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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의 반역 : 광해군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모후의 반역 : 광해군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 자료유형
- 동서단행본
- ISBN
- 9788976964458 93910 : \19800
- DDC
- 951.902-23
- 청구기호
- 951.521 ㄱ285ㅁ
- 저자명
- 계승범 , 1960- , 桂勝範
- 서명/저자
- 모후의 반역 : 광해군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 계승범 지음
- 발행사항
- 고양 : 역사비평사, 2021
- 형태사항
- 383 p. : 삽화 ; 23 cm
- 주기사항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1 세종도서 학술부문
- 주기사항
- 2021 세종도서 학술부문
- 서지주기
- 참고문헌(p. 366-373)과 색인(p. 374-383)수록
- 주제명-개인
- 광해군 조선 제15대왕 , 光海君
- 일반주제명
- 조선중기
- 일반주제명
- 조선시대
- 일반주제명
- 계축 옥사
- 일반주제명
- 인조 반정
- 일반주제명
- 조선사
- 가격
- \19800-기증
- Control Number
- bwcl:119307
- 책소개
-
적자도 장자도 아니지만 보위에 오르다
광해군을 괴롭힌 트라우마
선조와 의인왕후는 혼인한 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대군이 없으면 군이라도 하루빨리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선조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후계자 선정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선조로서도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침내 선조와 신료들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아들로, 적자도 아니고 맏아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조의 여러 왕자들 가운데 광해군은 가장 총명하고 어진 성품으로 신료들의 신망을 받았다. 왜군이 한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의사를 내비쳤으나 세자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무군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분조가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아니나 망명 계획을 세우는 선조의 행궁에 비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일조했고, 이는 국왕으로서 선조의 견제 심리를 자극했다. 선조는 전쟁 기간 중 20여 차례에 이르는 양위 소동을 벌였는데, 실제로 광해군에게 양위할 생각은 없었다. 선조의 양위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세자 광해군은 엎드려 죄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분조를 이끈다고는 하나 실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출생서열이 왕위에 오르는 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선조만 해도 명종의 적장자도 아니요,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군의 막내아들이었다. 광해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문제는 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군신 간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 자리에 오른 이상 정국의 변화에 따라 세자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 사회에서 왕세자의 지위를 튼튼하게 해주는 요소는 첫째 왕의 신임, 둘째 종법상의 정통성, 셋째 신료들의 지지, 넷째 명 황제의 책봉인데, 이 가운데 광해군은 왕의 신임과 명 황제의 책봉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세자로 있는 16년 동안 광해군은 명으로부터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책봉을 거절당했고, 선조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세자는 세자도 아니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선조의 지나친 견제와 홀대, 영창대군 탄생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유영경 등 일파가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 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험난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라는 비아냥 섞인 뭇 시선은 세자 시절을 거쳐 왕위에 오른 광해군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어머니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