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본문

잡동사니
잡동사니
저자 : 에쿠니 가오리
출판사 : 소담출판사
출판년 : 2013
ISBN : 9788973815579

책소개


완벽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사랑도 없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의 증거, 잡동사니


해바라기처럼 남편만을 바라보며 사는 마흔다섯 살 슈코, 세 살 때 미국으로 떠나 갓 일본에 돌아온 미우미. 에쿠니 가오리의 최신 장편소설 『잡동사니』는 이 두 여자, 즉 40대 여성과 10대 소녀의 상반된 감성을 옴니버스로 이어진 본격 연애소설이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와의 정사, 남편의 여자 친구, 미성년자와의 관계 등, 사랑과 집착, 그리고 도덕성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에쿠니 가오리 식'의 격정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슈코는 남편에게 벗어나기 위해, 혹은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때때로 어머니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난다. 여느 때처럼 떠나온 푸껫의 해변에서 슈코는 바비 인형을 닮은 소녀를 만나고, 그 아이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 만남을 시작으로 두 여인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내리쬐는 햇살, 알싸하게 응축된 공기,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 등, 에쿠니 가오리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절제된 표현을 통해 모든 감정을 섬세하게 응축시킴으로써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관계를 도덕적 잣대에서 해방시킨다. 위험한 관계, 그 안에서 흐르는 미묘한 감정, 이 모든 것을 세련된 감성으로 통제한 에쿠니 가오리식 완벽한 연애소설을 이제 만나보자.

목차


“또 그 아이를 보고 있구나.”
토란 튀김을 포크로 찍으며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정색했던 것을 후회하며 덧붙였다.
“예쁘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자꾸 보게 돼. 왠지 눈길이 가고 마는걸.”
엄마는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말했다.
“바보 같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
엄마는 샴페인을 물처럼 꿀꺽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질투잖아, 그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질투? 하지만 아직 어린애인걸, 말도 안 돼.”
“바로 그거야. 아이와 어른의 중간, 네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밖에 가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생명력이 저 아이에게는 있으니까.”
나는 웃고 나서 단맛이 나는 푸성귀를 입에 넣었다. 이곳 요리는 하나같이 달아서 샴페인과 같이 흘려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아침 말을 타러 나갔다가 미미를 보았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 아이가 무척 어려 보였다는 것, 승마는 처음이어서 초보자용 말이 달린다고는 생각 못 하고 있더라는 것, 그리고 미미가 말을 타는 동안 내가 가방이며 선글라스며 엠디플레이어 등을 맡아주고 보호자처럼 서서 기다렸다는 것을. 실제로 나는 그 아이의 엄마라고 해도 충분할 나이다. --- pp.36-37

“슈코가 누구와 자든 난 슬퍼할 수 없어.”
나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어느 누구와도 자지 않았어.”
나는 양팔을 벌린 채 고함을 지르며 두 발로 부엌 바닥을 쿵쿵 굴렀다.
“알아.”
남편은 힘없이 인정했다. 그 무렵 우리 사이에는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 울거나 소리쳤고, 목소리도 마음도 메마르고 금이 가 있었다.
“당신이 외간 여자와 자면 나는 슬프단 말이야.”
어리석게도 나는 설명하려고 했다. 비참한 듯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째서?”
냉담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리 와.”
나는 녹색과 핑크색이 섞인 격자무늬 모헤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는 우유에 젖어 얼룩져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슬프고 말고 할 것 하나 없어.”
그래도 슬퍼. 나는 재차 말했고 끼이 끼이 하고 쥐와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와인을 꽤 많이 마신 데다 흥분해서 소리친 탓에 머리도 멍했다.
“어째서?”
남편도 참을성 있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냉장고를 열고 다시 우유를 꺼낸다.
“내가 옆에서 지켜봐줄 테니 마셔봐.”
지금이라면 나도 안다. 그 슬픔은 나만의 것이다. 나 혼자 맞서야 하는 것이며 남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 pp.56-57

나는 오늘 밤 그에게 키스하려고 작정한 터였다. 가까이 다가가 아주 살짝만 입술을 맞댈 것. 물론 입술이 닿기 무섭게 뗀다. 아주 작은 장난.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에헤헤 웃으면 된다. 초등학생 무렵, 남자아이들에게 많이 해보았다.
“왜 그래?”
‘다가가 아주 살짝만 입술을 맞댈 것’이란 게 도저히 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좋을까.”
내가 말했다. 엄마한테는 저녁 때 이미 전화했다. 와타루도 전화를 바꿔 이제부터 저녁을 먹으러 갈 거라고 보고해주었다.
“당연하지.”
와타루는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며 대답한다. 나는 와타루가 긴장을 풀었다는 것을 알았다. 위기가 지나가 안심했다는 것을.
“자기 전에 당연히 한 번 더 전화해야지.”
키스했다. 열린 차 문 너머로 재빨리. 안심한 와타루에게 분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그 순간, 저절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에헤헤.”
밤공기 속에서 꾸밈없는 목소리가 흘러넘치고, 나는 싱글벙글 웃고 말았다. --- p.150

남편을 알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애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그때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그래서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다섯 가지를 주고 남편에게서도 똑같은 것을 받았다. 고작 다섯 가지! 그것만으로 충분할, 고작 그 다섯 가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우리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몸을 섞고, 낮이고 밤이고 말을 섞고,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아 더한 속박을 바라고 소유를 바라고 질투와 말다툼을 바랐다. 서로를 모조리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존재를 바라고 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도 바랐다.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감미로움을 바라는 것과 거의 같은 크기로,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고통을 바랐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했다. 서로 모든 것을 주고, 받은 것 전부를 맛보기 위해.

Quick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