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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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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구병모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출판년 : 2023
ISBN : 9791168127012

책소개


위픽 시리즈 그 첫 번째, 구병모의 대표작 『파과』를 잇는 강렬한 외전의 탄생

위즈덤하우스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WEFIC)’이 세상을 향해 그 첫발을 내딛는다. 첫 번째 주인공은 구병모 작가다. 『파쇄』는 그녀의 대표작 『파과』의 외전으로, ‘조각’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킬러가 되었는지 그 시작을 그린 소설이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타인을 부숴버리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삶도 산산조각 나기를 선택한 조각의 탄생기가 구병모 작가의 압도적인 문장으로 생생히 되살아난다.

목차


곰이나 멧돼지가 손발을 묶을 수는 없으니 사람이 산장을 습격했을 텐데, 적이라는 게 있다면 왜 그녀를 죽이지 않고 묶어서 버려두기만 했는지 모를 일.
아닌가. 이미 죽었는데 지나치게 도저한 죽음의 상태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고 있을 뿐인가. 스스로도 헛갈려서 입으로 후, 바람 소리를 내보고 아파, 살아 있어, 움직여, 육성으로 중얼거려도 본다. 죽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낼 수 없다. 기껏해야 시신의 분해와 함께 뒤늦게 발생하는 휘파람 같은 가스 소리만을 낼 뿐. 사신을 맞이하는 소리를.
--- pp.8~9

그러니까 간밤에. 끊어진 장면을 이어나간다. 저녁 식사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가. 두 사람만이 있던 산장에 누군가 왔던가. 생각, 생각을, 그가 생각을, 하라고 했던가, 하지 말라고 했던가. 생각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구분해야 한다고 했던가. 아니, 둘 다 아니다.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 pp.9~10

- 제 눈알을, 파내려고 하셨어요.
그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한순간 잊어버린 스스로에 대해서다. 어쩌자고 마음을 놓았을까, 그가 분명 말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이 차에 타고난 다음에는, 네 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만들 거야. 머리부터 팔다리, 몸통이고 내장이고 다 뽑아다가 도로 붙일 거다. 괜찮겠어?
퇴각로가 따로 없는 물음이 귀에 표창처럼 꽃히고,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한번 노려본 다음 차 문을 열고 올라탔었다.
--- pp.16~17

손잡이를 합쳐 두 뼘 길이의 칼을 집어 만지작거린다. 바로 엊그제 대장간에서 갈아 온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심장 한가운데 도달해보기는커녕 아직 피 한 방울 묻혀본 적도, 무언가를 썰거나 끊어본 적도 없는 깨끗한 칼날이다. 앞으로 수많은 피를 자석처럼 끌어모으고 누군가의 목숨을 필요로 하게 될 그 연장의 눈부심이 마음속에 공존하는 충동과 저항감을 거의 같은 크기와 깊이로 자극하고, 그녀는 자기가 일찍이 상상만 해보았을 뿐인 최대한의 빠르기로 몸을 돌려서…… (중략)
- 한 0.5초쯤? 망설였어. 맞지? 내가 이 새끼를 정말 찔러도 될까, 그어도 되나, 대가리를 애매하게 굴리니까 안 되는 거야.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 pp.26~27

손에 쥔 금속이 땀으로 미끌거린다. 그리고 어쩌면 기회는 한 번이다. 과녁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새삼스레 손안에 차오르는 생경함을 고민할 만큼 한가롭지 않은 것이다.
놈이 달려온다.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이 맵다. 이걸로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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