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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소란한 보통날
저자 : 에쿠니 가오리
출판사 : 소담출판사
출판년 : 2011
ISBN : 9788973816484

책소개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는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인가요?
언제라도 당신의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그 곳,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이유를 주는 가족의 이야기.


『냉정과 열정 사이』, 『반짝반짝 빛나는』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들려주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가족 이야기. 전작을 통해 사랑과 결혼, 관계 속에 존재하는 쓸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온 에쿠니 가오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 색다르고 유쾌한 가족 소설을 선보이며, 일상의 무미건조한 풍경들 속에 진주처럼 숨어 있는 등장인물 각자의 비 일상을 꺼내어 따뜻한 손길로 빚어낸다.

가족들의 얼굴이 다 보이지 않는다며 카운터 자리를 꺼려하는 아빠, 나이가 들어도 소녀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엄마, 아기를 가진 걸 알면서도 이혼한 큰딸, 다른 여자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싶다는 둘째 딸,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놀고 있는 셋째 딸, 학교에서 정학을 당한 막내아들. 이 책은 저마다의 개성 있는 캐릭터로 무장한 미야자카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들은 여타 가정이 그러하듯 그들 가족만의 규칙을 지키며 소박한 매일을 살아간다.

에쿠니 가오리는 셋째 딸 고토코의 시점으로 잔잔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인공 고토코 자신이 여태까지 선택해온 것, 발견해왔던 것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조그맣고 사소한 마음의 흔적들과 얘기하면서 가족들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이처럼 천천히 조용하게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는 드라마는 그들의 집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킬 만큼 밀도 있고 섬세하게 흘러간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밤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이 켜진 집을 보고 안도하는가 하면, 언니가 이혼을 하고 돌아왔음에도 그저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축하 파티를 연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런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행복, 돌아갈 수 있는 곳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에 대해 이야기하며, 존재만으로 충분한 가족들의 '소란한 보통날'을 그려낸다.

목차


비 오는 날은 쓸쓸하다.
왜인지는 모른다. 아니, 나는 그것이 진짜 쓸쓸함인지조차 잘 모른다.
처음 시작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수업 중이었다. 내 자리에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뚝 떨어져나간 듯한 느낌, 아랫도리가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한없이 허무한 느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싸했다’였다.
비 오는 날이면 찾아오는 그 망막하고 미묘한 감각은 마음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신체적인 무엇―두 허벅지에 힘을 꽉 주지 않을 수 없는―이어서 나는 더욱 불안했다. 그 증상은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아빠 의견은 이렇다. 소요 언니는 이미 ‘법적으로 쓰게 집안의 사람’이니 쓰게 집안사람이 미야자카의 집에서 자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에게는 언제나 사리에 맞고 맞지 않고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법적으로 미야자카 집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러고 싶을 때 서슴없이 돌아오면 된다’는 얘기가 된다.
엄마 의견은 다르다. 엄마는 ‘마음이 있는 곳’이 중요하단다. 소요 언니의 마음이 쓰게 씨에게 있는 이상 ‘365일 언제나 그곳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단다.
“그러니까 만의 하나.”
언젠가 엄마는 소요 언니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만의 하나 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 때는 거리끼지 말고 그 사람 품으로 가거라.”

“태풍 캠프 같네.”
나는 사탕을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태풍 캠프는 우리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다. 태풍―또는 큰 비가 쏟아지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지진이 나거나 정전이 되었을 때―이 왔을 때, 모두들 책상 밑에 비집고 들어가 캠프(흉내)를 하는 것이다. 라디오를 듣고 봉지에 든 과자를 먹고, 손전등 불빛에 책을 읽는다. 우리는 그런 평소와는 다른 사건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독서 놀이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독서 놀이란, 간단히 말하면 그저 책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놀이’를 좋아하니까, 대부분의 일을 ‘놀이’라 여기기로 한다. 그러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각자 책을 읽는 경우에도 처음부터 “독서 놀이하자.”하고 읽기 시작하면 다 같이 노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그 순간이었다.
리쓰가 후카마치 나오토 몫의 그레이프 젤리를 보자마자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는 집게손가락으로 투명한 포도색 젤리를 콕콕 찔렀다. 누구보다 리쓰 자신이 가장 놀랐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을 만큼 크고 시원스럽고 옛날식으로 단단하고 탄력 있어 보이는 젤리였다.
“……리쓰?”
나는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족 아닌 사람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리쓰를 처음 본다.
“맛있겠는데.”
속으로는 놀랐을 후카마치 나오토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스푼을 들었다.
나와 리쓰는 침묵했다. 매너나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비밀을 엿보인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 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나만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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