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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 (김동영 장편소설)
저자 : 생선
출판사 : 달
출판년 : 2013
ISBN : 9788993928662
책소개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나만 위로할 것]의 저자, 김동영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
인간은 누구나 아프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기를 원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기술은 사랑니 속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이식수술을 받으면 원하는 나이의 외모로 노화를 멈추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더불어, 평균수명은 120세로 사정없이 뛰어올랐다. 인류 모두가 원하던 바로 불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인간군상의 허우적거림은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노인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늙지 않는 젊음이 아닌 찬란했던 시절이었다. 거칠 것 없었던 시절과 그 시절이 완성한 현재의 자신. 그는 그가 젊었을 때 좋아하고 열광했던 것들을 추억하면서, 아름다운 시절은 모두 지나갔고 이제 소멸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마치 좀비처럼 맥없는 삶을 이어간다.
인간의 생명까지도 엿가락처럼 늘려놓은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의 어마어마한 발전 속도를 아직 다 여물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내면이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괴리감에 대해 어느 평범한 노인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이 노인에게만 닥친 현실이 아니라, 속도감 넘치도록 변화를 거듭하는 이 시대를 숨차게 살아가는 누구나가 겪고 있는 남녀노소 모두의 혼돈과 내면의 고독감을 밀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향해, 인류의 영원한 화두,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이라는 주제를 놓고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표를 던진다.
꽃은 언젠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삶도 유한하기에 살아 있는 순간이 의미 있는 것.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모든 것은 끝이 있기에 소중하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잠시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완벽하게 영원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목차
어딘가에서 친구들이 나처럼 가면을 쓰고 버티듯 살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너무나 거대한 변화의 파도 한가운데서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냈고 그때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믿었었다. 내가 젊고 나의 친구들도 젊었을 때 우리가 누렸고 소유했던 열망이 여전히 우리 안에, 세상이 변해도 결코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을 거라고. --- p.58
소녀와 헤어지고 여름과 가을의 오묘한 경계 속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이 설렘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 p.111
어쩌면 아는 것은 과거고, 의심하는 건 현재이며, 모르는 것은 미래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지독하건 좋건 간에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남기 마련이고, 현재는 그저 늘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짐을 정리하면서 잊으려고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마치 오래될수록 더 빛나는 대리석 조각처럼 말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 또한 내 어깨를 스쳐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들은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놓을 수 없는 채로, 그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흘러가고 지나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183
다만 사랑이 끝나고 찾아오는 이별의 외로움과 찬란한 감정이 지나고 한순간 변해버린 상대방의 마음이 날 몹시 두렵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비겁하게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주저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 흔한 사랑을, 나이가 이만큼 들었어도 실감하지 못했다. 나는 내 인생 자체도 사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문제인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내 인생을 사랑하거나 애착을 갖지 않았기에 불사의 시대 뒤 찾아온 자살의 시대에서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녀들에게 원했던 건, 사랑이 아닌 그저 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 p.186
죽음은 존재한다. 그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가다 저 뜨거운 여름 햇살에 취해 널브러져도, 암이나 그 어떤 큰 병에 걸린다 해도, 이 세계는 우리를 억지로 일으켜세우고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는 죽음의 낫을 빼앗아 저멀리 내팽개쳐버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생기를 잃은 채로 살다가 살다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오, 세상에…….’ --- p.223
누구나 나이가 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이가 들면 나는 빨랫줄에 널린 마른 수건 같은 모습일 것이다. 아니 지금의 외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실은 볼품없어질 것이다. 그러다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듯 삶을 마감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 p.249
청춘이 영원할 줄 알았다. 더이상 늙지 않으면 시간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더 많은 일들을 하고 보다 밝은 미래가 내게 비춰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청춘은 오래전에 날 떠나버렸고 나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열정과 이상도 모두 청춘을 따라가던 중에 실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