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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시대 유럽사회 개혁론과 유교
계몽시대 유럽사회 개혁론과 유교
저자 : Labbe Pluquet
출판사 : 박영스토리
출판년 : 2018
ISBN : 9791189005153

책소개


해 제: 18세기 프랑스왕립대학 교수의 유교문명 개설서와 유교의 6고전 번역 _19
유교 도덕정치철학의 기원·본질·효용에 관한 고찰 _42
서 문 _43
승인서 _45
인준서 _46
서 론: 중국 경세가들의 도덕정치철학에 관한 고찰 _47

CHAPTER 1
중국 경세가들의 도덕정치철학의 기원과 본질
CHAPTER 2 도덕정치철학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
과도하고 쉴 틈 없는 노동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국의 경세가들이 동원한 방법 및 바람직한 덕성이 백성들에게 길러질 수 있도록 경세가들이 보여준 모범 _64
중국의 경세가들이 백성들에게 전수한 가르침 _68
백성으로 하여금 도덕을 공부하게 하고 도덕이 규정하는 의무를 실천하도록 한 동기와 규칙 _71
중국의 경세가들이 수립한 국가교육체제 _74
CHAPTER 3 중국의 정치체제
CHAPTER 4 도덕정치철학 체계가 중국인의 성품에 미친 영향
CHAPTER 5 국가의 역량에 대한 도덕정치철학 체계의 효용
CHAPTER 6 중국 경세가들의 도덕정치에 기반을 둔 개전권과 강화권
CHAPTER 7 중국 경세가들의 정치체제가 평화와 행복에 미친 영향
도덕정치가 사회의 평화에 미친 영향 _122
도덕정치가 사회의 행복에 미친 영향 _125
CHAPTER 8 도덕정치철학이 중국의 정치체제·왕권·국법·풍속 등의 안정에 미친 영향
CHAPTER 9 요점과 결론

부 록: 유교문명에 대한 서구지식인들의 저술 _149
참고문헌 _222

목차


역주자 서문
이 책은 일본어 번역서로 처음 접했는데, 아마도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재학하고 있던 연세대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서적 ?유교대관儒敎大觀?은 참 재미있었다. 쁠뤼케의 책을 일본인 고토오 스에오(後藤末雄, 1886-1967)가 번역한 것인데, 읽다가 재미있어서 일본어 독해 실력이 변변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전긍긍하며 번역을 시도하였다(2000년 여름).
엉성한 초역본을 보면서 느낀 점은, 1784년 유럽에 이런 저술이 있었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 사회에도 선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의역을 심하게 하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고토오 스에오의 일역서를 중역하고 불어 원본은 확인하지 않은 채 세상에 내놓기가 꺼림칙하였다. 그래서 쁠뤼케가 쓴 원본을 찾아서 대조확인 작업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역주서를 출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해가 지난 뒤, 획기적으로 변화된 인터넷 환경은 ?유교대관?의 불어 원본을 찾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일본어 번역과 불어 원본을 대조하는 작업은 곧바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다시 몇 해가 더 지나서야 대조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역시 일본인들의 의역은 참으로 놀라울 만큼 대단하다고 느꼈다. 원문의 취지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번역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일어번역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얼마간 참조하면서도 새롭게 시도한다는 마음으로 불어 원본에 대한 번역에 매달렸다. 쁠뤼케의 저술에 대한 일어번역 ?유교대관?을 초역한 지 한참 지난 시기였다(2015년 여름). 이후 틈틈이 다듬고 고쳐서, 읽기 쉽도록 하려고 애썼으나 얼마나 잘 다듬었는지 자신하기는 망설여진다.
이 책을 반드시 세상에 선보여야 하겠다는 의지를 왜 갖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우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 밑을 위협하기 때문에 내 앞길을 질질 끌려 다니는 그런 한심한 인생을 살아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즉, 무치武治와 문치文治의 대비를 말하는 것인데, 프랑스왕립대학 교수를 지낸 쁠뤼케는 당시 유통되고 있던 유교경전, 중국의 역사서, 학문·예술·제도·문물에 대한 개설서 등 유교문명권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한 결과 유럽의 고질적인 무치 질서를 문치의 질서로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일방적 강요가 아닌 타협, 동의를 구하는 집요한 설득, 함께 같이 가고 싶은 의욕을 끄집어내려는 노력 등이 쁠뤼케의 생존 당시 서구사회에 부재했던 아쉬운 점이었기에 그는 이 책으로써 그런 세상을 새롭게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국 내지 유교문명을 매우 이상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역주서를 읽는 독자들은 그를 부정확한 동방의 지식으로 당시 유럽사회를 현혹한 별종의 인물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역주자로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쁠뤼케가 중국과 유교문명에 대해 바르고 확실하게 파악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가 왜 중국을 빗대어 당시 유럽사회의 정화를 기원했느냐는 점이다. 저들 유럽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무엇이 아쉬워서 지구 반대편 이역만리의 생소하기 짝이 없는 외재문명을 모범으로 삼고 본받음으로써 자기정화를 도모했는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아는 유럽사회, 인류문명을 선도해 왔고 우리 사회를 개선해 줄 만한 모범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유럽문명의 속내를 과연 우리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쁠뤼케의 저술을 접하는 의의는 충분하다.
이 저술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들이 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고 여겼던 막연한 추정이 사실이 아니라 착각은 아니었는지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누굴 미개하다고 규정하는 것이냐!” 하고 저들을 야단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저들 지식인의 저술 안에 있다.
고려로 통일왕조를 이루고 복잡다기한 조정과정을 거쳐 조선조를 개창한 다음 사병을 혁파하고 훈민정음을 내놓는 등 우리는 매우 건실한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려조로 통일한 이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우리 선조들은 외부세력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은 있으나 주변을 침범하고 약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바르고 정확하게 헤아리는 사람은 접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 역주서를 반드시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 우리 삶에 무지(ignorance)만큼 위협적인 것은 없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다.
무지!
인간성을 갉아먹고 파괴하고 스스로 짐승만도 못한 짓을 자행하게 되는 발단은 바로 무지이다.
무지를 씻고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 데에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저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있다면, 그들한테 우리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런 문화의 소통에 대하여 참으로 무심한 시대가 20세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만한 편견의 시대! 미개와 개화, 선진과 후진, 야만과 문명 등을 가르면서 세상을 휘저었던 세력이 누구였던가? 오히려 미개하고 야만스럽고 후진적인 미련한 족속들이 벌인 광란의 춤판에 우리가 휩쓸려왔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상기의 질문에 대해 이런 저런 평가를 내릴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 원인은 단순하다.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이다.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에 대한 무지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인류문명사에서 20세기 100년만큼 인류를 건방지게 만든 시대는 없다. 이전 시대를 자신 시대의 논리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혹평까지 서슴지 않는 오만함! 이런 건방진 인류의 모습이 오늘날 평범한 필부필부의 꼴이다. 이런 추세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하다. 이 모두 인류가 무지함을 깨닫지 못한 탓에 빚어지는 일이다.
독자들이 이 역주서를 보면, 인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삶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막연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과연 이게 사실일까?” 하고 이 책의 내용을 수용하기 주저하거나 외면 또는 거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확한 앎! 즉, 바르고 확실한 앎을 추구하는 것은 학문의 영역과 특성을 불문하고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인 사항이다. 여태껏 모르고 있었거나 애매하게 헤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제 그것을 바르고 명백히 알면 된다. 그런데 그걸 알아야 한다는 의욕을 불지를 방도가 오로지 “모르고 있다”는 ?무지?를 극명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는 게 통탄스럽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앎의 시작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잠시 어지럽고 음산한 세상사로 눈길을 돌려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도발을 일삼는다는 북한뿐만 아니라,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대한민국, 나아가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각국의 군사적 동향을 보면, 참으로 무도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류 자신에 대한 반역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각국의 지도자든 관원들이든 그 사회의 일반인이든.
이런 현상 역시 무지의 소산이다. 이제, 쁠뤼케가 유럽사회의 정화를 위해 동방의 도덕정치에 의지하여 과감히 꺼내 든 몇몇 언설들을 다시 살펴보며 동·서 간을 막론하고 뼈저린 얘기를 해보자.

전쟁을 결의할 때나 전투가 임박한 시점이야말로 인간애로써 유혈사태를 피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해야 할 순간이다. 또한 적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로 되돌아가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만약 (외교적) 설득의 방도로써 성공할 수 없다면, 적으로 하여금 전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술책이나 계략을 써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한반도에는 늘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언설을 접하며 살아왔다. 북한 정권이 마구 도발하고 있는 탓이란다. 만약 인류가 전쟁을 결의할 시점이 임박한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이때야말로 “적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로 되돌아가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때”이다. 230여 년 전에 서구의 지식인이 동방의 도덕정치철학을 흠모하여 그린 문명론(文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논의)을 빌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안타깝다. 쁠뤼케의 이 강론에 의하면, 적이든 누구든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려면 생필품의 확보가 핵심적 사안이다! 압박과 제재로써 도발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국제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강대국의 위정자들은 그 생필품 확보를 저지하거나 봉쇄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우겨왔다.
이런 무도한 짓은 적으로 하여금 항복하기는커녕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불사항전의 분노만을 자극하고 키울 뿐이다. 이른바 강대국에는 온 세상 모든 인민을 저들의 적으로 만들어도 버틸 수 있다고 믿을 만큼 강력하다고 판단하는 세력이 많은 모양이다.

인류에게 그리고 이성과 덕성의 증진에 (무장하고 있다고 해서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이런 그릇된 생각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이런 오해로부터 보호한 것은 중국 도덕정치의 가장 다행스러운 좋은 결과 중의 하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력으로 온 세상을 겁박할 수 있다는 시도의 무모함! 쁠뤼케는 당시 유럽사회의 내력, 즉 도무지 감내하기 어려운 현상을 유럽의 역사에서 목격한 나머지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총칼을 앞세웠으니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따른 무도한 현상! 이걸 바로 잡자는 것이다. 서방세계는 쁠뤼케의 염원과는 달리 무수한 전란을 겪으며 고난에 시달렸으면서도, 이런 현상을 무도하다고 여기는 것 같지 않다. 또한 정작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이런 교훈을 쁠뤼케한테 주었던 중국의 행보에 있다. 중국은 왜 미국에 버금가면 아쉽다 싶을 정도로 미사일, 핵폭탄, 스텔스 전폭기, 항공모함, 우주선 등의 개발과 양산에 몰두하는가? 지금 우주선 지구호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공룡 하나가 설치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다! 좌초하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이 광란의 춤판에 중국은 물론 러시아나 일본도 가세하고 있고, 거기다가 대한민국까지 거들고 있는 게 현재의 시국 아닌가?

유교의 도덕정치는, ‘정복’이라고 알려진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할 야망,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유혈사태를 개의치 않는 야망의 제어를 추구한다.

서구사회에서 정복왕 하면 알렉산더를 꼽는다. “정복의 왕”이라! 분명 긍정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쁠뤼케는 정복을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할 야망”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어되어야 하고, 유교의 도덕정치가 그 제어를 추구한다고 했다. 그런데 작금 중국의 정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싶다. 강대국이라 칭하는 몇몇 국가들이 이 야망에서 빗겨 서 있는가 또는 그 야망을 제어하고 있는가? 정복을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할 야망”이라고 표현한 쁠뤼케의 언설을 부정할 리 없는 21세기 인사들이 벌이는 일이기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이성과 정의와 인간애의 법을 따를 때에만 자신을 존중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통치자와 백성들을 가르치는 도덕정치는, 통치자나 백성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하며, 사람들 제각기 자기 거주지에 정착하도록 한다. 만약 이런 도덕정치가 전 인류에게 펼쳐진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든 항구적인 평화가 실현될 것이다.

행복을 위한 무력행사! 여태껏 언제 누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1419년(세종1년) 감행한 대마도정벌이 그것이다. 이 군사행동은 왜구의 소굴을 소탕한 것으로 끝났고, 그 지역을 약탈하지도 점령하지도 않았다. 그 이후 대마도주의 중간자적 역할에 의해 조-일 관계는 스마트한 조공관계로 이어져서, 조선과 일본은 서로 필요한 물자를 주고받는 좋은 상대자 역할을 하였다. 이런 사대사소事大事小 교린외교질서를 무너뜨린 도발이 임진왜란이었다. 쁠뤼케가 말한 “이 세상 어디에든 항구적인 평화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망동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의 영웅담이라든가 선조의 치졸함 또는 조선 의병의 활약상 등으로 포장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전란이야말로 유교문명권을 뒤흔든 반역적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실현될 항구적인 평화”를 짓밟은 도발! 이로써 일본은 유교문명권의 일원으로부터 스스로 퇴출해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체제의 본질과 장점에 대한 식견을 갖춘 중국인들은, 통치자가 자기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는 결코 정치체제 때문에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통치자의 무지와 악덕 또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세상의 일을 그르치는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다. 무지하거나 덕망이 없거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게 그리 어려운가? 인류의 역사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이런 사실을 아는 게 어렵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에게 적이 되고 공공선에 적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통치자의 적이다.

군사력 강화와 군비경쟁을 일삼고 있는 국가 지도자에게 적이 되는 것은 이 무도한 경쟁에 뛰어든 다른 나라가 아니다. 제 나라의 국민을 시달리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지향점인 공공선을 외면하거나 배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호전적 행보를 멈출 줄 모르는 몇몇 국가지도자의 군국주의적 행보에 대해서 그들에게만 미심쩍은 시선을 돌린다면 그것은 단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이 지구상의 어떤 나라 지도자이든 위에 소개한 쁠뤼케의 언명에서 비껴 갈 수 없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거나 타박을 할 때 잊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일본의 평범한 인민들도 역시 몹시도 괴로운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든, 그곳의 지도자한테 주문하길 주변국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하기 이전에, “제발 네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의 인민을 평안하게 보전하라!”고 꾸짖을 줄 알아야 한다. 제 나라 인민을 괴롭게 하는 짓을 지도자가 나서서 저지른다면 그게 정녕 지도자이겠는가? 국민의 적, 공공선의 적을 잔뜩 쌓아 놓고서, 통치자로서 뭔가 이루어 내겠다는 뻔한 거짓말을 일삼지 말고 통치자의 적이 진정 무엇인지 제대로 헤아리라고 촉구하려면, 대중이 바보 같은 인민으로 남아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따라서 이런 정치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에서는, 통치자가 불의·악덕·폭정을 일삼아서 국민에 대해 더 이상 아비의 심정을 갖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판단하게 되고, 적군이나 갖는 부당하고 포학하며 잔인한 감정, 국민의 불행에 무감각한 감정을 통치자가 품게 되었다고 판단하게 될 때라야만 혁명이 발발한다.

쁠뤼케는 이 책을 출간한 1784년에 향후 닥치게 될 격랑의 사태를 예감하고 이런 언급을 했던 것일까? 5년 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자신의 정치적 위상, 현재 발휘하고 있는 통치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불의·악덕·폭정의 통치권을 거부하거나 박탈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즉, 얼마든지 또다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모른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렇게 사연을 늘어놓고 보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의 통치자 선택 기준은 이렇다. 범민凡民이 알 수 없는 것을 얼마나 많이 알고 헤아리는 인사를 통치자로 선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인사를 어떻게 하면 기피할 것이냐?
앞서 소개한 쁠뤼케의 언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서 혁명까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무지한 대중으로 남지 않을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바로 바르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에 있다!
내 나라를 위한, 내 나라에 의한, 내 나라만의 세상을 모색하는 것, 그것은 분명 무도한 짓입니다. 이런 짓을 기피하는 데에 머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만의 지구를 모색하길 멈추어야만, 인류는 이 지구상에 빌붙어 살 수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편파성뿐만 아니라 인류만의 종적 편향성마저도 벗어던지고 추구하는 존속과 번영, 뭇 생명의 지속과 전승, 공존共存·공영共榮의 길을 모색하도록 도울 좋은 가르침과 배움의 길에 이 서툰 역주서가 한 치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230여 년 전 쁠뤼케가 이 책을 쓰면서 꾼 꿈, 그리고 그 책을 번역한 본 역주자의 기대와 예감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허황되다고 간주할지도 모를 이런 염원을 고집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제발! 국적·종교·민족·직업·나이 등을 불문하고 서로 해치지 않고 서로 돕는 그런 고운 세상을 이루고 삽시다. 그렇게 살자고 가르치고 배우면, 그렇게 되는데 ··· !
230여 년 전,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왕립대학 교수를 지낸 인물이 가졌던 소망은 21세기를 사는 저의 소망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동쪽이고 서쪽이고 옛날이고 지금이고 그리 크게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바랄 만한 것은 저들도 원했고, 저들이 기피할 만한 것은 우리도 싫어했습니다.
이게 제가 이 책을 번역한 이유입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
한반도 통일이 곧 온 세상과 인류의 평화·안녕의 징표가 될 것임을 예감하며 ···

2018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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