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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CAROL)
캐롤 (CAROL)
저자 :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출판사 : 그책
출판년 : 2016
ISBN : 9788994040813

책소개


사람들은 늘 갖지 못하는 것과 사랑에 빠지나 봐요

“이게 옳은 거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대답해줄 필요가 없었다.
이건 더 이상 옳을 수도, 완벽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테레즈는 캐롤을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범죄 소설의 대가 하이스미스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

1948년 크리스마스 시즌, 당시 뉴욕에 살고 있던 하이스미스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의 집필을 막 끝낸다. 이 작품은 출간 1년 만에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뒀지만 첫 작품 집필 당시에 하이스미스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얼마라도 벌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 인형 판매 사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딸의 선물을 사러 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에게 매혹된다. 하이스미스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바로 플롯을 짜고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소설의 시작과 전개, 결말이 완성되기까지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갑작스런 수두에 걸려 백화점을 그만두었고 본격적인 창작에 돌입했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이 하퍼 앤 브로스 출판사의 하퍼 서스펜스 소설로 발행되어 의도치 않게 서스펜스 작가로 불리게 된 하이스미스는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출간 후 레즈비언 소설가 딱지가 붙을 것이 염려되어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냈다. 1952년에 출간된 이 책은 100만 부가 팔려나갔고, 작가에게 진정한 성공을 안겨주었다. 하이스미스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로 인해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 말년에 이를 때까지 이를 밝히지 않다가 1990년 블룸스버리에서 『캐롤(Carol)』로 재출간하며 자신이 저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밝혔다. 영화 「캐롤」의 각본가이자 하이스미스의 오랜 친구로 알려진 필리스 네이지에 따르면, 하이스미스는 처음부터 ‘캐롤’이라는 제목을 원했으며, ‘캐롤’을 바로 그녀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캐롤』은 범죄 소설의 대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남게 되었다.

목차


두 여인이 참담한 전장 안에 서 있는 듯했다. 달아난 정신은 소용돌이 안에 몸을 숨겼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절망감이 보였다. 테레즈가 두려운 건 바로 절망감이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로비체크 부인의 지친 몸이 뿜어내는 절망감. 트렁크 안에 잔뜩 쑤셔 넣은 드레스에서 흘러나오는 절망감. 로비체크의 못생긴 외모에 찌든 절망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잘것없는 처지일 수밖에 없는 부인의 절망감. 이뿐 아니었다. 테레즈의 절망감까지 보였다. 원하는 모습이 되어 원하는 직업을 갖고픈 테레즈의 절망감. 테레즈의 인생은 그저 일장춘몽일 뿐, 이게 진짜일까? 이런 두려운 절망감이 엄습하자 테레즈는 너무 늦기 전에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온몸이 쇠사슬에 칭칭 감겨 붙들리기 전에. --- p27~28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혔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는 회색으로 무채색이나 불꽃이 일듯 강렬했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 여인은 딴 데 정신이 팔린 표정으로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백화점에서 사야 할 물건이 머릿속 절반을 차지한 것 같았다. 주변에는 판매 여직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 p54~55

“나랑 일요일조차 같이 보낼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유럽에 가서 몇 달씩 같이 지낼 수 있겠어?” “있잖아…… 취소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리처드.” “사랑한다고, 테레즈.” 그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성난 듯 말했다. “물론 난 취소할 마음이 없어.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테레즈는 리처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테레즈는 그에게 애정을 제대로 증명해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리처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테레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에게서 사랑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테레즈는 리처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에게 뭔가 받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생일 선물을 받을 때나 그의 부모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을 때도, 심지어 그와 시간을 보낼 때조차 미안했다. 테레즈는 돌난간을 꽉 쥐었다. --- p84

이게 옳은 거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대답해줄 필요가 없었다. 이건 더 이상 옳을 수도, 완벽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테레즈는 캐롤을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웃고 있는 입술 위로 캐롤의 입술이 포개졌다. 테레즈는 가만히 누워 캐롤을 바라보았다. 캐롤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진정된 회색 눈동자. 눈동자가 이래 보인 건 처음이었다. 캐롤의 두 눈에 테레즈가 지금 막 빠져나온 우주의 모습이 살짝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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