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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시절
저자 : 김태수
출판사 : 황소자리
출판년 : 2009
ISBN : 9788991508583

책소개


20년 가까이 일한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마음속 낙원을 향해 떠난 남자. 그가 들려주는 느리고, 화사하고, 아름다운, 행복의 이야기다. 고흐와 세잔, 마티스와 모네 등 수많은 화가들의 예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프로방스는 그에게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꿈이자 목표였다. 결국 혼자 프로방스로 떠난 그는 한 시골마을에 머무르며 후회 없는 나날을 보내고 돌아오는데,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는 그곳, 프로방스에서 보낸 100일의 기록들은 그 무엇보다 빛나는 추억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며 담아온 추억들에서는 여유가 묻어나고 언어나 생활 습관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 상황을 적절하게 풀어가는 저자의 재치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저자의 '머무는 여행길'을 함께 걷는 내내 그 속에 가득 담긴 애정을 엿볼 수 있으며,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책 속의 사진들은 프로방스라는 낙원에 대한 또 다른 로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목차


그러나 버스가 지중해변을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스테로이드 주사라도 맞은 운동선수처럼 원기가 왕성해졌다. 하얀 요트가 즐비한 해변, 예쁜 인테리어 카페, 야자수가 큰 키를 뽐내는 도로, 명품 가게가 줄줄이 늘어선 상가,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 바다 쪽으로 베란다를 낸 콘도형 집, 깎아지른 절벽 위 별장, 세월의 흔적이 쌓여 있는 유적,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던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 그 많은 것들을 짧은 시간에 다 보느라 눈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 pp.16-17 「내가 프로방스로 간 까닭은?」 중에서

골목 사이로 비쳐드는 햇볕을 받으면서 내 손바닥은 비포장 산길을 달리는 지프처럼 그 울퉁불퉁한 황토벽 위를 달렸다. 그러다 손이 아프면 남의 집 문간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한없이 자유로웠다. 이런 느낌이 그리워 길을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는 공간에서 구름처럼 떠돌고 싶어서. 누구나 똑같은 걸까?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일찍이 말했다. ‘오로지 고독 속에서만 사람은 참된 자유를 안다.’ --- pp.49-50, 「골목길 접어들 때에…」 중에서

그때 육박전처럼 허겁지겁 치른 내 결혼식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내 아들 딸은 어떤 결혼식을 하게 될까 궁금해졌다. ‘그때쯤이면 나는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씁쓸해졌다. 아들 딸이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이라도 직장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이 땅의 숭고한 겁쟁이 아빠들을 꽤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자식 결혼식만 끝나면 직장을 잃어도 괜찮다는 사람치고 진짜 괜찮을 사람이 있을까마는 자기 인생과 자존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명예 아니, 기를 살리려는 가엾은 부정父情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들에게 겁쟁이란 계급장을 호기롭게 붙이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 내 미래이기도 했다. --- p.64, 「성당은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중에서

30~40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그놈의 물욕에 휘둘려 내 손가락에는 올리브 절임, 청포도, 케이크 조각, 포마주, 소시지를 각각 담은 하얀 비닐봉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토끼 사냥이라도 다녀온 모습이었다. 여기다 해바라기까지 한 다발 들면 영락없는 프로방스 주부의 모습일 텐데,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한 번 해볼까도 생각했다. 여기는 프로방스니까. --- p.73, 「프로방스 시장은 동네 사랑방」 중에서

나는 보졸레 누보 출시 당일인 11월 셋째 주 목요일 칸에 있었다. 아무 일 없이 이렇게 이날이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아 해변 근처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러나 메뉴 어디에서도 보졸레 누보를 알리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갸르송을 불러 “오늘 보졸레 누보 날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맞다.”고 대답했다. 그뿐이었다. 마실 거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냐? 한국에선 이날을 얼마나 대단하게 대접하는지 알기나 해?`’ --- p.128, 「내 마음은 와인에 젖고」 중에서

나는 카페만 들어서면 ‘멍 때리기’ 작업에 열중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선글라스를 깊이 당겨쓰고 최대한 거만한 느낌이 나도록 엉덩이를 빼 걸터앉았다. 마침표를 찍듯 팔짱도 끼었다. 그렇게 손을 결박하지 않으면 몇 분 못 가 책이나 지도를 꺼내들고 펜으로 뭔가를 끄적이기 십상이다. 진짜로 10분이 채 못 돼 팔짱은 저절로 풀어졌다. 자유로워진 두 손이 좀전에 찍은 사진을 정리하려고 카메라를 꺼내거나 다음 행선지 정보를 보겠다고 가방을 뒤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멍 때리기’는 그만큼 힘든 프로젝트다. --- p.138, 「프로젝트 넘버 원 ‘뭉개기’」 중에서

요트의 돛대가 빼곡하게 서 있는 마르세유의 부두, 맨발을 모래에 묻을 수 있는 칸 비치, 코앞까지 파도가 튀는 망통의 해안도로, 최고급 요트가 정박해 있는 생트로페 해변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펼쳐져 있었다. 그 카페에서 3~4유로짜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툭 트인 지중해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슬픈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꿈일 뿐이라고”로 시작하는 롱펠로의 시 「인생예찬」 중에서을 읊조리게 된다.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시간이 맞아떨어져 핏빛 저녁 하늘을 볼 때도 있었다. 너무나도 행복한 나머지 미쳐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순간의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꼭 아내 생각이 간절해졌다. 커피 한 잔 시켜주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할 텐데……. --- p.146, 「카페에 앉아 생을 찬미하노라」 중에서

프로방스에서 내 감각 중 가장 호강한 것은 시각이다. 화려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고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실컷 봤다. 눈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보고 싶었다. 그런 것들을 나처럼 잠깐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는 프로방스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움, 그게 뭐 별 건가요?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곁에 있는 거 아니에요?” --- p.164, 「색과 빛에 무릎꿇을지어다」 중에서

언덕 꼭대기의 교회가 왕관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이 도시에서 화장실 찾느라 생고생을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카페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길바닥 개똥만큼이나 흔한 카페도 그날 따라 영업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시 외곽 지역으로 나가다가 대형 슈퍼마켓을 발견하고는 뛰어들어갔으나 거기서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가지 전투를 하는 병사처럼 지형지물을 둘러보다가 인적이 드문 근처 카센터에다 한국적 벽화를 그려주고 말았다. --- pp.167-168, 「생물학 모르면 프랑스는 지옥」 중에서

일방통행이 어찌나 많은지 그 똑똑한 내비게이션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걔가 시키는 대로 달리다 낭패를 본 일이 적잖았다. 그 결정판은 프로방스 보클뤼즈 지방의 작은 마을 보뉘유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이 마을 초입에서 나는 호기롭게 2차선이 채 못 되는 일방통행로를 200미터나 올라갔다. 길 가던 마을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묘한 제스처를 지어보였다. 고개를 잠깐 갸우뚱하는 사람, 양팔을 몸에 붙인 채 두 손바닥을 하늘로 돌리는 사람, 어깨를 귀까지 올리며 표정을 구기는 사람. 외진 곳까지 찾아온 동양인에게 보여주는 환영의 표시치곤 어딘가 거칠고 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86-187, 「죄송하지만, 일방통행인데요!」 중에서

나는 용맹스럽게도 트렁크만 걸친 채 어느새 칸 앞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마침 커피를 주문해 마셨던 모래사장 카페 옆에 샤워 시설 있겠다, 해안도로 옆에 주차해놓은 차에 세면도구 있겠다, 기온도 20도 가까이 되겠다, 내 뱃살을 발설할 놈도 없겠다, 여러 조건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몸서리를 치며 쳐들어간 바닷물 온도는 참을 만했다. 파도도 그리 세지 않았다. 하지만 치명적이게도 트렁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 팔을 젓지도 않았는데 트렁크가 훌러덩 벗겨졌다. 볼일 보려고 내릴 때보다 더 쉽게 흘러내렸다. --- p.226, 「지중해에 한번 빠져보시겄습니까」 중에서
어느날부턴가 집 안에서 내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고 그게 곧 프로방스로 날아갈 조짐이었다는 걸 눈치챈 내 딸은 제 앞가림도 버거울 고3 주제에 나에게 말했다.
“우리한테 말한 것처럼 아빠도 아빠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아빠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에 담긴 그 복잡하고도 오묘한 의미를 알기나 하는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그 말에 내가 일말의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위선자일 것이다. --- p.234, 「Just Do It, OK?」 중에서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가여운 것은 밤늦도록 손에 땀을 쥐면서 이종격투기를 보는 나 자신이다. 세상에서 가장 센 놈은 누굴까, 저렇게 맞다가는 죽을 텐데 하면서 남의 고통을 즐기는 인간이 나다. 세상은 저런 싸움판이야, 저기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해, 때로는 먼저 남을 공격해야 돼, 하면서 투지를 다지다가도 사람이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싶어 화들짝 놀랐고 한편으론 창피했다. --- p.290, 「왔노라! 보았노라! 졌노라!」 중에서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르세유 근교 해변 주택가를 거닐 때, 포도밭에 홀로 포위된 전원주택 앞마당을 서성거릴 때, 다 허물어져가는 중세 마을 메네르브의 돌벽 주택을 들여다볼 때, 숲속 빈터의 담장 없는 저택을 지나갈 때, 간단히 말해 당장 들어가 살고 싶은 곳이 눈에 들어올 때면 ‘저런 집은 얼마나 할까?`’ ‘아파트 팔면 저런 집 반 토막은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 p.297, 「아파트를 팔아 프로방스로?」 중에서

그 느낌이 환희에 찬 것들뿐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프로방스에서 지내며 순간순간 외로웠고, 순간순간 배고팠고, 순간순간 암담했고, 순간순간 분노했고, 순간순간 서글펐다. 그것을 다 무릅쓰겠다며 달려간 곳이 프로방스였다. 하여 앞으로 펼쳐질 내 현실 속에서 그런 순간들이 다가온다면 프로방스로 저벅저벅 들어가 에너지를 충전해올 것이다. 이런 걸 ‘추억의 힘’이라고 해도 될 듯싶다.
한 가지 더 얻은 게 있다면 좀 슬렁슬렁 사는 것도 좋겠다는 깨달음이다. 나 자신한테도, 내 가족한테도, 내 주변 사람한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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