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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그물 (중국 문명의 정신적 패러다임과 서구적 근대성)
공자의 그물 (중국 문명의 정신적 패러다임과 서구적 근대성)
저자 : 김필년
출판사 : 산과글
출판년 : 2016
ISBN : 9788996729150

책소개

『공자의 그물』은 공자사상 전체를 포괄하기보다는 이 사상이 전통 중국인들의 사상과 행동에 미친 전근대적 영향력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사상, 제도 기후 등등에서 찾기보다는 왜 여기서는 통일제국이 형성되었고 여러 나라들이 공존하는 형태의 전체적 권력관계는 형성되지 못했는가를 탐색한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공자(논어)는 보수적, 반진보적, 전근대적 사상가인가 아니면 진보적, 개혁적, 근대적 성향의 사상가인가.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교가 지배했던 전통 중국사회의 전제적 통치, 정체성, 전근대적 경제, 낮은 생활수준 등을 증거로 내세우지만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유교문화권 국가들(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대륙)의 눈부신 발전을 증거로 내세운다.

이 책의 필자는 여기서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필자는 공자사상의 합리성을 높게 평가한다. 공자는 의지로써 자신의 정신을 순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혼란과 부조리를 제거하고 평화 질서를 수립코자 노력했다. 공자는 미신이나 비의적인 힘을 멀리하고 이성, 인간적인 노력과 경험적 학문 그리고 지적 정직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봉건귀족들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교육을 서민들에게 개방했다. 또한 공자는 제자들에게 카리스마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감추지 않는 정직한 스승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아주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사상가였다. 그런데 공자사상의 바탕에는 전근대적, 신화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공자 이전부터 긴 세월 계속되어온 중국전통의 세계관이었다. 특히 주(周)나라 때 확립된 천명사상은 공자의 정치철학에도 중요한 기반이다. 천명사상이란 우주의 주재자인 하늘(天)은 유덕한 사람을 택해 그 인물에게 지상을 다스릴 임무를 맡겨 천도에 부합하는 어진 정치(德治)를 백성에게 베풀도록 한다는 정치이론이다. 만약 그가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하면 다른 어진 사람을 새로이 택하여 정치는 맡긴다. 천명사상의 근저에는 천·인(天·人)의 동질성, 하늘과 사람의 상호 감응, 인간의 도덕적 의지에 하늘은 응답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공자는 천명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였고, 이상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상사회에는 천도에 부응하는 인격을 갖춘 엘리트(유교적 군자)가 천명을 받은 현능한 통치자(天子)를 도와 덕과 인의(仁義)의 정치로써 사회를 통제한다.

공자의 정치이상은 중국 제국에서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현실 정치가 이것에서 자주 벗어나기는 했지만 당위 규범으로서 중국민들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철학의 합리성으로부터는 근대적 합리성이 발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근대 서구적 합리성과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정치에 경제 등 모든 생활영역이 종속되어 있었고 사회는 아직 분화되지 못하였다. 근대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시민계급(경제인)이 전통적 지배자(봉전귀족, 성직자)와 대등한 세력으로 대두하여 정치로부터 독립하면서 오히려 정치 사회를 경제 논리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우리가 근대의 합리성을 논할 때에 가장 중요한 면모는 바로 사회의 전체적 권력관계가 정치 중심에서 경제 영역으로 이동하고 경제활동을 자유롭고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정신적, 문화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이 11세기 아래 서구에서는 서서히 이루어져 오면서 마침내 시민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요컨대 전통 중국은 안정적, 윤리적, 합리적으로 통치되었지만 그 합리성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합리성과는 달랐다. 대체로 전통 중국사회는 정체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한 공자 사상으로부터는 근대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근대과학이란 자연의 분별적인 법칙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한다.
공자사상은 그 자체만 본다 해도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인간을 멀리 초월한, 인간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우주의 주재자라든지, 사후의 세계를 사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특히 그것은 객관적 사태의 독자적인 발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윤리적 이상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제하고자 하였다. 공자 사상 안에는 이러한 갈등, 모순, 대립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자적 정신세계의 한정성으로 말미암아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사상이 나오고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바탕이 크게 제한되었다.
공자의 사상은 전통 중국은 물론 20세기 중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였고 그 때문에 중국은 전통사회로서는 상당히 높은 합리적 수준에 있었지만 자본주의나 자연과학으로 대표되는 근현대적 합리성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근대화한 것은 1980년대 덩사오핑의 개혁, 개방 이후이다. 보편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종전의 고립주의에서 탈피하여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교역 경쟁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이제 중국인들도 서구나 일본, 한국처럼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단순히 공자적, 유교적 인격수양, 인간의지의 발현으로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제 중국 대륙에서 경제는 전통사회와는 달리 정치적 종속에서 벗어나 상당히 중요한 생활영역이 되었다. 공자가 강조하는 인간적 노력과 학문의 중요성을 이제 유효하게 경제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공자의 사상이 경제발전에 유효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결연에서 탈피하여 해외에 이주한 화교들의 성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중국민들은 본격적으로 공자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공자사상이 가진 합리적인 측면 역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에서 국가들 사이의 오랜 세월 경쟁은 자본주의와 근현대적 합리성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이제 중국 역시 전통적인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이러한 발전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에 공자사상은 전통사회에서 행했던 안정적 기능과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활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의견 (서평)

□ 공자의 사상과 그물 : 역사를 이해하는 입장에 대해서

20세기 초반 이래 중국에서는 중국의 후진성, 전근대성에 대한 지성인들의 한스러움을 역사에서 그 책임질 만한 것을 찾았고 그 답은 유교의 수장인 공자였다. 중국인들이 서구적 발전을 모색한 것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적 열강과 대치하게 되면서 이들의 군사적 기술적 우위를 깨닫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한 대치가 없었다면 중국 문명은 자신의 독자적 노선을 계속 고수했을 것이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중국의 발전이 서구의 그것과 동일한 길을 걸었다고 믿는다. 즉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전단계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과 서구가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일한 방향을 따라 발전해왔다는 역사 이해를 반대한다.

약 11세기이후 서구에서 복수 국가가 공존과 경쟁이라는 전체적 권력구조를 생성하고 유지해온 것이 서구적 자본주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정치권력체들(국가, 봉건영주)의 계속된 경쟁은 국가간 부국강병책을 모색하게 했고 군대나 관료제같은 국가 기구, 제도 및 정책의 합리화를 꾀하게끔 했다. 이를 위해서는 풍족한 재정수입이 확보되어야했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 경제인(시민)계급이었다. 경제인들은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국가제도를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고자했으며 시민혁명을 통해 세력을 현실화하고 주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조건에서 산업혁명도 일어난 것이다. 우연히 형성된 복수 국가의 공존이라는 전체적 권력관계는 서구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발전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전통 중국이 서구와 가장 결정적으로 차이 나는 점은 바로 전체적 권력관계였다. 중국에서는 주로 통일제국이 지배하였고 대등한 국가들이 공존하면서 벌이는 복수 국가의 경쟁은 중국 역사에서 예외적 현상이었다. 그런 전통 중국의 역사에서 특이하고 중요한 시대가 있었으니 춘추전국시대이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발전된 효율적 합리적인 제도들이 통일제국 유지의 기반이 되었고 통일된 나라에서 경제인들의 세력은 강해질 수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분열기의 약육강식적 혼란상을 평화적 질서로 바꿀 수 있는 나름의 세계관과 정치이론들이 제시되었고 진나라는 법가의 정책을 채택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하였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 통일을 지향한 것은 법가뿐만 아니라 공자를 포함한 모든 학파가 통일을 원했다. 특히 공자가 전통에 바탕하여 ‘도덕정치로써 온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더 진전된 형태의 전통을 형성하여 후세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중국이 근대화할 수 없었던 사실에 중대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공자를 비난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개인과 국부를 증진시켜 사회 전체를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이외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경제적 번성의 대가로 개인들 사이의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반자본주의 정서는 경제적 풍요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천 수백 년 전에는 누구도 몰랐을 자본주의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공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 공자사상의 바탕과 시대적 상황 :
천명사상 신화적 정서의 도덕적 진화, 인仁 공자 사상의 합리성

공자는 기원전 551년 주나라의 제후국,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주 왕실이 낙양 천도후 200년 남짓 지난 무렵이었다. 제후들의 부국강병책으로 잦은 전쟁이 유발했고 주나라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 제도와 규범은 지배력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었다. 제자백가라고 칭해지는 사상가들은 붕괴된 주나라의 문물제도 대신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였으며 공자는 시대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공자를 이해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하늘과 인간의 상관관계라는, 즉 우주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우주의 주재자인 천과 인이 조화롭고 친밀한 상호작용을 한다는 믿음에 바탕한다. 이러한 믿음을 니덤은 중국적 사유의 핵심어라고 불렀는바 그 근원은 원시적 신화적 사유에까지 닿아 있다. 커다란 유기적 생명체인 우주속에서 각 생명들은 모두 통일적으로 연대되어 있다는 깊은 확신속에서 신화적 사유의 인간은 살아간다. 공자에 있어서 하늘이란 바로 선을 지향하는 우주의 주재자이며 그에게 기도하고 의지하는 공자 역시 윤리적인 개인이다. 이 윤리성을 매개로 천(天)과 인(人)은 조화롭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신화적 정서와 그것의 윤리화는 공자가 앙모하였던 주공의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잘 나타나 있다. 천명사상은 주나라 정치철학의 핵심적 내용이다. “하늘은 현명하고 덕이 있는 한 사람을 선택하여 이 세상 전체를 통치하도록 명한다. 이 사람은 하늘로부터 위임통치의 명을 받은 사람이며 천자(하늘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상 왕조의 임금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하였으나 이들이 선정을 베풀지 않고 폭정을 행하였기에 하늘이 명을 거두고 주에게 새로이 명을 내렸다.”.. 이런 천명사상은 후세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공자 역시 감명을 받았다. 이 사상은 정치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곧 어질고 능력있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하늘과 상통하고 하늘로부터 인정받게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시적 신화사상에서 찾을 수 없는 개인(통치자)의 윤리적 책임이 부각되어있다. 공자자신도 천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였는데 공자에 있어서 천명은 정치역학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주의 사상과 제도는 공자라는 정신적 거인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발전되었고 이것은 향후 이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주 역시 상나라의 선구적 업적 위에서 그의 문화를 산출할 수 있었다. 하, 상, 주 삼대는 이상 통치의 시대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주의 문물과 사상은 본격적인 중화문화의 틀을 마련하였고 이 틀이 바로 분열과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이 사유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요컨대 중국 문명에서는 상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단절없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 상고정신은 중국문명의 주요한 특징이며 이것은 중국의 지리적 고립성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신화적 원시사유에서부터 인간의 도덕의식과 윤리적 책임이 강하게 부각되는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주역』이다. 이 책은 주 왕조 건립(B.C.12세기) 전후에 생겨났다고 추정되는데, 생겨난 이후 내용은 계속적으로 덧붙여졌다. 유가들은 천과 인의 연대감 바탕에는 전우주적인 윤리의 힘 즉 천과 인의 본래적 선에서 비롯한 도덕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 도덕을 바탕으로 하는 천인합일의 철리를 발전시킨다. 이상적 인간이란 천의 섭리에 참여하는 사람이며 그는 인을 바탕으로 천과 합일하여 천이 만물을 생성, 화육하고 그들을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에 기여하는 사람 즉 군자 나아가서 성인, 대인을 말한다. 공자의 사상은 그의 사후 수백 년이 흘러서야 완성될 주역적 이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 인간적, 합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상나라에서 발단하여 주의 천명사상을 거치면서 발전해가는 합리화, 윤리화, 인본화, 현실화의 큰 흐름속에서 사유하고 활동하면서 이 흐름을 촉진하고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공자보다 5백년 이전에 정립된 천명사상은 초자연적 존재가 인간사에 개입하는 다른 문명권의 신화적 사유단계와 비교한다면 중국 문명이 도달한 윤리성과 합리성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시,공, 종족의 한계성을 넘어 보편적 통용성을 주장한다. 공자 또한 천명사상과 동일한 보편적 도덕성을 지향하였다. 신화나 전설에 근거하여서가 아니라 뚜렷한 경험적 증거에 바탕하여 실존하였던 과거를 찬양하였다. 주나라의 문물제도와 질서는 그가 살았던 시기의 혼란상에 비추면 너무나 아쉬운 업적이었으므로 이 업적을 바탕으로 당시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공자가 따르고자 한 주 문물의 구체적 내용에서 천명사상 외에 특히 주례(周禮)가 중요하다. 공자사상에서 예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데 그의 정신에 가장 바탕을 이루는 인(仁)은 예와 직결되어 있으며 그 예가 바로 주례이다.
주례는 주로 주나라의 종법적 봉건제도를 규제하는 규범이었다. 예란 본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에 대한 규범이었는데 주에 이르러서 종교의식은 물론 나라 전체의 지배층의 여러 관계를 규제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종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孝)이다. 주나라의 종법제도에서 각 봉건국의 제후는 주왕을 정치적인 상위자, 군주로서뿐아니라 집안의 종손(적장자)로서 존경하고 복속되어야 한다. 즉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종법적 규범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이 사회는 가족이 확대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각 개인은 그 신분, 지위에 따라 그리고 상호관계에 따라 각각 다른 규범이 적용된다. 지배층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지배계층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조정, 해결하는 데에 예를 적용한 반면, 서민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공자의 주 문물에 대한 존중과 실천 의지는 결국 주나라의 봉건적, 종법적인 차별적 신분질서를 그대로 수용하려 한다는 것이기도 했고 이 질서를 깨뜨리려는 일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어 과거는 맹목적 추종대상이 아니라 새 것을 창출하기 위한 기반이었으며 주례가 현실에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가 인을 그 바탕으로 가질 때 진정한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를 이해하려면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를 펼치면 된다. 공자는 주례를 존중했지만 예보다는 인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인을 바탕으로 역사(주의 문물)을 이해했고 인에 기반하여 예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공자의 손을 거침으로써 예는 종법적 봉건사회의 번잡한 규범에서 탈피하여 생기있고 우애 넘치는 방법으로 삶을 규제하는 인간적 규범으로 변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종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인을 바탕으로 당시 약육강식의 시대상황을 해결하는 시도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공자와 그의 사상은 아주 매력적이다.
‘인’이란 인간이 남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가지는 측은지심이나 동정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개인이 인을 계발하여 참다운 인간이 되면 그만큼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어떤 훌륭한 정책이나 제도가 아니라, 개인이 올바른 마음가짐, 개인의 수양이 정치와 사회를 바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개인의 마음이야말로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고 공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공자의 인에 대한 생각은 그의 천명사상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서 하늘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덕과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의 궁극적인 원천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하늘과 교류하면서 이제 자신이 우주의 떳떳한 도덕적 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공자는 정치가 사회의 중추적 생활영역이요 이상사회의 핵심은 도덕정치라고 믿었다. 공자의 이상사회는 인과 예에 바탕한다. 인과 예는 개인의 실천의지에서 출발하고 이상정치 역시 그러하다.

주의 천명사상에는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이상이 함축되어 있다. 주나라 문물을 앙모했던 공자의 정치론도 민본정신이 그 핵심이다. 특히 지도자의 자세, 사람됨이야말로 정치의 요체로써 지도자가 바른 정신과 자세를 가지로 백성을 위해 베푸는 통치가 바로 덕치(인치)이다. 덕치란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함은 물론이지만 성공적인 통치를 위한 방책으로도 탁월한 효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덕치와 같은 맥락에서 형벌이 아닌 예를 통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여기서 예란 인에 바탕한 것이며 예치가 신분, 지위, 직분, 상하귀천이라는 구별을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차별을 지배하는 원리는 단절이 아닌 자애에 넘치는 상호보완, 화합이다.
정치란 권력을 두고 벌이는 투쟁이 아닌 인을 바탕으로 모든 인민이 다른 사람 그리고 사회 전체와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공자가 추구한 이상정치의 주요 내용이다. 분쟁은 지도자가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에 백성을 교화하는 일은 공자의 정치론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교화에는 백성들에게 예를 가르치는 일도, 음악으로써 사람의 마을을 순화시키는 일도 있을 것이나 이런 일은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진 다음에야 행해야 한다고 공자는 가르쳤다. 공자의 정치사상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도자는 먼저 스스로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그 다음으로 인민을 교육하는 것이 임무이다. 공자에게 정치는 교육이며 군주는 스승이요 국가는 커다란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인격 완성과 그것을 통한 감화력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마침내 이상정치를 구현하는 일을 수기치인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공자 당시의 혼란상을 보아서 당시의 군주들에게 수기치인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을 점진적으로 깨우쳐 진정한 통치자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공자는 통치자에게 훌륭한 조력자들을 공급하고자 했다. 그가 내세운 교육의 이상과 정치의 방법은 혁명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공자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성인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끝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놓은 정신적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그래서 충분히 새로운 지도자 계층을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을 군자라고 칭했다. 군자는 현재의 권력자를 깨우쳐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역할을 하게 된다. 제후나 귀족과는 혈통이 달라도, 그리고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가지지 못해도 오직 도덕적 능력을 갖춘 자들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공자의 주장은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교육을 받아 군자가 될 수 있으며 군자인 이상 누구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평등 이상’에서 공자가 도달한 합리성을 볼 수 있다. 혈통에 종교적 권위가 있다고 믿은 당시의 귀족사회와 당대 서구사회를 고려해 볼 때 배울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사상은 혁신적이었으며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이 그 이후 정신세계를 지배했기에 그의 교육 이상 역시 배움에 있어서의 중국인들의 생각과 실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에게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통해 인간적인 학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과오이다’,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일단 젖혀놓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하며 잘못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많은 것을 보되 의미가 불분명한 것을 일단 젖혀놓고 그 나머지만 신중하게 행한다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실수를 저지른다면 군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군주의 실정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임무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서 공자는 당시 권력자들의 실정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을 하였고 후세에 제국이 성립한 후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로서 여겨졌다.

공자의 지식관, 인간이성관은 훗날 제국의 통치가 건강하게 유지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건강하다고 해서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공자사상의 근대성, 합리성에 대한 높은 평가가 막 바로 전통 중국사회에서 서구적 근대화의 싹을 찾는 오류로 이어져서는 아니 된다.

□ 공자의 그물
여기서 공자사상 전체를 포괄하기보다는 이 사상이 전통 중국인들의 사상과 행동에 미친 전근대적 영향력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사상, 제도 기후 등등에서 찾기보다는 왜 여기서는 통일제국이 형성되었고 여러 나라들이 공존하는 형태의 전체적 권력관계는 형성되지 못했는가를 탐색 해 본다.
진에 의한 중국 통일은 이전 주나라에 의한 통일과는 달랐다. 주가 중국의 통합적 질서를 구축했다고는 하나 주 왕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맺은 각 제후국은 자신의 영역에서 독자적 권력을 행사하였던 반면 진나라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황제에 의해서 임명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도에 의해 중국이 통치되었다. 관습법에서 벗어나 경쟁시대를 통해서 발달해온 효율적인 법과 제도는 새로운 통일제국에서 더욱 정비되어 전 국토와 인민을 다스리는데 기여하였다. 가혹한 법가적 통치로 인해 민심을 잃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이은 한 왕조는 전 중국을 통일적인 관료제도로로 통치하되 진의 제도와 법의 효율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법가적 엄격성과 가혹성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법가사상은 통치자중심의 정치사상이었으나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중국의 긴 전통을 기반으로 개진된 공자의 사상은 전통과 급격한 단절을 꾀한 법가사상과는 달리 중국정신의 반감을 산 적이 없었다. 예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인간화하려 했던 공자의 정신은 법가적 가혹한 형법을 윤리화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공자의 사상이 제국의 이념이 됨에 따라 그 본래적 모습이 어느 정도 변모를 겪은 것도 사실이다. 음양오행설, 노장사상 등과 절충 융합되고 11세기 이래 성리학(신유학)을 통해 불교적, 도가적 영향으로 유교는 공자에게서는 찾을 수 없던 내면적 형이상학적 사색의 경향을 보게 된다. 16세기초 대두한 양명학은 성리학보다 더욱 내면화되어 공자로부터 한층 더 멀어진듯하나 이 모든 것이 공자의 정신에서 완전히 이탈된 것은 아니다.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 효, 충, 신 등 여러 덕목이 제국에서도 후대의 유학에서도 부인된 바 없으며 오히려 강조되었다. 진정한 유학자가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공자의 이상은 제국에서 관료제도의 개방성으로 현실화되었다. 유교의 정신과 법가적 제도를 결합한 체제는 대제국의 통치에 효율적이었으며 이 통치가 유지되는 한 서구적 근대화의 가능성은 없었다. 즉 전통 중국이 공자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 사회에 혁신적 발전은 불가능했다.

공자가 후대에 만들어 놓은 그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근대화를 방해했는가? 첫째, 공자는 통일 이상을 후대에 심어 주었다. 한 사람의 군주 아래 온 세상이 평화롭게 통치되어야 한다는 이상은 긴긴 전통을 가지는 것이며 주나라의 문물을 사모했던 공자의 정치론에서도 수용되어 후대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복수 국가가 경쟁하면서 더 나은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통 중국인은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문제되는 것은 고성왕과 공자의 사상에 의해 양성될 일이지 그 밖에 다른 가르침은 필요하지 않았다.두 번째 그물은 초월적 존재인 천(天)과 인(人)의 밀접한 상관이라는 사상이다. 인간의 도덕적 근원은 바로 하늘이다. 공자는 하늘이 자신에게 도덕을 부여했고 그것을 사회에 실현할 사명을 내렸다고 믿었다. 천과 인이 동질적이요 근접하며 나아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상은 근원에 있어서 원시적, 신화적 사유이다. 공자사상은 인(仁)이라는 윤리성을 바탕에 둠으로써 신화적 사유에서 탈피했으나 그리스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비교한다면 신화적인 것이었다. 공자에게 천과 인은 도덕감을 매개로 상호연결, 상호작용하는 관계속에 있다. 이러한 동질성과 상호작용에 대한 믿음은 중국적 정신세계의 중요한 특징이며 이러한 근접성은 유대교 내지 기독교의 신관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공자가 남긴 또 하나의 그물은 정치의 윤리화, 도덕화였다. 이 역시 천명사상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공자는 그것을 더욱 철저히 했다. 무엇보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이상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개인은 우주와 도덕성을 바탕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공자에게는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개인의 도덕적 의지야말로 사회 전체, 전 우주의 질서와 풍요를 보장하는 궁극적 근원이다. 정치의 윤리화는 역사의 윤리화를 내포한다. 공자는 역사를 사실의 단순한 기록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춘추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국가간의 전쟁, 권력 투쟁, 하극상, 주례의 붕괴 등-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의 원인을 따지는 탐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건들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인 바, 그것을 도덕의 힘으로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 좌우될 수 없는 객관적 필연적 사태 발전을 인식하지 않았다.

도덕정치는 사회 모든 생활영역의 윤리화를 요구한다. 경제적 활동 역시 윤리적이어야 하며 경제인의 과도한 활동은 제지되어야 마땅하다. 윤리화된 정치에는 오직 유교적 군자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므로 전통 중국에서 경제인들이 유교적 관료에 비길 만한 권위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정치의 윤리화는 정치권력을 신성화했다. 이 사회에서는 경제, 예술, 학문 등의 생활영역이 정치에 대해 독립적으로 분화할 수 없다. 중국적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정치의 민얼굴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으며 그것은 늘 종교적 권위와 윤리적 정당성으로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도덕이라는 것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정신적 권력이다. 대부분 중국인들은 유교적 윤리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의 특별한 모습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유교적 윤리와 결합된 정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경제적, 정신적 세력도 중국에는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 현실이 타락을 반복해도 비판의 대상은 타락한 관료와 황제 및 그를 둘러싼 부패 세력이었지 유교적 정신이나 태도가 아니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참 유학자들이 핍박받거나 목숨을 바치는 경우도 많았다. 공자의 그물 자체는 어려운 삶속에서도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준과 이상으로서 존숭되었다. 이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는가? 영혼이 불멸하다는 확신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은 미래에 충족될 명예욕 이외에는 뚜렷한 보상이 없었다. 현세와 후세에 깨끗한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망과 후세인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데 기여한다는 자부심은 정치나 경제적 권력과는 다른 매우 고귀한 형태의 권력이다.

□ 공자와 플라톤의 이상정치론
고대 그리스 철학이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전통과 철저히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과거와의 급격하고도 철저한 단절을 공자는 물론 그 후 수천 년에 이어진 유교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공자와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쉽게 비교되는데 양자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공자가 후대에 남긴 그물의 진정한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교가 원시적, 신화적인 정신세계에서부터 긴긴 합리화 과정을 거친 후 공자에 이르러 그 본격적인 형태가 갖추어졌듯이, 그리스의 철학사상 역시 그들의 신화적, 종교적 전통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세기 이래 그리스에서 일어난 정신적 각성은 전통적인 신화, 종교, 세계관과는 확연히 다른 관점, 다른 사상과 논리를 그 속에 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전통으로부터의 혁신적 단절의 표현이었다. 양 문명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그리스인들이 그들과는 다른 동방의 이질적 문화, 정신, 관행들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중해의 편리한 교통 덕분에 그들은 역사의 이른 시기부터 해외에 진출하여 동방 세계화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고 이 모든 이질성을 통합할 수 있는 고차원의 추상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동인이 쉽게 생겨난 것이다. 철학들에 의해 그리스의 신은 일상 경험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신과 인간의 차이와 이질성은 유교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리스의 정신세계에서는 인간이 진리(신)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에서는 찾을 수없는 긴장이 필요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중국에서처럼 하늘 , 땅과 더불어 대등하게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동물과 신 사이의 중간자에 불과하다. 동물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신을 갈망하는 존재였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후대의 유학자들처럼 플라톤 역시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진리 자체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진리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전통적 가르침은 진리가 될 수 없었기에 그는 우선 진리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고자 했다. 인간의 중간자적 위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서 출발하자면 이상적 인간상은 철학자인데 철학자란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결여된 신적인 이상, 진리를 고뇌하며 동경하는 자이다. 철학자는 에로스적 인간, 중간자라고 하는 긴장이 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본능적, 비합리적 능력이며 신적인 영역을 갈구하고 인식하기위해서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추동력을 필요불가결하게 여긴다.
에로스에는 욕망의 여러 측면이 있지만 궁극에 있어서는 선을 체득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잘 가다듬어지고 잘 인도될 때만 진정한 자유, 자아의 고귀한 발견과 같은 바람직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며 플라톤의 국가는 바로 이러한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이상국가를 그리고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당시 널리 알려진 주의 문물에 대한 그리고 당대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정보에 대한 지식을 말하거니와 그런 지식은 바로 그가 생산한 새 이론과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서는 지식의 의미가 공자와 달랐다. 그들은 우선 그때까지 내려오던, 당대에 존재하던 모든 사상과 이론, 관점을 버려야 했다. 그들의 시대는 전통이 급격히 붕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훨씬 급격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정립하는 사상 역시 과거와 더 철저히 단절되야 했다. 급격한 사회변화, 이질적인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이해를 위한 개념이나 용어부터 명확히 정의되어야 했다.

□ 동서 고대 역사인식 비교 및 근대 정치사상
사마천은(145 ~ 86? B.C.)은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공자 사후 4백년, 통일제국 한나라의 초기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사기』를 남겼다. 전설적 제왕인 오제에서부터 시작해서 하, 상, 주의 세 왕조,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와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왕조의 무제에 이르는 기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비견되곤 한다. 한 왕조 특히 사마천이 섬기던 무제 시대에는 과거를 존숭하는 유학이 전통 학문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 서의 두 위대한 역사가의 비조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통이 준 영향의 정도일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의식은 공자의 저술이라고 말해지는『춘추』의 비판정신이다. 춘추정신이란 소극적으로는 악행에 대한 비판이요 적극적으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다. 또한 주(周)문화 내지 중국문화에 대한 옹호 의지로서 중국 전통적 덕치사상, 그것을 새롭게 정립한 공자의 인치철학이 춘추의 정신이요 역사가로서 사마천이 지녔던 이상이었다. 사마천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서 객관적 인과관계를 확립하는 것보다는 유교적 이상을 현창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고 주공, 공자, 맹자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윤리화하였다.

사마천에 비견되는 서구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라는 책을 서술하였다. 여기에는 근동의 대제국 페르시아와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와의 전쟁, 즉 페르시아전쟁의 원인, 과정 및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의 첫머리는 고성왕들이 다스리는 이상사회에 대한 기록인 반면 헤로도토스에게서는 불화와 투쟁이 역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고 있다. 역사를 읽는 사람은 우선 그 ‘방만한’ 서술에 어리둥절해진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사는 여러 민족, 국가들의 종교, 풍습, 기후, 풍토, 제도 지리, 역사 등등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제는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사이의 전쟁이다.

사마천에게는 뚜렷한 중심사상이 있어서 역사속에서 이상국가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다. 헤로도토스에게서 이러한 중심사상이란 생겨날 수 없었다. 그는 길 위에서 일생을 보냈다 할 정도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많은 지역을 여행하였다. 여기서 사마천의 광범위한 여행과 헤로도토스의 그것은 근본에 있어서 같지 않았다. 사마천은 통일된 제국내에서 이미 알려진 역사적 유적을 찾아 다녔다. 여행을 통해서 그는 물론 새롭게 눈을 뜨는 체험 같은 것도 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많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방문한 지역의 대부분은 전래의 그리고 당시에 만들어진 여러 문헌, 국가의 자료(호구조사), 지방관의 보고서, 풍문 등등을 통해서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장소였다. 거기에 비해 헤로도토스는 애초부터 상당힌 사전 지식을 가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극히 빈약한 정보만 가지고 혹은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새로운 것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만 가지고 여행을 하였을 것이다. 요컨대『역사』에는 『사기』와 달리 모든 사물을 일관성 있게 배열하는 중심된 사상,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 문화적 환경 속에서 헤로도토스는 모든 인간사는 덧없으며 어떤 큰 세력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은 쇠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욕망, 특히 권력욕이 인간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사마천보다 ‘객관적’ 사건 즉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그것들을 윤리적 의지로 덧칠하는 일은 그와 상관없다. 유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문제가 이 역사가의 시각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또 투키디데스 같은 그리스 역사가는 인간의 의지나 희망에 독립된 사건의 진행과 사태의 발전을 인식하고 그것에 인간이 적응해야 함을 가르쳤지만 유교적 역사관은 역사와 현실을 윤리적 척도로 표현하고 인간적 의지로 통제하려고 했을 뿐이다. 공자의 세상에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신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나 갈등, 신이 인간이 된다는 역설 같은 것은 없다. 기독교에 비해 그 사상은 매우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 모순이 내재하지 않고 안정되어 있어 거기서부터 새로운 생각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일상적, 인간적 의미에서 합리적이지만 서구의 근현대적 합리성과는 달랐다.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으로서 대표되는 근현대의 합리성은 오히려 비인간적, 탈일상적인 것이다. 개인의 이익추구를 정당화하고 현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규칙성과는 다른 자연의 숨겨진 법칙을 찾아내는 정신과 공자의 이상은 같지 않다. 공자 사상의 전근대적 합리성은 유교적 정치론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백성이 중요하고 군주는 백성에 대한 봉사자에 불과하다는 황종희의 정치사상과 서구 근대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의 정치론을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전자는 여전히 윤리적 정치론을 개진하지만, 후자들 속에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긍정하는 정치론을 볼 수 있다.
공자의 도덕적 정치론은 19세기 이래 중국이 서구의 충격을 받아 이에 적응하는 데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중국의 유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서구 열강을 윤리적 잣대로서 재단하려 했지 어떻게 하면 이들처럼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들과의 전쟁에서 수차 패한 후에도 이들의 기술만 받아들일 뿐 중국 고유의 윤리, 정치이상, 제도를 끝내 고수하려고 했다. 나중에 적극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 하는 경우에도 경제인들을 지원한다든지, 법규를 정비하여 경제활동을 뒷받침한다든지 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정신적인 자세를 바로 함으로써 제도적, 물질적인 후진성을 극복하려했다.

□ 중국의 근대화와 공자의 그물
1910년대에 시작된 후스, 천두슈로 대표되는 신문화 운동, 1930년대 장제스의 신생활 운동, 1950~6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 추진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은 경제적, 물질적인 기반을 도외시하고 모두 정신적인 정화 운동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선진 서구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추월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공자(유교)가 윤리적 의지나 도덕적 성품의 계발을 국가 통치의 가장 중요한 기초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요컨대 공자의 사상은 전통 중국은 물론 20세기 중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였고 그 때문에 중국은 전통사회로서는 상당히 높은 합리적 수준에 있었지만 자본주의나 자연과학으로 대표되는 근현대적 합리성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근대화한 것은 1980년대 덩사오핑의 개혁, 개방이후이다. 보편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종전의 고립주의에서 탈피하여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교역 경쟁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이제 중국인들도 서구나 일본, 한국처럼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단순히 공자적, 유교적 인격수양, 인간의지의 발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제 중국 대륙에서 경제는 전통사회와는 달리 정치적 종속에서 벗어나 상당히 중요한 생활영역이 되었다. 공자가 강조하는 인간적 노력과 학문의 중요성을 이제 유효하게 경제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공자의 사상이 경제발전에 유효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결연에서 탈피하여 해외에 이주한 화교들의 성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중국민들은 본격적으로 공자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공자사상이 가진 합리적인 측면 역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에서 국가들 사이의 오랜 세월 경쟁은 자본주의와 근현대적 합리성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이제 중국 역시 전통적인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이러한 발전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에 공자사상은 전통사회에서 행했던 안정적 기능과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활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상 독자층

동서양 역사학과 철학 관련자
공자 및 동서양 비교 연구자 그리고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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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들어가는 말

제1부 공자의 사상과 그물

제1장 역사를 이해하는 입장에 대해서
제1절 중국과 서구는 각각 다른 길을 갔다:
진화론적(마르크스적) 역사관의 부인
제2절 중국과 서구는 ‘같은 길’을 간 적도 있었다
제3절 통일제국의 형성: 중국이 서구와 달라진 결정적 계기
제4절 20세기 공자 비판의 허구성

제2장 공자사상의 바탕, 시대적 상황
제1절 중국의 세계관, 천명사상, 『주역』: 신화적 정서의 도덕적 진화
제2절 춘추전국시대: 중국적 정신의 합리화, 윤리화, 인간화

제3장 공자의 사상
제1절 공자의 보수성 : 나는 주를 따르겠노라吾從周
제2절 공자사상의 핵심 : 인仁, 천명天命
제3절 공자의 정치론,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군자이상君子理想
제4절 교육관, 학문의 자세, 사상의 합리성

제4장 공자의 그물
제1절 통일제국에서의 유교, 중국 문명의 정체화
제2절 공자의 그물: 중국 문명의 정신적 패러다임

제2부 유교적 정신 vs.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제5장 공자와 플라톤의 이상정치론
제1절 천일합일 vs. 중간자적 인간
제2절 공자와 플라톤의 진리
제3절 플라톤의 이상국가
제4절 이상국가론의 현실부정적 잠재력

제6장 유교적 역사관과 그리스 정신의 역사인식
제1절 사마천 : 역사의 윤리화
제2절 헤로도토스 : 사실 자체에 몰입
제3절 투키디데스 : 인간의 권력적 본성 그리고 사건의 독자적 논리와
필연적 진행

제7장 유교적 비극 정신과 그리스의 비극
제1절『삼국지연의』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성
제2절 그리스 비극: 고통을 통한 새 자아의 형성

제8장 유교와 기독교 : 이성 vs. 역설
제1절 예수의 가르침 : 역설과 현실부정
제2절 역사발전에 있어서 유교와 기독교: 합리적 정체와 비합리적 활력

제3부 서구와 중국의 근대 정치사상

제9장 근대 서구의 정치론 165
제1절 정치의 탈신성화: 마키아벨리와 홉스
제2절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두

제10장 황종희 사상의 전근대성과 근대 서구정신의 혁신성
제1절 황종희와 공자의 그물
제2절 근대 서구정신 : 전통으로부터의 혁신적 탈피

제11장 서구 근대화에 있어서 중국의 기여, 그 한계
제1절 서구적 근대화에 있어서 중국 기술의 기여: 니덤
제2절 프랑스 대혁명, 유교와 계몽사상: 주겸지
제3절 서구 문명의 독자적 동태성

제12장 『금병매』 : 반유교적 소설
제1절 전통중국의 정통과 이단
제2절 유교와 육대기서六大奇書
제3절 『삼국지연의』와 『금병매』 : 평행 구조, 패러디, 극단적 대비
제4절 유교적 이상 vs. 『금병매 : 성욕의 근원성과 권력지향성,
관료주의의 독자성
제5절 사건 진행의 객관적 필연성
제6절 유교적 가치와 세태
제7절 『금병매』와 불교적 이상

제4부 중국의 근대화와 공자의 그물

제13장 유교와 근대화, 오리엔탈리즘의 진실
제1절 전통 중국의 정체성
제2절 베버 테제에 대한 신유교적 비판 및 그 허구성
제3절 반오리엔탈리짐의 한계

제14장 보편사적 흐름과 전통주의적 대응
제1절 양무운동
제2절 변법유신과 유교사상

제15장 신문화운동, 그 영향과 한계
제1절 신문화운동
제2절 신문화운동의 한계, ‘계몽과 구국’의 허구성

제16장 국민당과 중국의 근대화
제1절 쑨원과 삼민주의
제2절 장제스와 대륙의 근대화정책
제3절 대만, 최초로 공자의 그물을 벗어나다

제17장 중국 공산당의 근대화와 그 허구성
제1절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두
제2절 마오쩌둥과 공자의 그물

요약과 결론 : 21세기 공자사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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