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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1 (정경하 장편소설)
비밀 1 (정경하 장편소설)
저자 : 정경하
출판사 : 로담
출판년 : 2011
ISBN : 9788997253012

책소개


박태신,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커튼을 열고 흐린 하늘을 응시하던 태신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그 아인 죽을 때조차 모를 거야. 자신을 누가, 왜 죽이려고 하는지.”
“맞는 말씀이지만 회장님,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는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비서실장인 윤원준의 말에 태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야지.”
엮여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사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서림아, 이 모든 걸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란다. 모든 걸 ‘그’가 했단다.

서림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등장에도 태신은 놀라지 않은 채 위스키를 마셨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고 말했어요. 당신도 동의했잖아요.”
태신은 제법 많은 양의 위스키를 들이켜고도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지.”
“그런데 지금, 왜 나선 거예요? 왜 내 의사와 상관없는 일을 하냐구요!”
“……날 믿지 않았잖아.”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태신이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살피며 반문했다.
“이유를 몰라?”

목차


서림은 익숙한 냄새를 쫓아 눈을 떴다. 그런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다.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지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시야는 흐릿했다.
사방이 춤추듯 빙글빙글 돌아 서림은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서서히 어지럼이 잦아들자 은은한 베이지색 천장이 가장 먼저 보였다. 신선한 산소가 코를 통해 공급되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깨어났군.”
불쑥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리자 키가 큰 서늘한 인상의 남자가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누구……?
그는 서림의 눈에 의문이 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림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옭아매던 우악스럽던 손길이 느껴졌다. 그들이 그녀를 포박해 파도치는 바다에 던졌다. 사방에 물보라가 일며 하염없이 가라앉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남자도 같은 이유일지 몰라. 산소 공급을 받지만 편히 호흡할 수 없어 아픈 심장이 요동을 쳤다.
도망쳐야 해.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꿈틀거렸다. 실제로는 무의미한 몸짓이었지만 그만큼 두렵고 절박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채 바라보던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서림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보던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람의 온기가 그토록 뜨거운지 서림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여러 말보다 더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안전을 약속했다.
믿어도 되나요?
서림의 혼란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철저하게 무력했다.
“여기 널 해치려는 사람은 없어.”
묘하게 신뢰를 주는 음성이었다.
허튼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란 신뢰를 주었다. 서림의 눈꺼풀이 깜빡거리다 천천히 감겼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눈을 뜨기도 전 낯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간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신장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식할 장기가 아직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 왼쪽 신장은 오른쪽보다 상태가 양호합니다. 부득이한 경우 오른쪽 신장을 적출하고, 왼쪽 신장의 경과를 지켜보면 될 듯싶습니다.”
“위는 어떻습니까?”
“미세한 출혈이 있긴 하지만 호전될 겁니다. 처음 발견 당시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서림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말…….”
그녀가 힘겹게 말을 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 중이던 남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봤던 남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묘한 실망감을 불러일으켰다.
“깨어나셨군요. 어떻습니까? 호흡이 힘들진 않으십니까?”
가운 차림의 남성이 먼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조금.”
“바닷물에 폐가 손상되어 아직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입니다.”
바닷물…….
서림의 몸이 튕기듯 솟아올랐다.
“그 사람들, 그 사람들!”
억눌린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잡아야 한다! 물건처럼 그녀를 바다 한복판으로 던진 인간들을!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아온 세월을, 가족처럼 따랐던 믿음을, 살려달라는 애원을 무시한 채 잔혹한 짓을 저지른 인간들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녀는 진정제를 투여하려는 의사를 피해 팔을 휘둘렀다.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들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아둔하군.”
그때 불쑥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완고해 보이는 얼굴, 처음 눈을 떴을 때 봤던 사람이었다.
그의 등장에 의사와 또 다른 남자가 조용히 물러나 방을 나갔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여긴, 어디에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은 유서림이에요…… 나, 난 바다에 빠졌는데…… 오늘 날짜가 며칠인가요?…… 절 구해 주신 건가요? 집, 집에…… 연락 좀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그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집?”
“네. 전, 제 가족은 서울에 살아요…… 할머니가 걱정하실 거예요.”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그는 절제된 동작으로 침대를 마주보고 있는 체어에 앉았다.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3미터에 달하는 파도 속에 요트가 열 시간씩 있게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서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당신이 먹는 음식에 날마다 비소가 섞여 있지도 않았겠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는 그녀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말했다.
“비소라면, 독 말인가요?”
“두통과 현기증, 구역질에 시달렸을 텐데.”
서림은 마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 그가 무서워졌다.
“당신은 누구예요?”
“소개가 늦었군. 박태신이라고 하지.”
박태신……. 서림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아무 것도 정확하게 인지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연락해 주세요.”
“그렇게 얘길 해도 이해를 못 했나 보군.”
“보내주세요.”
“죽고 싶나?”
갑자기 몸을 일으킨 그가 그녀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순간적인 위압감에 서림의 몸이 굳어졌다.
“그럼 내가 괜한 고생을 했군. 바다에서 건져낼 필요가 없었어.”
그의 검은 눈이 얼음처럼 빛이 났다. 겁에 질린 채 그를 보는데,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손이 다가와 그녀의 전신을 얽어맸다. 스산한 공포감이 방 안을 메운 채 거대한 손이 그녀의 목을 짓눌렀다. 숨을 쉬기 위해 헐떡거렸지만 목을 짓누른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헐떡거리는 그녀를 본 남자가 소리쳤다.
“윤 실장!”
그의 비서와 함께 의료진이 뛰어 들어왔고, 서림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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