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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밀 (최진영 산문)
어떤 비밀 (최진영 산문)
저자 : 최진영
출판사 : 난다
출판년 : 2024
ISBN : 9791194171140

책소개


“나는 미움을 미뤘습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요.”

절기 편지를 시작하기까지 이십 년 걸렸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들은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우리는 만났다

『구의 증명』의 소설가 최진영, 그가 쓴 모든 소설의 ‘비밀’이 담긴 첫 산문집 『어떤 비밀』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경칩에서 우수까지 24절기에 띄우는 편지를 완성하고 각각의 편지에 산문을 더해 꾸렸다. 잔잔한 금능 바다와 넓은 창으로 바라보이는 비양도가 있는 제주 서쪽 옹포리, 그곳의 아담한 로스터리 카페 ‘무한의 서’를 운영하는 연인에게 힘을 보태고 싶어 소설가 최진영은 절기마다 편지를 써서 찾아오는 이에게 전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절기의 흐름을 알아야 하고, 그걸 ‘철을 안다’고 표현했으니 절기를 안다는 건 곧 어른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어른은 어떻게 되는 걸까(한로, 237쪽). 겪어야 할 일은 모두 겪어야 하고 오래 잠을 자더라도 하루를 건너뛸 수는 없고, 그 시간만큼 고통은 미뤄질 뿐일 때. 그렇게 겨울을 품고 견뎌냈기에 오늘의 내가 보통의 하루를 선물받았다는 걸(소한, 331쪽) 작가는 이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오해와 외로움, 착각과 편견, 미움과 그리움, 슬픔과 어리석음, 상처와 회복, 나와 당신, 그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작가의 말」, 16쪽). “당신이 아플 때 나는 왜 아플까. 그 통증이 왜 내 것 같을까.”(소한, 335쪽) 사랑은,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는 게 좋은 것.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면 잘하고 싶은 것(소서, 152쪽).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을 다양하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우수, 376쪽)일 때 풍경은 늘 같은 자리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우수, 382쪽)는 비밀을 이 책은 넌지시 건넨다. 작가는 묻는다. 지난여름, 당신은 어떤 기억을 새로 가지게 되었느냐고. 청명한 가을이 이어질 때면 궁금해진다. 지난여름의 폭우는, 건천을 가득 채우던 빗물은 어디쯤 갔을까(상강, 248쪽). 먼 훗날 당신이 문득 미소 지으며 “그해 여름 기억나?” 하고 물어볼 때 우리의 표정이 닮아 있다면 좋겠다고(백로, 204쪽). 잘 지냈어? 묻는 다정한 그 인사를 오래 그리워하는 마음(「작가의 말」, 17쪽)으로 편지를 띄운다.



목차


어느 날 나는 귀순이에게 종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엄마, 여기에 나무랑 집이랑 사람을 그려봐.
심리학 수업에서 HTP검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귀순이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라.
그림을 왜 못 그려. 애들도 다 그리는데. 여기에 나무랑 집이랑……
나는 그림을 그려본 적 없어.
그 말이 진심이란 걸 귀순이의 표정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깨달았다. 열네 살부터 공장에서 주야간 교대로 일해온 삶의 진짜 의미를. 이전까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귀순이의 삶은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안다고, 많이 들었다고 생각할 뿐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는 타인의 이야기. 1950년대에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자기 몫의 도화지나 크레파스가 있었을까? 연필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귀순이는 그림을 그려본 적 없다. 아무도 귀순이에게 너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청한 적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 큰 딸이 느닷없이 종이를 들이밀며 나무를 그려보라고 한 것이다. 그 무렵 귀순이는 갱년기였고 나는 기나긴 사춘기의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 pp.97~98 「귀순이, 사랑하는 나의 엄마」중에서

나의 중심에는 폭발하기 직전의 용암 같은 사랑이 있다. 내 생애 최초로 생겨난 사랑이기에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고 순진하며 무겁다. 그 사랑이 너무 깜깜해 때로는 모든 걸 엄마 탓으로 돌렸다. 감당하기 버거워서 사랑일 리 없다고 부정했다. 그 마음만 없앨 수가 없어서 나를 없애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무게중심. 그 사랑이 가장 아래에 단단하게 있어서 쓰러졌다가도 일어났다. 나에게도 버티는 힘이 있다면 그건 엄마가 내게 먼저 보여준 힘. 나의 사랑이 폭발한다면 바닥부터 솟구칠 것이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장 늦게 드러나 제일 오래 흐를 것이다. 살면서 사랑을 부지런히 모았다. 지금 내겐 사랑이 있다. 이제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이젠 내가 엄마를 사랑할 수 있다.
--- p.100 「귀순이, 사랑하는 나의 엄마」중에서

당신이 멋있는 말이나 훌륭한 행동을 할 때, 많은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때, 성취하고 성공했을 때 당신은 아름답다. 빛난다. 그때 당신 곁에 나는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 사랑은 없어도 괜찮다. 당신의 쓸쓸한 옆모습, 힘없는 뒷모습, 저기 홀로 걸어가는 당신, 웅크린 어깨, 당신이 나약할 때, 맞서지 못하고 물러설 때, 홀로 울 때, 가만히 한숨 쉴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외로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슬프다. 당신 옆에 있고 싶다. 충분히 혼자였던 당신이 비로소 시선을 옮길 때 그 자리에 내가 있고 싶다.
--- pp.141~142 「나의 사랑은 불수의근」중에서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구의 증명』을 쓰기 시작했다. 쓰면서 알아보자 생각했다. 담에게 몰입하여 구를 사랑했다. 그들을 사로잡은 감정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광기인지 연민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헤어질 수 없는 마음만을 생각했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담은 말한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내가 쓴 문장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담을 따라가다 만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쓴 다음 나는 항복했다. 이전까지는 사랑하면서 행복해지려고 했다. 이후에는 불행을 함께 껴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담이 내게 알려준 사랑.
--- p.245 「비가 오면 한 사람의 어깨만 젖는다」중에서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마음속 작은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거울은 어른의 얼굴을 모두 담지 못하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의 일부를 보며 물어봅니다.
누구일까.

누가 내 마음에 몰래 살고 있어 이토록 나를 못 견디게 하나.
거울이 말해줍니다.
아이에게는 자기를 사랑하는 둥그렇고 단단한 힘이 있었지.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 힘이 다 녹아버린 거야.
그래서 자꾸만 사랑을 원하는 거야.
스스로 다시 사랑해보려고.
--- p.295 「대설의 편지」중에서

내가 어린이였을 때, 외할머니는 초등학교 근처에서 노점을 했다. 리어카에 화구 두 개를 달아서 쥐포와 핫도그를 튀기고 어묵을 끓여 팔았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외할머니를 찾아가 쥐포 부스러기나 핫도그를 받아먹었다. 할머니 옆에 앉아서 바라보던 풍기의 오거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리어카 가득했던 기름 냄새와 돌돌 말아 튀긴 쥐포의 맛도. 그때 할머니 머리카락은 검었다.
--- p.306 「나의 가장 오래된 단 한 사람」중에서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봅니다.
--- pp.344~345 「대한의 편지」중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제주까지 온 날, 밤늦게까지 즐겁게 어울리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하면서 나는 그에게 문자를 남긴다. 이제 집으로 가. 바로 답장이 온다. 마중 나갈게. 다정한 사람들과 봄날의 밤길을 걷는다. 그들이 묵는 호텔 앞에 금세 닿고, 그들은 그를 만날 때까지 계속 걷자고 한다. 우리는 좀더 걷는다. 맞은편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그가 보인다. 밤 깊어 길은 어둡고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본다. 다정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기 그가 오고 있어요. 멀리서, 그가 손을 흔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그가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에야 사람들은 그를 알아본다. 나는 이상한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아주 멀리서도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너를 보지 못할 때도 나는 널 볼 수 있어.

먼 훗날에도 알아보겠지.
나비가 되어도.
꽃으로 피어나도.
바람으로 잠시 머물러도.
어둠 속에서 한없이 멀어지는 별이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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