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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장편소설)
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장편소설)
저자 : 더글라스 케네디
출판사 : 밝은세상
출판년 : 2012
ISBN : 9788984371132

책소개


『빅 픽처』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로맨틱 스릴러. 책은 에단 호크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2011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세계적인 배우들이 주연으로 캐스팅돼 많은 관심과 화제를 뿌렸다.

『파리 5구의 여인』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작품들처럼 스릴러와 로맨스적 요소를 가미했을 뿐더러 특별히 판타지적인 요소를 더한 게 특징이다. 이런 판타지적 요소에 대해 ‘비현실적 이야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의 기본은 어차피 ‘판타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을 상상하고 받아들일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프랑스 인이 아닌 파리의 이민자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에 살지만 실제로 현지인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이민자들의 시선으로 파리를 그려보고자 했다’라고 했다.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지역은 파리5구와 파리10구의 파라디스 가이다. 파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파라디스 가는 터키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자못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법체계를 배제한 사적 복수는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목차


장을 보는 날에는 12시 30분에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 다음에는 노트북을 열고, 부팅이 되는 동안 커피를 끓인다. 하루에 ‘5백 단어씩 써야 한다’고 내 자신을 채근한다. 5백 단어. 백지로 두 장. 다시 말하자면 내가 매일 쓰겠다고 정해놓은 소설의 분량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한다. 날마다 두 장씩 쓰면 일주일에 열두 장이 나오는 셈이다. 꾸준히 계속 쓰면 열두 달 안에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다. 아, 석 달 동안 버틸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 몫의 원고 분량을 꼬박 채우는 것에만 신경 썼다. 5백 단어. 메일을 쓸 때에는 20분도 걸리지 않을 양이지만 소설은 달랐다.---p.67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죠?”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발코니 저쪽 끝에서 들려온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여자는 어둠 속에 가려져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담배 불빛만이 어둠을 뚫고 선명하게 보였다.
“내 생각을 모르시잖아요?”
“그래요. 그냥 넘겨짚어 봤어요. 저녁 내내 불편해 보이던데요. 살롱이 맘에 안 들죠?”
“저녁 내내 나를 지켜봤어요?”
“그냥 가끔씩 보았을 뿐이에요. 여자를 꼬드기려 애쓰다가 실패해 발코니로 나와 심호흡을 하며…….”
“뛰어난 심리분석이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여자가 말했다.
“조금 놀렸다고 쌀쌀맞게 돌아서는 거예요? 늘 그래요?”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여자의 모습은 여전히 윤곽만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놀리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주 심각하게 반응하네요.”
“이런 장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장난? 누가 지금 장난을 친다는 거죠?”
“당신이.”
“사실 난 그쪽을 꼬드기는 중인데…….”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남자를 꼬드깁니까?”---pp.126~127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사흘이었다. 이전처럼 오후 2시에 일어나 인터넷카페에 급여봉투를 받으러 갔다. 시네마테크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값싼 저녁을 사 먹고,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사무실에 나가 글을 썼다. 새벽이 되어 크루아상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마지트 생각을 했다. 마지트와 함께 보낸 그날 오후의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 순간순간이 빠짐없이 다 떠올랐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무한반복으로 상영되는 영화 같았다. 마지트의 살 냄새가 코에서 계속 맴돌았다. 내 몸에 닿았던 손톱의 느낌도 선연했다. 더 깊이 나를 받아들이려고 다리를 들어 올리던 마지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섹스가 끝나고 나서 나누었던 교감도.
수잔은 나와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몇 달 동안이나 나를 멀리 했다. 문제가 뭔지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말했지만 그저 ‘기계적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잔은 그때 이미 가드너 롭슨 학장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pp.155~156

“누가 죽였을지 혹시 짚이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서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습니다.”
형사는 들고 있던 내 여권으로 자기 손을 탁탁 치면서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자기 주머니에 내 여권을 집어넣었다.
“목격자 진술을 다시 해줘야 합니다. 오늘 오후 두 시에 파리10구 경찰서로 출두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여권은 안 돌려주십니까?”
“오늘 오후까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형사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오마르와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다고 잡아뗀 건 그다지 잘한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더 많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경찰은 내가 밤에 무슨 일을 하는지 캐물을 테고…….
오마르는 필시 빚을 지고 돈을 안 갚았거나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을 것이다. 원한에 의한 동기가 아니라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경찰은 이 건물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의심할 것이다.
오마르는 원한을 산 사람이 많으니까 어디서든 용의자가 나타나겠지.---pp.244~245

여기서 일하는 이민자들 중에는 취업 비자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선생이 불법취업자라 해도 저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맡은 건 살인사건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오마르가 죽던 날 밤에 선생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네, 네. 진 켈리처럼 파리 거리를 쏘다니셨겠죠. 제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선생은 뭔가 숨기고 있어요. 선생, 이제 솔직히 말해주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왜 내가 경비 일을 숨겼을까? 그곳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에 나도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말한들 오마르를 살해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날 밤에 일하고 있었다는 걸 증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저는 숨기는 게 없어요.”
쿠타르 형사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가 두 손가락을 책상에 굴리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형사는 의자를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통화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여권은 당분간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파리를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떠날 생각도 없어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pp.257~258

“어젯밤에 어디 있었죠?”
“그건 왜 물으시죠?”
“선생이 이 야구배트로 네딤 아타니 씨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네딤 아타니가 공격을 당해요?”
“네딤 아타니 씨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생명이 위독합니다.”
“세상에…….”
“선생 짓이 분명한데 뭘 그리 놀라는 시늉을 하죠?”
“난 절대로 그러지 않았…….”
“선생에게는 네딤 아타니 씨를 살해할 만한 구체적 동기가 있어요. 그의 부인과의 관계 때문에 협박받고 있었으니까요.”
“아니, 그 말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게다가 머리를 으깬 흉기도 찾아냈고.”
“머리가 으깨졌단 말입니까?”
“네딤 아타니 씨는 지금 두개골, 얼굴, 양쪽 무릎이 으깨진 채 뇌사상태로 누워 있어요. 의사 말로는 깨어나기 힘들다더군요. 범죄에 사용된 흉기는 무겁고 둥근 물건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야구배트와 일치하죠.”
“맹세하지만 난 절대로…….”
“어젯밤에 어디 있었습니까?”
“야구배트는 오마르가 죽고 나서 나 자신을 방어하려고 구입했어요.” ---pp.281~282

쿠타르가 서류철에서 사진을 꺼내 책상 너머로 내밀었다. 현장 사진이었다. 흑백사진이지만 끔찍했다. 피투성이로 침대에 쓰러진 뒤프레는 가슴 부위가 군데군데 칼로 헤집어져 있었고, 얼굴과 머리 부분도 끔찍하게 난자당해 있었다.
나는 숨을 꾹 누르고 사진을 다시 쿠타르 형사에게 건넸다.
“이 정도로 잔혹한 살인은 흔히 원한관계 때문에 발생하죠. 이 경우 범인은 희생자를 죽이고 나서도 계속 공격을 가합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두 가지 특이한 면이 있었다고 기록했어요.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살인이라는 것, 그리고 경찰과 대중에게 자기 범행을 밝힐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죠. 경찰은 곧장 카다르 부인의 통화기록을 확인했어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카다르 부인이 뒤프레의 집으로 전화했죠. 아마도 범인은 뒤프레의 부인을 찾으면서 뒤프레가 집에 있는 걸 확인했을 겁니다.
범행은 토요일 새벽 네 시에 벌어졌습니다. 카다르 부인은 사전 답사 차원에서 전날에도 그 집을 찾아왔던 것으로 밝혀졌어요. 범행을 마치고 나가는 카다르 부인을 목격한 이웃은 전날 카다르 부인이 그 집 주변을 두루 살피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죠. 카다르 부인은 다음날 그 집으로 가서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안으로 잠입했습니다. 뒤프레가 자다가 공격을 받았는지 깨어 있을 때 공격을 받았는지는 경찰 수사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검시 결과 잔혹한 공격이 가해질 당시 뒤프레의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카다르 부인은 뒤프레가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숨통을 끊지 않은 것이죠.
카다르 부인은 뒤프레를 죽이고 나서 욕실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피 묻은 옷가지는 욕실 바닥에, 칼은 침대에 두었죠. 카다르 부인은 범행 이후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범행을 마친 부인은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책소개


『빅 픽처』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로맨틱 스릴러. 책은 에단 호크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2011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세계적인 배우들이 주연으로 캐스팅돼 많은 관심과 화제를 뿌렸다.

『파리 5구의 여인』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작품들처럼 스릴러와 로맨스적 요소를 가미했을 뿐더러 특별히 판타지적인 요소를 더한 게 특징이다. 이런 판타지적 요소에 대해 ‘비현실적 이야기’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의 기본은 어차피 ‘판타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을 상상하고 받아들일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프랑스 인이 아닌 파리의 이민자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에 살지만 실제로 현지인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이민자들의 시선으로 파리를 그려보고자 했다’라고 했다.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지역은 파리5구와 파리10구의 파라디스 가이다. 파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파라디스 가는 터키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자못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법체계를 배제한 사적 복수는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목차


장을 보는 날에는 12시 30분에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 다음에는 노트북을 열고, 부팅이 되는 동안 커피를 끓인다. 하루에 ‘5백 단어씩 써야 한다’고 내 자신을 채근한다. 5백 단어. 백지로 두 장. 다시 말하자면 내가 매일 쓰겠다고 정해놓은 소설의 분량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한다. 날마다 두 장씩 쓰면 일주일에 열두 장이 나오는 셈이다. 꾸준히 계속 쓰면 열두 달 안에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다. 아, 석 달 동안 버틸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 몫의 원고 분량을 꼬박 채우는 것에만 신경 썼다. 5백 단어. 메일을 쓸 때에는 20분도 걸리지 않을 양이지만 소설은 달랐다.---p.67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죠?”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발코니 저쪽 끝에서 들려온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여자는 어둠 속에 가려져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담배 불빛만이 어둠을 뚫고 선명하게 보였다.
“내 생각을 모르시잖아요?”
“그래요. 그냥 넘겨짚어 봤어요. 저녁 내내 불편해 보이던데요. 살롱이 맘에 안 들죠?”
“저녁 내내 나를 지켜봤어요?”
“그냥 가끔씩 보았을 뿐이에요. 여자를 꼬드기려 애쓰다가 실패해 발코니로 나와 심호흡을 하며…….”
“뛰어난 심리분석이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여자가 말했다.
“조금 놀렸다고 쌀쌀맞게 돌아서는 거예요? 늘 그래요?”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여자의 모습은 여전히 윤곽만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놀리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주 심각하게 반응하네요.”
“이런 장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장난? 누가 지금 장난을 친다는 거죠?”
“당신이.”
“사실 난 그쪽을 꼬드기는 중인데…….”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남자를 꼬드깁니까?”---pp.126~127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사흘이었다. 이전처럼 오후 2시에 일어나 인터넷카페에 급여봉투를 받으러 갔다. 시네마테크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값싼 저녁을 사 먹고,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사무실에 나가 글을 썼다. 새벽이 되어 크루아상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마지트 생각을 했다. 마지트와 함께 보낸 그날 오후의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 순간순간이 빠짐없이 다 떠올랐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무한반복으로 상영되는 영화 같았다. 마지트의 살 냄새가 코에서 계속 맴돌았다. 내 몸에 닿았던 손톱의 느낌도 선연했다. 더 깊이 나를 받아들이려고 다리를 들어 올리던 마지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섹스가 끝나고 나서 나누었던 교감도.
수잔은 나와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몇 달 동안이나 나를 멀리 했다. 문제가 뭔지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말했지만 그저 ‘기계적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잔은 그때 이미 가드너 롭슨 학장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pp.155~156

“누가 죽였을지 혹시 짚이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서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습니다.”
형사는 들고 있던 내 여권으로 자기 손을 탁탁 치면서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자기 주머니에 내 여권을 집어넣었다.
“목격자 진술을 다시 해줘야 합니다. 오늘 오후 두 시에 파리10구 경찰서로 출두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여권은 안 돌려주십니까?”
“오늘 오후까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형사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오마르와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다고 잡아뗀 건 그다지 잘한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더 많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경찰은 내가 밤에 무슨 일을 하는지 캐물을 테고…….
오마르는 필시 빚을 지고 돈을 안 갚았거나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을 것이다. 원한에 의한 동기가 아니라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경찰은 이 건물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의심할 것이다.
오마르는 원한을 산 사람이 많으니까 어디서든 용의자가 나타나겠지.---pp.244~245

여기서 일하는 이민자들 중에는 취업 비자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선생이 불법취업자라 해도 저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맡은 건 살인사건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오마르가 죽던 날 밤에 선생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네, 네. 진 켈리처럼 파리 거리를 쏘다니셨겠죠. 제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선생은 뭔가 숨기고 있어요. 선생, 이제 솔직히 말해주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왜 내가 경비 일을 숨겼을까? 그곳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에 나도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말한들 오마르를 살해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날 밤에 일하고 있었다는 걸 증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저는 숨기는 게 없어요.”
쿠타르 형사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가 두 손가락을 책상에 굴리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형사는 의자를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통화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여권은 당분간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파리를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떠날 생각도 없어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pp.257~258

“어젯밤에 어디 있었죠?”
“그건 왜 물으시죠?”
“선생이 이 야구배트로 네딤 아타니 씨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네딤 아타니가 공격을 당해요?”
“네딤 아타니 씨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생명이 위독합니다.”
“세상에…….”
“선생 짓이 분명한데 뭘 그리 놀라는 시늉을 하죠?”
“난 절대로 그러지 않았…….”
“선생에게는 네딤 아타니 씨를 살해할 만한 구체적 동기가 있어요. 그의 부인과의 관계 때문에 협박받고 있었으니까요.”
“아니, 그 말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게다가 머리를 으깬 흉기도 찾아냈고.”
“머리가 으깨졌단 말입니까?”
“네딤 아타니 씨는 지금 두개골, 얼굴, 양쪽 무릎이 으깨진 채 뇌사상태로 누워 있어요. 의사 말로는 깨어나기 힘들다더군요. 범죄에 사용된 흉기는 무겁고 둥근 물건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야구배트와 일치하죠.”
“맹세하지만 난 절대로…….”
“어젯밤에 어디 있었습니까?”
“야구배트는 오마르가 죽고 나서 나 자신을 방어하려고 구입했어요.” ---pp.281~282

쿠타르가 서류철에서 사진을 꺼내 책상 너머로 내밀었다. 현장 사진이었다. 흑백사진이지만 끔찍했다. 피투성이로 침대에 쓰러진 뒤프레는 가슴 부위가 군데군데 칼로 헤집어져 있었고, 얼굴과 머리 부분도 끔찍하게 난자당해 있었다.
나는 숨을 꾹 누르고 사진을 다시 쿠타르 형사에게 건넸다.
“이 정도로 잔혹한 살인은 흔히 원한관계 때문에 발생하죠. 이 경우 범인은 희생자를 죽이고 나서도 계속 공격을 가합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두 가지 특이한 면이 있었다고 기록했어요.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살인이라는 것, 그리고 경찰과 대중에게 자기 범행을 밝힐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죠. 경찰은 곧장 카다르 부인의 통화기록을 확인했어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카다르 부인이 뒤프레의 집으로 전화했죠. 아마도 범인은 뒤프레의 부인을 찾으면서 뒤프레가 집에 있는 걸 확인했을 겁니다.
범행은 토요일 새벽 네 시에 벌어졌습니다. 카다르 부인은 사전 답사 차원에서 전날에도 그 집을 찾아왔던 것으로 밝혀졌어요. 범행을 마치고 나가는 카다르 부인을 목격한 이웃은 전날 카다르 부인이 그 집 주변을 두루 살피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죠. 카다르 부인은 다음날 그 집으로 가서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안으로 잠입했습니다. 뒤프레가 자다가 공격을 받았는지 깨어 있을 때 공격을 받았는지는 경찰 수사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검시 결과 잔혹한 공격이 가해질 당시 뒤프레의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카다르 부인은 뒤프레가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숨통을 끊지 않은 것이죠.
카다르 부인은 뒤프레를 죽이고 나서 욕실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피 묻은 옷가지는 욕실 바닥에, 칼은 침대에 두었죠. 카다르 부인은 범행 이후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범행을 마친 부인은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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