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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하는 하루 (데니스 킨로의 365일 묵상집)
저자 : 데니스 F. 킨로
출판사 : 웨슬리르네상스
출판년 : 20221231
ISBN : 9791196608491
책소개
그동안 해외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국내에는 감추어진 보물과도 같았던 이 책을 번역, 출판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역자는 개인적으로 애즈베리 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데니스 킨로 박사님의 명성과 길 건너 애즈베리 대학의 부흥 이야기를 들었고, 그 대학이 많은 선교사와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하는 최고의 기독교 명문 대학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역자가 직접 가족과 함께 수년간 이 묵상집을 가정예배에 활용하면서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묵상집은 쉽고 간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많은 수고의 손길을 통해 이 단권에, 5년간 애즈베리 신학대학원 교수로서, 18년간 애즈베리 대학 총장으로서, 또 평생 성결 캠프집회 강사로서 저자 킨로 박사가 가르치고 선포한 메시지를 압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신학자가 평이한 언어로 전하는 깊이 있는 신학, 그가 교제를 나누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생한 간증, 죄인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한 증언이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이제 국내 독자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자 데니스 킨로의 묵상집을 통해 깊고도 맑은 은혜와 진리의 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묵상집을 개인 경건시간(QT) 묵상자료 또는 가정예배용 묵상집, 목회자의 설교자료, 교회의 소그룹모임 묵상 나눔을 위한 교재, 중고등부 또는 청소회 모임용 교재, 교회의 직분자 선물, 또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또는 그 외 개인 선물용으로 활용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목차
1월 7일,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하기
시편 48: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히브리어에서 미래는 사람의 앞이 아니라 뒤에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미래를 향해 당당히 걷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더듬거리며 뒷걸음질해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는 볼 수 있어도 미래는 볼 수 없기에, 정확히 우리의 발이 어느 곳에 닿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함께 미래도 볼 수 있으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손을 잡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시간의 장벽을 초월하는 분이시며, 어제와 오늘의 주님이신 것처럼 내일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각 발걸음이 어디로 갈지 정확히 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은 결코 비이성적인 일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고려한다면, 그보다 이성적인 선택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홀로 미래로 나아가기를 택한다면 우리는 분명 파괴적인 무엇인가를 향해 뒷걸음질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당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는 압니다. 당신이 잘못된 곳에 발을 내디디려 한다면, 그분은 당신의 걸음을 멈추게 하신 후 다른 방향으로 당신을 이끄실 것입니다. 그는 자주 뒷걸음의 방향을 바꾸어 주실 것이고, 어느 순간 그분이 당신을 이끌어 오신 길을 되돌아보면, 그분이 단 한 번도 당신을 막다른 골목이나 해가 되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을 붙든 채 여정의 끝에 도달하면, “나는 단 하루도 헛되게 살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손에 당신의 손을 포개고, 그분 없이 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모든 권리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의 미래는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이 당신을 이끄실 것입니다.
2월 27일, 결혼과 성화
막 10:7-9,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7-9). 우리와 주 예수님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면,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성화되는 것은 결혼에서의 서약과 유사점이 있지 않을까요? 결혼의 세 가지 특징은 주님과의 궁극적인 사랑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첫째, 결혼은 독점적입니다. 이 특징은 십계명 중 첫째 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는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결혼 상대가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듯,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결혼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에 대한 헌신은 전적인 것입니다. 삶에서 배우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들을 결정짓는 완전한 관계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영구적인 관계입니다. 영원히 자신을 상대방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깨뜨리지 않아야 할 영구적 관계여야 합니다.
만약 사랑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러한 언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독점적이고 완전하며 영구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이 다소 두려울 수 있지만, 결혼 관계는 사람의 마음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결혼 관계에 꼭 필요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3월 3일, 눈을 밝히시는 은혜 (1)
창세기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의 눈을 밝히신 일을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이 애굽인 여종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지고 온 음식은 다 떨어졌고,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성경은 그로 인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그 물은 그들을 살리기에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자 그녀는 샘물을 보았습니다. 혹 하나님이 광야에 우물이 뚝딱 생기게 하셔서 하갈에게 보이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샘물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음에도 하갈이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역사해 눈을 밝혀 주시자, 그녀는 마치 생명과도 같았던 소중한 샘물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눈을 밝혀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녀는 결코 샘물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자산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인도하셔서 당신 스스로는 결코 알지 못하고 사용할 수 없었을 그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매일 1만 8천 명의 과부와 고아를 먹여 살리는 한 선교사님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닷물로 만들어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조수로 만들어진 호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은 같은 곳을 보면서 고아와 과부들을 먹여 살릴 논을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을 막을 둑길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비가 계속 내려 그곳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논으로 바뀌게 될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신 후, 그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기 위해 그의 눈을 열어 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가능성을 실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딘가에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할 자원도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활용할 그 자원을 보게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4월 5일, 인격적이신 하나님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고대 헬라인들의 신 이해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차이는 완전함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헬라인들에게 완전함은 불변을 뜻합니다. 그 완전함은 정적인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완전하다면 변할 수 없고, 만약 변한다면 그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정을 가진 존재라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신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사랑하지도, 고통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그것을 ‘무감성’(apatheia)이라는 용어로 표현했고, 그것이 영어의 ‘냉담함’(apathy)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헬라인들은 그 용어를 신에게 사용해, 신은 “감정도 없고, 고통도 받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와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불의에 분노하십니다. 또 그분은 근심하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헬라의 신들은 인격적이지 않은 어떤 힘이라면, 성경의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이십니다. 그분은 성부이시며, 성부이신 그분에게는 아들이신 성자(Son)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고, 이러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마음이 쓰이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까지 이끈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감정이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열정적인 사랑이시며, 그 사랑의 대상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예배해야 합니다.
6월 6일, 새 노래
대하 29:27,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노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통적 유대교와 기독교는 인류 역사의 다른 어떤 종교보다 음악을 중시해왔습니다.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시작될 때 백성들은 노래로 그것을 축하했습니다. 모세와 미리암은 애굽의 대재앙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돌아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출 15장). 드보라와 바락 역시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가나안 사람들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셨을 때 노래를 불렀습니다(삿 5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언약궤를 옮길 때는 악기와 함께 찬양대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대상 15:16-28).
노래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간 하나님 백성의 삶을 특징지었습니다. 그들은 일할 때, 놀이할 때, 사랑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할 때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배는 노래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임재는 기쁨으로 노래할 수밖에 없도록 재촉했습니다. 이는 초기 교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 옥에 갇혀 차꼬에 채워진 후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흐의 성가곡이나 헨델의 〈메시아〉, 기독교 교회의 일반적인 찬송가들만큼 기독교와 세상의 다른 종교들 사이의 차이를 더 뚜렷이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기쁨은 필연적 결과이기에, 그것은 자연히 노래로 표현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도록 내버려두면, 우리는 노래를 멈추고 침묵하게 됩니다. 오늘이 당신에게는 노래하는 날입니까?
7월 2일, 지하 감옥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스코틀랜드의 해안가에 있는 한 오래된 성에는 특별한 지하 감옥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병 감옥(bottle dungeon)으로 불립니다. 병의 목 부분은 180센티미터 길이의 수직 통로로, 사람을 빠뜨릴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수직 통로 아래에는 역삼각 모양의 지하 감옥이 있습니다. 지하 감옥은 천장의 직경이 3미터 정도 되고, 원뿔을 뒤집어놓은 듯한 비스듬한 둥근 벽은 맨 아래의 한 점으로 모입니다. 감옥은 깊이가 매우 깊어 사람은 병의 목 부분에 결코 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빠진 뒤 탈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곳 성주들은 지하 감옥에 갇힌 모든 죄수가 매우 빨리 미쳐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예외였습니다. 그 죄수는 거기에 몇 주 동안 감금되어 있었음에도 정신이 온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끌어내 비밀을 캐물었고, 그 비밀이 그가 주머니에 간직한 돌멩이 여섯 개였음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 죄수는 원형 지하 감옥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변하지 않는 기준점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이상해질 만하면, 돌멩이를 하나씩 한쪽 주머니에서 다른 쪽 주머니로 옮기면서 그 수를 세었습니다. 돌멩이는 언제나 여섯 개였습니다. 그는 자신 외부의 변하지 않는 기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악몽과도 같았을 때, 그에게는 자신 외부의 질서의 기준점이 있었고, 그것을 의존했기에 미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외부의 기준점이 없다면 우리는 방황하면서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어떤 존재와의 관계 속에 있도록 지음 받았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석이라 부르기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이 반석에 대해, 오직 그분께 마음을 고정하는 사람은 온전한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움직이지 않는 중심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분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을 움직이지 않는 중심점으로 갖게 됩니다.
9월 28일, 절기의 회복
학 2:4, 19,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상징했는데, 이는 그 이름 자체가 절기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어 ‘hag’은 절기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후로는 오랫동안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슬퍼하면서 자신들이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배하게 될 날을 꿈꾸어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직은 성전이 다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보다 자신들의 집을 세우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학개서에서는 선지자의 이름과 그가 전한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그 둘은 희망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어떻게 느꼈을지 이해하기 위해 이런 상상을 한번 해봅시다. 이는 마치 모든 기독교 교회가 두 세대 동안(약 60년-역주)이나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는 특권을 박탈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설교자를 세우신 것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을 자신들의 욕망보다 우선시한다면, 그들에게 성전과 절기들을 회복시켜주시고, 그들을 복되게 하실 하나님 자신, 곧 ‘열방의 소망’이 되시는 분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희망과 격려의 말씀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학개라는 낯선 이름을 오늘 당신의 희망의 말씀으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고집과 어리석음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려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과거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모든 좋았던 것이, 앞으로 있을 좋은 것들에 대한 약속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뜻은 선합니다!
10월 19일, 신앙의 미래적 요소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몇 년 전 나는 신앙의 어떤 요소는 신약 성경보다 구약 성경에서 더 명확히 나타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적 신앙은 단지 지적, 역사적, 주관적 요소 외에도 미래적 요소를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면 신앙은 흔들리게 됩니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덤불 곁에 서 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징표를 주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신뢰하기 원하지만, 징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징표를 주겠다. 내가 주는 징표는, 네가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온 이스라엘이 이 산, 지금 네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나를 예배하는 것이다.” 나는 모세의 마음이 나와 같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주님, 그건 내가 바라는 징표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 그 백성을 구하시기 전에 징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내가 그들을 구원해낸 후, 내가 말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징표를 줄 것이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모세는 이 믿음의 미래적 요소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신의 믿음에는 미래적 요소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 이끌게 하실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구원받을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권능을 나타내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원을 위해 일하실 것임을 신뢰합니까? 모세는 비록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갔지만,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했기에 그처럼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