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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꽃향기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과 함께한 침묵의 고백)
저자 : 레일라 슬리마니
출판사 : 뮤진트리
출판년 : 20230523
ISBN : 9791161111186
책소개
뮤진트리에서 펴낸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2016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달콤한 노래』로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에서 홀로 하룻밤을 머물러보라는 제안을 수락한다. 집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산만함보다 고독을 선호하고, 현대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그녀가 옛 세관 건물을 개조한 미술관에 갇혀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을 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묘한 예술작품들과 함께 밤으로 빠져들면서 레일라 슬리마니는 예기치 않게 아버지를 떠올리고, 자신, 감금에 대한 환상,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조용하면서도 이야기꾼인 도시 베네치아처럼.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깊고 투명한 사유가 빛나는 작품이다.
목차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절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치유하려고 하거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면 안 된다. 오히려 실험실 조수가 표본 병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듯 자신의 슬픔을 배양해야 한다. 상처를 다시 헤치고, 기억을 더듬고, 부끄러움과 이전에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 p.12
물론 오늘처럼 글이 안 써지는 날은 자주 찾아온다. 때로는 이런 날이 며칠씩 계속되어 깊은 좌절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편중독자나 모든 중독의 희생자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부작용과 구토, 결핍의 위기, 고독을 잊어버리고 오직 도취만을 기억한다. 그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를 통해 말하기 시작하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이 절정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 p.14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우리 것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침묵을 가지고 노는 것이며, 실생활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문학은 억제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을 때 열정적이지만 진부한 문장으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꾹 참듯, 그렇게 자제하는 것이다. 문학은 침묵의 에로티시즘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 p.25
나는 문학이 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것은 의사에게 의학이 뭐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인 질문이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실감한다. 이 같은 무력감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글을 쓴다.
--- p.65
이 세계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를 잊고 싶지 않다. 이 세계는 아마 한 편의 소설이 될 것이다. 오직 문학만이 이 묻혀버린 삶들을 다시 드러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를 떠난 지 20년이 되었다. 일종의 우수가, 내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 p.71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은둔하고, 따뜻한 아파트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벽돌로 벽을 쌓는 것만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확장하고 정복하겠다는, 그리고 세계와 타자, 미지의 것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성벽 뒤에서 살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 p.74
어쩌면 바로 그것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닐까? 잊힌 것을 되살리는 것, 망각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과거와 현재가 힘들게나마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것. 매몰되는 것을 거부하기.
--- p.87
이 도시의 호화로운 건물들이 물과 진흙 속에 파묻히고, 영광의 기억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잊히고, 포석이 깔린 광장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니스는 그 안에 파괴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도시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든 것은 아마도 이 취약함일 것이다.
--- p.91
사라짐으로써, 내 삶에서 자신을 지움으로써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감히 가지 못했을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것은 부끄럽고 슬픈 생각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나는 그 진실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장애물이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나의 운명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 p.111
문학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부분을, 빠진 것을 채우는 데 쓰인다. 파내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상상하고, 추억과 영원한 강박의 조각들을 서로 이어 구성한 하나의 시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 p.116
완전히 이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저곳에 사는 것도 아닌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일체의 정체성을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또 스스로가 배신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 성공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었다.
--- p.134
역설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어떤 장소에서 떠날 가능성이 있어야만 그 장소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것, 그것은 유폐와 강요된 부동 상태, 무기력의 반대다.
--- p.142
나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고 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주시하고 내가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채우기 위해 섬에 산다. 글쓰기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대체로 이렇게 단정하는 것을 경계한다.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나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행복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