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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최재천의 오늘
저자 : 최재천
출판사 : 이음
출판년 : 20240626
ISBN : 9791190944878
책소개
이 책은 13년간 연재한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중 365개의 글을 가르고 고른 것입니다. 제목처럼 자연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성찰도 있지만, 누누이 관심을 쏟은 교육, 정치, 독서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날의 날씨, 기념일, 추억, 대화, 노래, 시 등 기존 책에서는 보기 힘든 최재천 개인의 삶도 담뿍 묻어 있습니다. 선생의 13년을 누군가의 1년치 일기처럼 보여 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날의 기념일을 한켠에 적었습니다. 한 글이 한 면에 들어가도록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차례가 없습니다. 날짜가 곧 차례입니다. 비타민 같은 선생의 글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복용하도록 꾸렸습니다. 매일 한 장씩만 넘기면 충분한 일력처럼, 365일이 지나면 자연히 건강해지게요. 처음 공개되는 40여 개의 사진, 메모로 지금의 최재천을 만든 흔적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에요.
목차
자신은 물론 다른 생명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되면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심성이다. 이 세상에 사랑처럼 전염성이 강한 질병은 없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행동하게 된다.
--- p.129 「2월 26일, 배움과 나눔」중에서
나는 호칭이 퍽 많은 사람이다. 생태학자, 진화생물학자, 동물행동학자, 사회생물학자, 심지어는 통섭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전공이 뭐냐 물으면 나는 종종 ‘관찰(觀察)’이라고 답한다. 그런 내가 평생 인간이라는 동물을 관찰하여 얻은 결론이 하나 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하면서 굶어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떼돈을 벌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을 죽으라고 열심히 하면서 굶어 죽기는 불가능하다. 일단 덤벼야 한다.
--- p.349 「6월 2일, 졸업식 축사」중에서
‘긋닛’ 하면 떠오르는 문장 부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쉼표 대신 말없음표를 떠올렸다.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이 멈추자 곳곳에서 자연이 되살아나는 조짐이 보인다. 인간 없음이 야생을 되돌리고 미세 먼지도 가라앉힌다.
--- p.529 「8월 24일, 긋닛」중에서
일찍이 파스퇴르는 “응용과학이란 없다. 과학의 응용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과학은 기술로 응용되어야만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종속 학문이 아니다. 흔히 인문학은 질문하는 학문이고 기술 혹은 공학은 답을 찾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과학도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차라리 인문학이다. 시인에게 시의 효용성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라면 과학자에게도 더 이상 그의 연구가 어떻게 경제 발전에 기여할지 묻지 마라. 과학을 응용의 굴레에서 풀어 줘야 우리도 드디어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선도자(First mover)’로 탈바꿈할 수 있다. 기술로부터 과학의 독립을 선언한다.
--- p.539 「8월 29일, 과학 독립 선언」중에서
『인간의 위대한 스승들』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는 어느 동물학자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는 아프리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꺼져 가는 석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 홀연 파파야 한 무더기를 들고 침팬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침팬지는 슬그머니 파파야를 내려놓더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노을을 15분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터덜터덜 숲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땅에 내려놓은 파파야는 까맣게 잊은 채. 침팬지의 삶도 피안의 순간에는 까마득한 저 영원의 바깥으로 이어지는가? 그 순간에는 그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먹을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으리라. 가을이다.
--- p.603 「9월 28일, 석양」중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묘비명들은 대체로 심오하거나 가슴 짠한 것들이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삶을 해학으로 승화한 묘비명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생전에 ‘걸레스님’으로 불리던 중광 스님은 “에이 괜히 왔다 간다”라며 가셨단다. 일본의 선승 모리야 센얀의 묘비에는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술통 바닥이 샐지도 모르니까”라는 그의 시가 적혀 있단다. 미국의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친지들에게 자기 묘비에 “이런, 그 사람 조금 전까지도 여기 있었는데”라고 적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해학적인 묘비명 중에서 가장 압권은 개그우먼이자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미화 씨가 미리 써 둔 묘비명이다. “웃기고 자빠졌네”.
--- p.673 「10월 29일, 묘비명」중에서
통섭의 언덕에 오르려면 우선 아집의 늪에서 헤어나야 한다. 열려 있어야 어우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