이 얼굴에 다가온다. 사자 머리 모양의 청동상이 보인다. 남자가 울음을 터뜨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개가 짖으면서 달려온다. 아득히 높은 곳에 붉은 열매들이 달려 있다. --- p.102

남자는 아가씨 대신 자신이 저 집 안의 피아노 앞에 앉아 〈달빛〉을 연주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담장 위에 얹은 열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새벽 두시에 깨어 있을 때마다 남자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는 했다. 새벽 두시에 깨어 있는 사람만이 〈달빛〉을 칠 수 있다. 담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발만 올려놓으면 되었다. 담장을 뛰어넘어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거기 피아노 앞에 왕자옷을 입고 있는 거지를 향해 소리칠 것이다. 왕자는 바로 나다. --- p.128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사실은 달라지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은폐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기만하여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지만, 하성란의 주된 노력은 그 복잡함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문자로 빨려든 듯한 묘사문들이 그의 소설에서 그토록 우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복잡함을 존중하기 위한 노력의 첫 번째 결과일 것이다. 현상적 ‘표면’을 간과해서는 표면에서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표면에서 ‘이면’으로 돌려볼 수 없다. 표면으로부터 시작하여 뒤져보거나 뒤집어봄으로써 질문과 가정을 실험과 이해로 깊어지게 하는 작업은 하성란의 오랜 습관이며 그의 많은 소설들의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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