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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
저자 : 리디아 데이비스
출판사 : 난다
출판년 : 20241018
ISBN : 9791194171126
책소개
스러져간 사랑, 오랜 시간 후 이를 재구성하려는 소설가
기억과 상실, 열정과 환멸에 대한 놀랍도록 상세한 해부도
“처음에는 단순히 짧은 이야기를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것이 긴 분량의 소설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과 내력을 빠짐없이 써내고 싶었다.”
『이야기의 끝』의 이름 없는 화자는 오래전 지나간 연애에 대한 기억을 소설로 재구성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매번 불확실한 스케치에 그치고 끝끝내 과거와 착각은 분간되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복원하려는 글쓰기, 이 두 가지 궤적은 서로 얽혀들며 기억이 어떻게 지나간 사랑의 고통스러운 지형을 보존하고 변형하는지를 그린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짧은 ‘이야기(story)’ 형식으로 독창적인 목소리를 보여주며 미국 문단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한 작가이다. 『이야기의 끝』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원래 이 소설을 짧은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형식을 확장한 사례로 언급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기존에 짧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던 특유의 따끔한 유머와 간결한 문체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다.
목차
이것이 이야기의 끝인 것 같았고, 잠시나마 긴 소설의 끝이기도 했다. 그 씁쓸한 차 한잔에는 아주 최종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이야기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차를 시작 부분에 놓아보았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 이어가려면 끝을 먼저 말해야 할 것처럼. 누가 이 소설에 대해 물으면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대답한다.
--- pp.16~17
그 첫날 저녁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아 있고, 내 옆에도, 그의 옆에도 친구들이 앉아 있던 저녁. 공연의 소음이 커서 아무도 대화할 수 없던 저녁.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그때가 왜인지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가 나를 떠난 후, 시작은 이후 찾아올 무수히 많은 행복의 처음만이 아니라 끝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날 저녁, 나를 거의 알지 못하던 그가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던 공간의 공기에까지 이미 끝이 퍼져들어가 있던 것처럼. 그 공간의 벽이 이미 끝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처럼.
--- pp.31~32
소설 속에서 그를 뭐라고 부르고 나 자신은 뭐라고 부를지 오랫동안 정하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의 실제 이름처럼 단 한 음절로 이루어진 영어 이름이었지만, 알맞은 이름을 찾다보니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겪는 아이러니에 부딪혔다. 원래의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어는 원래 단어 그 자체뿐이었다.
--- p.50
그가 열두 살이나 어리다는 생각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내가 그와 있기 위해 그 12년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나와 있기 위해 그 시간을 앞질러 오는 것인지, 내가 그의 미래인지, 아니면 그가 나의 과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은 내가 오래전에 했던 경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p.98~99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상상해봤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될 테니까,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는 와중에도 미래에서 지금을 돌아보는 걸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현재와 나 사이에 거리를 두었고 비로소 현재를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 p.260
나는 스스로를 딱히 여자로 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성별을 딱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음식점에서 샌들을 신은 채로 의자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고 앉아 있는데 한 낯선 남자가 와서 말을 걸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잠시 후 나가는 길에 내 앞을 지나가며 몸을 숙여 맨발의 발가락을 만졌다. 충격에 사로잡힌 그 순간, 나는 존재의 한 방식에서 튕겨나가 다른 방식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내가 존재하던 방식으로 돌아왔을 때도 예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