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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
저자 : 권순홍
출판사 : 길
출판년 : 2008
ISBN : 9788987671994

책소개

하이데거의 사유와 유식 불교 사이에서 공통 분모를 찾다!

하이데거는 존재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현존재의 실존에 대한 분석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유식불교는 실체적인 자아와 실체적인 법에 대한 집착으로 생사의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점에서 그 출발점을 찾으며, 귀착점 또한 괴로움에서의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는 해석의 과잉과 오독을 피하기 위해 서로 다른 철학과 종교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작업을 한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과 존재시성의 분석론으로 나뉘어 있는 기초존재론의 구성에 준해서 두 개의 마당에서 대화를 전개한다. ‘해석학적 거울’을 통한 분석으로 둘 사이를 좀 더 명확하게 알아본다. [양장본]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유식불교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 사이에서 - 해석의 과잉과 오독을 피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미를 발굴하기 위해서 현존재의 실존에 대한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실존을 선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해를 발굴하는 한편, 다시 존재이해에 대한 분석에서 이것을 역시 선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미가 바로 근원적 시간(ursprungliche Zeit)임을 밝힌다. 그는 현존재의 실존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존재의미를 찾아나가는 이 도정 전체를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식불교는 종교인 한에서 그 출발점과 귀착점이 하이데거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실체적인 자아와 실체적인 법에 대한 집착으로 생사의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고자 하는 종교적인 서원이 그 출발점이라면,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을 떠난 열반의 종교적인 구경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데에 그 귀착점이 있다.

이렇게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유식불교가 제각기 출발점과 귀착점부터 서로 다른 철학과 종교인만큼 둘 사이에 대화의 가교를 놓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김형효, 청계, 2000)에서처럼, 그 둘이 관련된 여러 개념들이나 개념들의 체계에서 곧이곧대로 일치하는 양 속편하게 둘 사이의 대화를 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인 양 대화를 꾀하면, 어느 한 편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krustesbett)로 삼아서 다른 한편을 예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나친 해석을 피할 수가 없다. 예컨대 실존의 본래성을 열반이나 진여(眞如)로까지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열반이나 진여가 생멸을 떠난 무위법(無爲法)인 한편 본래적인 실존이 매 순간마다 차이화의 운동을 수행하는 한에서, 본래성에 대한 유식불교적인 오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존재가 그의 존재에서 무력(無力)하다는 것을 시사할 뿐인 현존재의 책임 현상을 업(業)으로 간주하거나 도구들 사이에 일직선적으로 설정된 수단성의 지시 맥락을 연기법의 상호관계로 풀이하는 것도 역시 하이데거에 대한 유식불교적인 오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이러한 해석의 과잉이나 하이데거에 대한 유식불교적인 오독을 피하기 위해서 일단 둘이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먼저 밝히는데, '마음'이 그것이다. 유식불교는 마음의 작용 이전부터 이 마음 바깥에서 대상이 따로 실유(實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종지를 가르친다. 오히려 심법(心法)이든지 색법(色法)이든지 간에 온갖 법은 마음의 능변(能變)작용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것은 세계가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 바깥에서 그 자체의 질서를 갖춘 채 독립해 있다고 보는 실재론(實在論)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실재론적인 견해임이 분명하다. 실재론에서 그렇게 주장하듯이, 마음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면서 세계의 자체적인 질서를 좇아가는 것은 아니다. 유식불교의 반실재론에서 볼 때, 인간과 세계를 비롯해서 무상한 온갖 만법은 마음의 인(因)능변작용과 과(果)능변작용에서 나온다.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능변작용을 담당하는 마음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요컨대 둘이 반실재론적인 선율에서 서로 협화음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는 근원적 시간에서 어떻게 현-존재와 세계의 열린 공간이 생기하는지를 밝힌다. 근원적 시간의 시간화(時間化, Zeitigung) 운동과 함께 시간의 지평이 열릴 때에나 거기에서 모든 존재자가 환히 현상하고 현상하는 만큼 그렇게 존재하는 까닭에, 존재자가 이 지평을 떠나서 미리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으로 존재하든지 간에 존재자의 이러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현-존재와 세계의 열린 공간이라면, 이와 같은 열린 공간을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원적 시간이다. 이렇게 근원적 시간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시간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처럼 마음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상대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해석학적 거울'로 분석할 때, 둘 사이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어

하이데거의 근원적 시간과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이 반실재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접점에서 서로 만나고는 있지만, 만남은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근원적 시간은 시간화의 운동을 펼치되 시간화의 운동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뢰야식도 능변의 작용을 수행하되 이러한 작용을 시종일관 이끌어나가는 실체적인 형상(形相, eidos)이나 본질(essentia)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실체적인 자성(自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 시간과 시간화의 운동을 별개의 것인 양 따로 나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서처럼 이 시간을 형상이나 실체로, 시간화의 운동을 그 작용이나 속성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 시간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특정한 방식으로 시간화의 운동을 하도록 규정하는 형상이나 본질은 없다. 실체적인 형상이나 본질이 없기에, 근원적 시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시간화의 운동을 펼치는지를 손수 현상학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근원적 시간이 시간화의 운동이고, 시간화의 운동이 근원적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뢰야식도 마찬가지이다. 아뢰야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능변작용을 전개하도록 규정하는 실체적인 자성이 없다. 그렇기에 아뢰야식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그 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지관법(止觀法)으로 손수 관찰해야 한다. 역시 아뢰야식이 능변작용이고 능변작용이 아뢰야식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비유하자면, 그 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 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본질과 같은 실체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본질주의의 맥락에서 역시 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책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과 존재시성(存在時性, Temporalitat)의 분석론으로 나뉘어 있는 기초존재론의 구성에 준해서 두 개의 마당에서 대화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이 책은 반실재론과 반본질주의의 맥락에서 근원적 시간과 아뢰야식이 우주 만법의 근본을 이루는 마음답게 제각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부분(제2장, 제3장)과 현존재의 실존과 삼성설(三性說)이 어떻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부분(제4장, 제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두 개의 마당에서 전개되는 대화가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한다면, 이 대화를 조율하고 있는 반실재론과 반본질주의의 선율을 소개하는 제1장은 이 책의 서론에 해당한다. 또한 삼법인의 틀에서 이 두 가지 대화를 평가하는 제6장은 결론에 해당한다). 다만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유식불교가 각각 철학과 종교인 한에서 출발점과 귀착점부터 서로 다르기에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서와는 달리 대화의 길목에서 그때마다 둘 사이의 동이점(同異點)을 적극적으로 들추어내고자 하였다. 그 둘이 관련된 여러 개념들이나 개념들의 체계에서 곧이곧대로 일치한다면, 대화의 가교를 마련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다를 뿐이라면, 역시 가교를 마련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둘 사이의 동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대화를 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동이점의 맥락에 충실하게 제2장에서는 되도록 둘 사이의 같은 점을 드러내는 한편 제3장에서는 다른 점을 들추어내고자 하였다.

끝으로 이 책의 제목을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라고 한 까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디 해석학적인 거울이 해석되어야 할 것을 더욱더 명료하게, 더욱더 환하게 밝히는 구실을 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가령 하이데거의 근원적 시간과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을 각각 따로 분석할 때보다, 이 둘을, 상대방을 밝게 들여다볼 수 있는 해석학적인 거울로 삼아서 함께 분석할 때 둘을 제각기 더욱더 명료하게 밝힐 수 있다는 말이다. 아뢰야식의 작용에 대한 분석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근원적 시간을 따로 분석할 때보다 아뢰야식을 거울로 삼아서 분석함으로써 이 시간의 구조, 시간화 운동의 양태들을 더욱더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이 시간의 시간화 운동을 시작과 끝의 동시성을 뜻하는 순간의 사건으로 풀이하면서 순간적 자기완결성으로 정리한 것은 종자-현행-훈습-변양의 찰나적 동시성에서 작용하는 아뢰야식을 거울로 삼은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더러 실존의 비본래성을 따로 분석할 때보다 구생기이집(俱生起二執)과 변계소집성이라는 해석학적인 거울에 비추어서 분석함으로써 이 비본래성의 비의를 현존재의 실체화라는 점에서 더욱더 환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또한 비본래성을 해석학적인 거울로 삼아서 변계소집성을 분석함으로써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변계소집성의 숨겨진 특징을 부폐성(Verdecktheit)과 위장성(Verstelltheit)이라는 점에서 역시 더욱더 환하게 밝힐 수 있었다. 특히 "존재와 시간" 등 하이데거의 어떠한 저서에서도 밝게 드러나 있지 않던 시간의 각시성과 현존재의 자기부단성(自己不斷性, Selbstandigkeit)의 비의를 아뢰야식의 상속과 전전의 작용양태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상호교직에서 일어나는 차이화의 사건으로 해명함으로써 환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 식을 해석학적인 거울로 삼은 덕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머리말 7

제1장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유식불교 13
1. 대화에서 유의해야 할 점 18
2. 대화를 감도는 선율들 31

첫 번째 마당 : 근원적 시간과 아뢰야식
제2장 근원적 시간의 '어떻게'와 아뢰야식의 '어떻게' 67
1. 본질 없는 근원적 시간과 자성 없는 아뢰야식 68
2. 우주 만법의 근본으로 본 근원적 시간과 아뢰야식 78
3. 근원적 시간의 자기변양과 아뢰야식의 능변 작용 108
4. 근원적 시간의 순간성과 아뢰야식의 찰나멸 123
5. 근원적 시간의 각시성과 아뢰야식의 상속 133

제3장 아뢰야식의 연기설과 근원적 시간의 탈근거적 힘 149
1. 연기법의 몇 가지 특징들 150
2. 아뢰야식의 인연과 근원적 시간의 선천성 158
3. 아뢰야식의 소연연과 존재자의 중복성 175
4. 아뢰야식의 증상연과 현-존재의 선천적 가능성으로 본 근원적 시간 190
5. 아뢰야식의 등무간연과 근원적 시간의 각시성 213
6. 연기의 평등과 존재자 전체 너머로 비상하는 근원적 시간 223

두 번째 마당 : 현존재의 실존성과 삼성설
제4장 실존의 비본래성과 변계소집성 237
1. 삼성설의 얼개와 그 특징 239
2. 구생기 법집과 구생기 아집 247
3. 변계소집성과 아법의 실체화 254
4. 실존의 비본래성과 현존재의 실체화 261
5. 중생의 아집과 비본래적 현존재의 아집 281

제5장 실존의 본래성과 의타기성 293
1. 만법의 실상으로 본 의타기성과 실존의 근원으로 본 본래성 294
2. 현존재의 양심 현상과 보살의 청정한 지혜 301
3. 의타기성과 식의 상속 318
4. 실존의 본래성과 현존재의 자기부단성 338
5. 시간의 개별성과 현존재의 무아 361

제6장 차이와 열반 379

참고문헌 417
찾아보기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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