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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저자 : 정민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 : 2014
ISBN : 9788954624640

책소개

사라진 ‘문예공화국’을 복원하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 공화국』. 배우며 즐기고, 즐기며 배우고자 하는 이들 모두를 위한 ‘행복한 강의’를 표방하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이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2013년 3월 6일부터 같은 해 12월 26일까지 매주 한 차례씩 연재한 내용을 엮은 것으로, 인문학 온라인 연재라는 점에서 많은 독서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은바 있다.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공통 문어인 ‘한문’을 통해 글로써 소통했다. 그 중심에 있던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과 적극적으로 만나며 그 만남을 문화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로 확장시켜나갔다.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는 하버드 대학교 옌칭도서관에서 발굴한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 동아시아의 문화 학술 교류 중에서도 우리와 중국 지식인의 교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18세기 한중 문화 교류사의 명장면을 펼쳐낸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만남이 만남을 낳고, 책이 책을 부르던
아름다운 문예공화국의 시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18세기 동아시아 지성계의 찬란한 문화지도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의 여섯번째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13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총 40회에 걸쳐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서 진행되었던 연재의 결과물이다. 열정적인 자료 탐구와 남다른 지식 생산력을 통해 펴내는 책마다 화제를 모으는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2012년 8월부터 1년간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 옌칭도서관 선본실에서 20세기 초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1879~1948)의 구장(舊藏) 도서를 다수 발견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자로서, 자신이 소장하던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까지 찾아와 100일 가까이 머물며 양도를 간청하던 소전(素?) 손재형(孫在馨)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준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청조의 고증학단에 대해 연구하던 중 청조 지식인들과 교유했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 청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를 평생 연구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전후 일본에서 생계를 위해 선친이 중국과 조선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수집한 책들을 적잖이 처분했고, 그 책들의 일부가 우여곡절 끝에 하버드 옌칭도서관으로 흘러들어왔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2006년 타계 직전 후지쓰카 지카시가 소장했던 추사 관련 자료 1만 4000여 점을 과천시에 일괄 기증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60여 년 동안 옌칭도서관 선본실 서가에 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정민 교수는 그곳에서 우연히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한 권의 책을 만난 것을 계기로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본격적으로 그의 컬렉션 발굴에 뛰어들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청조 문화의 조선 전래(傳來)를 연구했던 후지쓰카의 컬렉션을 통해 세밀하게 복원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사다.

문예공화국, 상상 속의 지적 커뮤니티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의 지식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문학자들이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매개로 편지와 책을 통해 소통하던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의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예공화국 안에서 글이 오가며 지식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싹텄고 이는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공통 문어는 고전 중국어, 즉 한문이었다. 집적 만나서는 필담을, 떨어져 있을 때는 편지로써 한중일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리고 18세기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의 중심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행사와 통신사로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 지식인 그룹과 소통하며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갔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한중 지식인 네트워크의 시초를 연 사람은 바로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이다.

홍대용, 문예공화국의 초석을 놓다

홍대용이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에 간 것은 1765년의 일이다. 그가 그곳에서 한족 지식인인 엄성(嚴誠, 1732~1767), 육비(陸飛, 1719~?), 반정균(潘庭筠, 1742~?)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은 유명한 일화는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홍대용과 엄성의 우정은 엄성이 홍대용과 만나고 불과 몇 년 후 풍토병에 걸려 홍대용이 선물한 먹을 가슴에 품고 그 향을 맡으며 죽었다고 하여 무척 유명하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 지카시가 자신의 전용 원고지에 베껴 쓴 엄성의 『철교전집鐵橋全集』과 엄성, 육비, 반정균 세 사람의 향시(鄕試) 답안지를 따로 모아 묶은 『절강향시주권浙江?試?卷』을 우연히 발견하며 조선과 청조 지식인의 교류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홍대용은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연행 기록은 『담헌일기湛軒日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항전척독抗傳尺讀』 등 이른바 ‘연행 3부작’으로 남았다. 홍대용이 연행에서 돌아와 내놓은 연행 기록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덕무, 박제가 등 연암 그룹의 후배들은 홍대용이 북경에서 그곳 문인들과 천애지기를 맺고 돌아온 일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언젠가 중국의 지식인들과 만나 역량을 펼쳐 보이고 그들과 우정을 맺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엄연한 국시(國是)는 북벌(北伐)이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청나라에 대한 조선 주류 지식인들의 반감은 청이 들어선 지 100년 넘은 당시에도 여전히 완고했다. 홍대용이 선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빡빡머리’ 한족 거인(擧人)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글로 써내기까지 한 데 대해 노장 학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홍대용은 특히 스승 김원행(金元行)의 동문인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날선 비판을 받아야 했다. 김종후는 청나라를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이라 일컬으며 애초부터 홍대용의 연행을 반대했었다. 홍대용은 망한 지 100년이 넘은 명에 대한 의리를 들어 새로운 왕조를 더러운 원수라 배척하는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에 숨막혀했다. 그는 청조의 한족 지식인들이 “도량이 넓고 기운이 시원스러워” 자신은 그들과 사귄 일이 부끄럽지 않으며, 더구나 청은 100년간 태평을 누리고 있다며 김종후의 예봉에 맞섰다. 논쟁은 도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주위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김종후와 홍대용 두 사람은 끝내 상대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대용의 이러한 의지는 박제가 등에게로 이어지며 북학(北學)의 기틀이 되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 퍼져나가는 만남

1776년 11월 유금(柳琴, 1741~1788)이 연행길에 올랐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네 사람의 시를 모은 『건연집巾衍集』을 들고 나섰다. 이들은 연암 그룹의 문인들로 ‘백탑시파(白塔詩派)’로 불렸다. 북경에 도착한 유금은 청 조정의 이부원외랑 이조원(李調元, 1734~1803)을 만나 『건연집』을 소개하며 서문과 비평을 부탁한다. 이조원은 홍대용이 우정을 맺은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고, 두 사람은 기꺼이 조선 문인 네 사람의 시집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각각의 시에 정성껏 비평을 써주었다. 그런데 유금이 이조원에게 접근해 만남을 가졌던 데에는 『건연집』 건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5020책을 입수해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조원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흠정고금도서집성』 거질을 조선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유금이 『건연집』에 이조원과 선배 홍대용의 벗인 반정균의 비평까지 받아서 돌아오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은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의 신실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이들은 북경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조선에서 느꼈던 그동안의 소외감과 답답함을 훌훌 털고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특히 박제가는 이조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객건연집』에 평점한 말을 보니 폐부를 찌르는 합당한 말뿐이어서 곧장 넋이 연경으로 날아가 얼굴을 뵙고 향을 사른 후 큰절을 하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778년 3월 드디어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행에 오르면서 박제가와 이조원의 만남이 성사된다. 물론 그때까지 이들은 이조원, 반정균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해묵은 물건이 중국으로 보내지고 시집들이 엮이고 책과 서신이 건네지고 건너왔다. 한 사람의 만남이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 퍼져나갔다. 만남이 만남을 부르고, 우정이 우정을 낳았다. 이렇게 터진 물꼬가 19세기 후반까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361쪽)

박제가, 문예공화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경에서 이조원의 동생 이정원(李鼎元)과 반정균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당대 북경 문단의 명류들과 연이어 만남을 가졌다. 반정균이 이덕무의 생일상을 차려주었을 만큼 이들은 무척 가깝고 깊게 교유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우연히 북경 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오가다 흔히 마주치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닌 당대 톱클래스의 명류였고, 그들이 단골로 거래한 서점은 많은 서점들 중 하나가 아니라 중국 서적사에서 손꼽는 양심적 신상(紳商)의 서점이었다. 알게 모르게 이들은 당대 문화의 핵심부에 접근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축적된 에너지가 북학의 뜨거운 열기와 만나 새로운 시대를 견인하는 힘이 되었다.” (427쪽)

두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이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외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감이 더욱 높아만 갔다. 특히 박제가의 경우 정도가 지나쳐 오만하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바람에 선배인 연암 박지원이 그에게 자중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1790년 박제가와 유득공은 2차 연행을 떠난다. 이 두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5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뛰어난 시와 글씨로 북경 문인들 사이에서 금세 명성을 얻었다. 박제가에게 시 한 수쯤 받지 못하고는 학계와 예단(藝壇)에 발조차 들이밀지 못할 정도였다. 두번째, 세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중국의 유명 지식인들과 폭넓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말 그대로 북경의 명사가 되었다. 기윤(紀?, 1724~1805),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 등 청대 학술계의 거목들과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이때다. 특히 1790년 8월에는 북경에서 당대 사림의 종장(宗匠)이자 예부상서였던 기윤과 박제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윤과 박제가, 유득공 두 사람의의 교류는 두 사람의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심지어 기윤은 조선 사신 편에 정조에게 편지를 보내 박제가를 “화국(華國)의 인재”라 칭찬하며 그를 다시 북경으로 파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청이 받아들여졌는지 1801년에 박제가와 유득공은 네번째 연행을 떠나 78세의 기윤과 해후한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박제가와 화가 나빙(羅聘, 1733~1799)의 만남이었다. 박제가는 나빙의 대표작 〈귀취도권鬼趣圖卷〉에 두 차례나 제발(題跋)을 남길 만큼 그와 가깝게 지냈고, 나빙 또한 박제가와 유득공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만큼 그들을 마음속 깊이 좋아했다. 이 책의 표지 그림과 글씨가 바로 나빙이 박제가를 위해 그리고 써준 초상화와 시다.

삼천 리 밖의 사람 서로 마주하여서 相對三千里外人
좋은 선비 만남 기뻐 그 모습을 그려보네. 欣逢佳士寫來?
그대의 미쁜 운치 무엇에다 비할거나 愛君??將何比
매화 변해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知是梅花化作身

어인 일 그댈 만나 문득 친해졌더니 何事逢君便與親
날 떠난단 말 들으니 그 얘기 시고 맵다. 忽聞別我話酸辛
이제부턴 가사(佳士) 봐도 그저 담담하리니 從今淡漠看佳士
이별 정이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일세. 唯有離情最愴神

이 초상화와 시의 원본은 후지쓰가 지카시가 소장했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개인 수장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것은 후지쓰카가 촬영해둔 유리 건판 사진이다.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실질적인 주인공 박제가는 네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뒤 대비 김씨와 심환지(沈煥之) 비방 벽보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형장을 받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5년 한양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인 4월 2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홍대용이 기틀을 다지고 박제가가 선봉에 서서 이룩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그렇게 마감되고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1791년 박제가가 나빙에게 선물한 갓을 쓰고 반정균이 낙향할 때 한 시대의 문이 스르르 닫혔다. 1801년 진전이 오류거 서점의 안뜰에서 박제가의 갓을 빌려 쓰고 기뻐하며 서성일 때 한 시대의 문이 다시 열렸다. 박제가가 네 차례의 연행에서 쌓았던 인맥은 8년 뒤인 1809년 10월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길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수행한 24세의 청년 김정희(金正喜)에게 고스란히 인계되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가 마감되고 19세기 문예공화국의 화려한 서막이 열렸다.” (649쪽)

후지쓰카 지카시, 몸으로 하는 공부

이 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인물 후지쓰카 지카시는 일본에서는 주로 우편을 통해 북경 유리창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그러다가 1921~1923년 북경 주재 해외 연구자로 파견 생활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유리창의 고서점에서 본격적으로 청대의 원간본(原刊本) 서적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북경에서 수집한 청대 원간본은 수만 권에 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지쓰카는 조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또한 당시 일본 학자들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을 빼고 나면 조선 500년 문화에는 남는 게 없다며 대놓고 조선을 무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잠시 서울에 들러 경학원(經學院)과 규장각 도서관, 총독부와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 등을 둘러본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조선을 청조학의 본질로 들어가는 우주정거장과 같은 위치로 규정”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지쓰카가 194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조선에서 수집한 것은 서적 수천 권, 서간, 서화, 탁본 1000여 점이나 된다. 그는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으로 청조 문화가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악착같이 모아나갔다. 그 가운데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은 국보급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은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 대학의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도쿄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의 자택 방공호(이 방공호는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이 만들어주고 온 것이다)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만 천행으로 살아남았다. 후지쓰카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그의 컬렉션을 한 권 한 권 발견하여 검토할 때마다 그의 방대한 독서와 꼼꼼한 메모에 감탄을 거듭했다. 후지쓰카는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몸으로 공부한 학자였다.

“그의 소장서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가 확실히 쓰기보다는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읽기만도 너무 바빠서 자신이 읽은 모든 것에 대해 미처 글로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권 한 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대조하고 메모해가며 그는 철저하게 읽고 꼼꼼하게 표시했다. (…) 책 속에 남은 후지쓰카의 메모는 모두 한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의 현장이었다. 그의 그 많은 메모를 살펴보니 실제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직접 활용한 것보다는 정리만 해놓고 미처 글로 쓰지 못한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쓴 최근 우리 쪽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의 메모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80년 전에 이미 줄긋고 메모하고 정리해둔 내용을 최근의 논문들이 오히려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책은 보면 볼수록 읽는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든 손오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102~103쪽)

1년간 후지쓰카 지카시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그의 컬렉션을 통해 18세기에 우리와 중국의 지식인들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며 대를 이어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던 아름다운 광경들을 이 책에서 되살려냈다. 사방이 분쟁과 갈등뿐인 이 시대에 이 책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폭넓은 소통과 “고등한 문화 교류” 나아가 상생과 화해의 한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글을 열며 004

제1화 후지쓰카 컬렉션과의 첫 만남 _망한려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철교전집』 016
‘추사 글씨 귀향전’에서 만난 후지쓰카 | 검색 엔진에서 찾은 엄성이란 이름 | 망한려 전용 원고지 | 『철교전집』에 실린 조선인의 초상화

제2화 『절강향시주권』에 얽힌 사연 027
세 사람의 답안지 모음 | 첫 만남의 광경 | 그림으로 남은 우정 | 『묵림금화』에서 만난 뜻밖의 후일담

제3화 가을바람에 통곡하노라 _엄성과 홍대용의 뒷이야기 045
오늘을 영원히 잊지 말자 | 엄성의 돌연한 죽음 | 10년 만에 도착한 주문조의 편지 | 엄성의 초상화

제4화 조선에만 남은 실물 _항주 세 선비 관련 기록과 서화 작품 060
격렬한 감정의 쏠림 | 새로 찾은 기록과 엄성의 그림 | 육비, 남은 글씨와 그림조차 없다 | 반정균, 불교에 귀의하다

제5화 쏟아지는 자료들 _엄성과 홍대용의 뒷이야기 076
키워드는 망한려! | 하루에 찾은 8종의 책 | 왕용보의 『술학』 원고지에 옮겨 쓴 5종의 책 | 왕용보란 인물

제6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사람 _후지쓰카론 091
하버드 옌칭 강연 | 교실의 후지쓰카, 『논어』 수업의 광경 | 빨간 펜 선생의 메모벽 | 툭하면 샛길로 빠지다

제7화 조선에는 학문이 없다 _후지쓰카의 자료 수집 110
학문 연원과 청대 서적 구입 | 베이징 유학과 경성제국대학 교수 부임 | 조선은 청조학의 우주정거장 |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

제8화 모든 우연은 필연이다 _핫토리 우노키치와 경성제국대학 128
『김완당 인보』에서 만난 핫토리 우노키치 | 고서 속의 은행잎 | 코즈모폴리턴의 지나학 탐구 | 동방문화사업과 핫토리 우노키치

제9화 시절 인연 _추사의 소장인이 찍힌 책과의 해후 146
선본실에 처음 들어가던 날 | 추사의 소장인이 또렷이 찍힌 책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 | 한자리에 모으다

제10화 작은 의문에서 뻗은 생각 _조선사편수회의 스탬프 165
책 속 메모와의 대화 | 추사의 말버릇 | 『해객시초』 뒷면의 스탬프 | 또다른 실마리

제11화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_홍대용과 양혼의 문시종 선물 소동 183
한림대학교박물관 특별전과 『계남척독』 | 문시종 선물 소동 | 『계남척독』에 실린 양혼의 친필 편지 | 귀국 후에 받은 세번째 편지

제12화 스쳐 엇갈린 만남 _홍대용이 만난 슬로베니아 신부 201
서양 신부 두 사람의 친필 |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 『신대영대의상지』 원본의 감동과 『의상고성』 | 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

제13화 비판과 비난의 사이 _홍대용과 김종후의 1등인 논쟁 223
회피할 수 없는 전쟁 | 그대는 1등인인가? | 하정투석, 우물 안에서 돌을 맞다 | 자기 검열의 행간

제14화 겉만 보고 판단하는 세상 _사라진 명사를 찾아서 239
논쟁의 뒤끝과 「홍덕보묘지명」 | 사라진 명사의 행방 | 반함을 거부한다 | ‘영맥유’를 조롱함

제15화 알아주는 일의 행복 _유금과 이조원의 만남 256
행장 속에 든 『사가시집』 | 이덕무의 『선귤당농소』 사건 | 석양의 방문객 | 후지쓰카 소장본 『월동황화집』

제16화 의미는 차이에서 나온다 _『월동황화집』 서문과 『고금도서집성』 275
『월동황화집』에 실린 서호수의 편지 | 둘이 처음 만난 날은 언제였나? | 편지도 버전이 다르다 | 『사고전서』와 『고금도서집성』

제17화 본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_아! 『동화필화집』 292
다시 이어지는 인연 | 아! 『동화필화집』 | 쏟아진 친필로 복원되는 사연들 | 기하실 주인의 노래

제18화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_유금의 귀국과 『한객건연집』의 청비주비 310
이필대설(以筆代舌), 붓으로 혀를 대신하다 | 이조원 초상화와 유금의 인장 3과 | 아름다운 청비주비(靑批朱批) | 일별십년(一別十年)

제19화 꿈이 심은 꿈 _찬 골짝에 돌아온 봄소식 329
유금이 돌아오던 날 | 마음을 좀체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 마냥 흘린 감격의 눈물 | 왔네 왔어!

제20화 만남은 만남을 부른다 _새롭게 이어지는 인연들 345
천하의 통쾌한 일 | 꿈만 꾸면 언제나 | 신교가 깊습니다 | 백년의 바위 같은 교분을 맺읍시다

제21화 가장 빛났던 순간에 대한 회상 _이조원 생일 시회 362
이조원 초상화의 내력 | 생일잔치 날의 풍경 | 이날을 그저 보낸 적이 없었다 | 나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제22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 _상우천고에서 천애지기로 378
동시대성의 의미를 음미함 | 우정의 풍경 | 천고를 벗삼는다는 답답한 그 말! | 소전 속의 정보들과 제2탄 『열상주선집』

제23화 꿈은 이루어진다 _이덕무와 박제가의 연행 394
금잔디밭의 작별 | 이정원과 반정균을 만나다 | 당낙우, 축덕린과의 만남, 그리고 「열상주선집서」 | 반정균이 차려준 이덕무의 생일상

제24화 한 우물을 파라 _오류거 서점 주인 도정상 412
유리창 거리의 두 사람과 서점 내부 풍경 | 이문조의 「유리창서사기」 | 오류거 서점 주인 도생 | 중국 책 속에서 찾은 도정상 관련 글

제25화 질풍노도 _그들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428
100일 붉은 꽃이 없다 | 유득공의 심양행과 반쪽 연행 | 새벽녘의 그리움 |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제26화 나를 알아줄 단 한 사람 _유리창 거리에 서서 연암이 한 생각 444
둘은 나의 문하생이오 | 선월루 서점 남쪽 골목의 두번째 집 | 유리창 거리의 사념과 급작스런 열하행 | 실낱처럼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

제27화 인간 세상의 이 같은 즐거움 _『열하일기』의 사각지대 460
기막힌 생각 절묘한 기회 | 이 좋은 밤 고운 달빛을 함께 볼 사람이 없다 | 북경에서의 한 달과 육일루 연담회 | 박명과의 만남과 연암의 외면

제28화 대지를 감도는 봄바람 _강세황의 사행과 북경 스케이트 구경 478
두 장의 청 황제 어제시 친필 인본 | 강세황의 눈에 비친 건륭제 | 강세황이 청 황제에게 올린 축하 시편과 화답시 | 빙희연의 광경

제29화 그럴까, 과연 그럴까? _후지쓰카와의 운명적 만남과 박제가의 제2차 연행 498
진전의 『간장문초』에서 만난 박제가 | 옌칭도서관 선본실의 박제가 자료 | 삼총사의 제2차 연행 | 문자당 글씨로 맺은 새 인연

제30화 가는 인연 오는 인연 _반정균의 뒷모습 516
구슬퍼 즐겁지가 않았다 | 누구신지요? | 방종한 소치입니다 | 마지막으로 나눈 반정균과의 필담

제31화 부처님 손바닥 _『호저집』 속의 메모와 〈노주설안도〉 534
『호저집』 속의 메모들 | 〈노주설안도〉 관련 메모들 | 이덕무와 유득공의 제시와 세번째 메모 | 박제가의 발문과 시

제32화 건륭 지성사의 한복판 _박제가와 기윤 551
뜻밖의 진객(珍客) | 기윤의 지우(知遇)와 오랜 교유 | 종횡무진 활약상 | 게를 삶아 먹으며 놀다

제33화 귀신을 보는 남자 _나빙의 〈귀취도권〉에 남은 박제가의 글씨 570
손님 쟁탈전 | 귀신을 보는 남자 | 다채로운 모습의 귀신들 | 〈귀취도권〉에 남은 박제가의 친필

제34화 삼천 리 밖의 사람 _나빙이 그려준 박제가의 초상화 587
나빙과 유득공의 우정 | 『치지회수첩』의 출현 | 나빙이 그려준 매화도와 박제가의 초상화 | 공협의 거처에서 열린 전별연

제35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 그림 _박제가가 그렸다는 〈연평초령의모도〉에 대하여 607
〈연평초령의모도〉 배관기(拜觀記) | 그림 속 박제가의 글씨 | 초순이 쓴 그림의 제기(題記) | 의문투성이의 결말

제36화 닫히는 한 시대, 열리는 또 한 시대 _박제가의 4차 연행과 죽음 630
기윤과의 재회 | 다시 열린 오류거 사랑방 | 진전과의 회면과 『정유고략』 | 이상한 선물 목록

제37화 벽에 걸린 종이 _후지쓰카 아키나오의 추사 관련 자료 기증기 650
겹쳐 포개지는 풍경 | 아키나오의 기증 장면 | 이제 나도 죽을 수 있다 | 부끄러운 기억

제38화 흩어진 구슬 꿰기 _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와 후지쓰카 구장서 목록 666
후지쓰카 구장서의 형태적 특징 | 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 | 분큐도 도서 목록과 일본출판무역주식회사 스티커 | 후지쓰카 구장서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제39화 기억의 흔적 _〈겸가당아집도〉의 출현 684
〈겸가당아집도〉의 돌연한 출현 | 겐카도 그룹과 연암 그룹의 만남 | 또다른 만남들 | 다시 이어지는 베세토 문화 벨트의 꿈

제40화 미완의 꿈, 문예공화국 _에필로그 703
후손 찾기 | 기록이 있었다 | 접점에서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 | 문화는 선이다

주 716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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