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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늑대 (넬레 노이하우스 장편소설)
저자 : 넬레 노이하우스
출판사 : 북로드
출판년 : 2013
ISBN : 9791185051062
책소개
끝나지 않는 신화, ‘타우누스 시리즈’
넬레 노이하우스가 다시 한 번 진화한다!
『사악한 늑대』는 독일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시리즈인 ‘타우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넬레 노이하우스의 최신작이다. 이번 작품에서 넬레 노이하우스는 여성으로서 쉽게 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잘못 접근하면 자극적으로만 보이기 쉬운 아동학대를 과감히 작품의 소재로 선택했다.
뜨거운 여름 밤 강 위에 깡마른 소녀의 시체가 떠오른다. 처참하게 훼손된 소녀의 몸에는 죽기 전 받았던 학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덴슈타인은 이 소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언론의 힘까지 빌리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다. 그 와중에 유명 방송인 한나가 처참하게 폭행당한 채 발견된다. 겨우 목숨만 건진 한나의 몸에 남은 흔적은 어쩐지 죽은 소녀의 몸에 남았던 학대의 흔적과 닮아 있었다. 용의자의 수만 늘어가는 와중에 한나가 오랫동안 정신상담을 받아왔던 상담사까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가녀린 소녀의 처참한 시체와 함께 시작되는 이번 작품은 초반부터 보덴슈타인과 피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 방송인 한나, 그리고 피아의 친구 엠마 등 여러 시점에서 전개되며 읽는 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휘몰아치는 전개를 보여준다.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던 각 이야기의 요소들이 마지막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쾌감은 미스터리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넬레 노이하우스 특유의 재미이자, 타우누스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와 트릭에만 집중하는 미스터리보다는 깊이 있고 고급스러운 미스터리를 원했던 독자들이라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타우누스 시리즈’의 팬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시리즈를 함께해온 이들에게는 이미 친근한 피아와 보덴슈타인, 그리고 매 작품마다 치밀한 구성과 반전으로 읽는 이를 감탄하게 하는 타우누스 시리즈 특유의 재미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목차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다. 작고 귀여운 천사의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로 살포시 흘러 내려와 있다. 그 머리카락을 만지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그는 잘 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햇볕에 살짝 그을린 목덜미와 부서질 듯 가녀린 등뼈를 드러낸 채 열심히 휴대전화를 두드리고 있다. 그는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해 인기척을 냈다. 그녀가 얼굴을 반짝 들었다. 그녀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미소는 입가에서 시작돼 천천히 온 얼굴로 퍼진다.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신뢰감으로 가득 찬 짙은 눈동자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니 아파왔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전부 그녀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뭐든 돈 안 드는 방법을 통해 이 비참한 생을 일찌감치 마감했을 것이다.
“안녕, 아가씨.”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바로 내렸다. 그녀의 피부는 보드랍고 따뜻하다. 늘 그렇지만 처음에는 그녀를 만지는 게 쉽지 않다.
“엄마한테는 어디 간다고 했어?”
“제시네 집에 간다고 했어요. 양아버지랑 무슨 파티 같은 데 간대요. 소방서에서 하는 거라든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휴대전화를 빨간 배낭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래?”
그는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나 이웃에서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흥분에 가슴이 떨리고 무릎이 휘청거렸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놨어. 어서 들어가자.”
--- pp.6~7
피아는 감식반 직원들이 지나가도록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직원 둘이서 소녀의 시체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이건 뭐 종잇장처럼 가볍군. 뼈하고 가죽만 있는 것 같아.”
직원 하나가 말했다. 피아는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죽은 소녀는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민소매 셔츠에 짧은 청치마를 입었는데 치마가 위로 말려 올라가 허리께 뭉쳐 있었다. 조명이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시커먼 멍 자국과 길쭉한 상처가 죽은 소녀의 비쩍 마른 몸뚱이를 뒤덮고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
“헤닝, 이거 멍 자국 아니야?”
피아가 소녀의 배와 허벅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음, 그런 것 같은데.”
헤닝은 손전등으로 소녀의 몸을 비춰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맞아. 멍 자국과 열상이 아문 흔적이야.”
헤닝은 소녀의 손을 번갈아 가며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크뢰거.”
“왜?”
“이 시체 뒤집어도 될까?”
“응.”
헤닝은 피아에게 손전등을 주고 장갑 낀 손으로 소녀를 조심스레 뒤집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피아가 기겁해서 외쳤다. 등 아랫부분과 엉덩이가 완전히 헤져서 근조직 사이로 척추, 갈비뼈, 골반의 일부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배의 스크루 때문에 난 상처야. 이 아이는 오늘 저녁에 죽은 게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죽지도 않았어. 손의 상태만 봐도 물속에 있은 지 한참 된 거 같아. 강물에 떠내려 온 건지도 모르지.”
“그 말은 이 아이가 다른 학생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피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난 법의학자일 뿐이야. 그걸 알아내는 건 당신 몫이지. 분명한 건 오늘 죽은 게 아니라는 거야.”
--- pp.49~50
아버지가 종이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더니 다른 원피스를 꺼냈다. 삼촌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그 빨간 원피스와 어머니가 신는 것 같은 진짜 실크 스타킹을 입혀주었다. 삼촌이 허리에 붙어 있는 리본을 어떻게 매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어찌나 우습던지!
그런데 그 원피스는 정말 예뻤다. 빨간색 공주 드레스에 빨간 구두. 구두에는 굽도 달려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뿌듯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치 결혼식 행진을 하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 삼촌이 먼저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장에 덮개가 달린 진짜 공주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무슨 놀이 할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할 거야. 옷도 갈아입을 거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나간 뒤 그녀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뜀을 뛰었다. 그리고 아까 모두들 그녀의 드레스에 감탄하며 칭찬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늑대가 나타났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늑대 분장을 한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이런 비밀 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건 나중에 그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 pp.71~72
엠마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댁에서 살게 된 뒤로는 더욱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거야. 원래 그런 사람인걸, 뭐.”
엠마는 자신을 나무라며 청바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동전이나, 휴지, 열쇠가 들어 있는지 보려고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뭔가 매끈한 것이 손에 만져졌다. 엠마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이성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마에선 진땀이 났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눈물이 솟구쳤다.
청천벽력 같은 깨달음 속에서 그녀의 세계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손안에는 뜯긴 콘돔 봉지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