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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큰글자소설) (정세랑 소설)
저자 : 정세랑
출판사 : 은행나무
출판년 : 2023
ISBN : 9791167373311
책소개
명랑하고 유쾌한 서사, 감전되고 싶은 짜릿한 상상력,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주제를 낚아채는 건강한 시선으로 한국소설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작가 정세랑의 소설.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이만큼 가까이』를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해온 정세랑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두루 끌어안으며 우리 문학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제시해온 작가다. 이번 소설 『재인, 재욱, 재훈』에서 역시 그는 특유의 엉뚱하면서 따뜻한 상상력으로 누구라도 깜짝 놀랄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피서지에서 돌아오는 길, 형광빛 나는 바지락조개가 든 칼국수를 먹은 삼남매에게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다. 초능력이라 하기엔 너무 미미한 초능력에 당황해 있을 때, 누군가를 구하라는 메시지와 소포가 도착한다. 첫째 재인은 연구원으로 일하는 대전에서, 둘째 재욱은 아랍 사막의 플랜트 공사장에서, 셋째 재훈은 교환학생을 간 조지아의 염소 농장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누구를, 어떻게 구하라는 것일까?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다정함과 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폭력적이고 혐오스러운 사건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친절한 사람들이 남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서 『재인, 재욱, 재훈』이 시작되었다.
목차
재인은 운전을 하느라 예민해진 상태였다. 팔 년 된 엄마의 소 나타는 에어컨이 시원찮았다. 둘째인 재욱이 출국하기 전에 남 매가 다 같이 휴가를 보내자는 게 목적이었지만, 평소에 그다지 끈끈하지 않은 세 사람이 휴가라고 뭐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서해안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해수욕장에서 각자 해수욕을 하 고, 모기에 시달리고, 저녁엔 해산물을 먹었다. 특별히 좋지 않 을 줄 알고 있었지만 첫째로서는 강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p.7
재훈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있었다. 꼭 대기 층엔 전망 카페가 있었으나 남자 고등학생 혼자 교복을 입고 가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끝까지 올리지 않고 반 층 걸쳐둔 채 멈추었다. 사람들이 고장 났다고 신고하기 전에 야경을 잠시만 즐길 셈이었다.
“저기 보이는 회사들 중 아무 데에도 못 가겠지.”
재훈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빌딩 꼭대기마다 회사 로고들 이 빛나고 있었다. 사실 회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이 일차 난관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잘했던 누나와 형도 그저 회사원이 되었다. 크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재훈이 잘 모 르는 세계에서 뭔가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재훈은 누나와 형이 별 무리 없이 갔던 길을 자기는 가지 못할 것만 같 았다. 갑자기 심술이 났다. 대학이든 회사든 하나 떨어질 때마 다 그곳 엘리베이터들을 춤추게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 p.32
재욱과 여자친구의 관계는 어려운 몇 년을 지나고 있었다. 막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재욱이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다음 에는 각자 졸업과 취직 시즌이었다. 차라리 바빠서 계속 사귈 수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두 사람 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재욱 이 바로 파견을 왔으니 사귄 것은 몇 년이지만 그 몇 년의 내용 물이 너무 빈약했다. 재욱은 그 비어 있는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 p.69
재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의 수상 해하는 눈길을 끌지 않고 이 문제에 골몰할 수 있는 시간 말이 다.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딴짓을 할 수 있 을 만큼 느슨한 건 아니었다. 강압적인 야근은 없어도 저녁 시 간이 온전히 재인의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을 벌이 다 들켰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핑계가 필요했다. 예상 보다 그 핑계는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재인의 고민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핑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