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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저자 : 로널드 L. 넘버스
출판사 : 뜨인돌출판사
출판년 : 2010
ISBN : 9788958073123

책소개

과학과 종교는 언제나 대립만 했을까?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 과학사와 의학사 전담 교수 로널드 L. 넘버스가 엮은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종교에 관한 과학사에 기록된 잘못된 통념 25가지를 짚어본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둘러싼 역사적 쟁점을 끄집어내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가 동지였던 시절을 감상하게 해준다. 아울러 브루노, 갈릴레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등 종교와 불화했다고 알려진 과학자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를 보는 편협한 관점과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균형적 안목을 이끌어낸다. 특히 과학과 종교에 관해 우리가 지니기 쉬운 편협한 인식을 전환시키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과학 VS 종교. 통념과 편견, 독단의 역사 파헤치기!
하버드 대학 출판부가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야심차게 내놓은 ‘과학 VS 종교’사에 관한 역작!


종교가 중세의 세계관을 장악한 이래, 과학 발전의 역사는 종교적 세계관의 점진적인 이탈과 그 궤를 같이 해왔다. 천 년이 넘게 이어져온 둘 사이의 지난한 대립 속에서 ‘진리’는 ‘진실’의 문제이기보다는 ‘선택’의 문제에 가까웠다. 제로섬 게임 같은 과학과 종교의 다툼 속에서, 역사적 사실은 호도되고 은폐되기 일쑤였다. 이 책은 중세로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교차된 진실을 찾아 파헤친 기록이다.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25명의 석학들이, 통념의 옷을 입고 어느새 ‘진실’이 되어버린 과학사의 이슈들을 끄집어내 치밀하게 논증한다. 이성과 신앙, 과학적 실재와 관념적 교리의 대립 속에서 집단의 목적에 의해 도외시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된 정보들을 복기하고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는 게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과학과 종교. 인류 문명을 관통해온 두 극점의 내밀한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밀하게 짚어본다.

하버드 대학 출판부가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야심차게 내놓은‘과학 VS 종교’사에 관한 역작!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 다윈주의와 나치 생물학, 아인슈타인의 독특한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이 책이 제시하고 입증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에 필경 매혹되고 말 것이다.” _ ≪라이브러리 저널≫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해 통사적으로 고찰한 보석 같은 책이다.”_ ≪데일리 텔레그레프≫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사에서는 과학과 종교가 오랜 싸움을 벌였고 과학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식의 서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과학사와 교회사 양쪽에서 등장한 신세대 학자들은 정파적인 목적과 입장을 떠나, 행위자의 지식과 가치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사건들을 실증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기획하고, 25명의 교수들의 글을 모아 엮은 이 책은 이러한 움직임의 성과를 모아 포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의학, 철학, 과학, 문학 등 각기 다른 전공의 교수들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거대한 통념’에 가까운 과학사의 이슈들을 선정해 논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갈릴레이의 투옥(▶ 본문 8장) , 일부 과격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곡해된 다윈의 임종 장면(▶ 본문 16장), 아인슈타인이 “우주로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그만의 신을 믿었다는 따위의 이야기(▶ 본문 21장)들과 여기에서 파생된 대중의 오해들을 명쾌히 걷어낸다. 주요 방송 매체나 학술지에서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는 인상이 여전히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오해를 걷어낼 때 우리 지식의 지평이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과학 우위의 시대에 과학과 종교가 늘 대립하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칫 식상하고 고루해 보일 수 있다. 무신론적 성향의 독자들은 종교의 역할을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 책을 친종교적이며 반시대적인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과학 발전의 역사에 종교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편견과 오해를 걸러내고 역사를 보는 균형적인 안목을 갖추자는 게 이 책의 궁극적 목표다. 창조론의 대안으로 등장한 ‘지적 설계론’이 어째서 부실한 이론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창조론의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범람을 우려하는 부분은 이 책이 종교적인 색채에 매몰되지 않고 균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25개의 소주제별로, 450여 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을 명시한 점도 기고자들의 논지와 의견이 철저히 사료에 근거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기술 본위의 시대, 과학이 역사 서술을 독점했다?
과학과 종교의‘전투적 동거’를 둘러싼 편견과 오해 파헤치기


중세 말 근대 초, 인간의 ‘이성’이 ‘신앙’을 갓 초월하기 시작한 이래 과학과 종교는 늘 서로를 견제하고 조절해왔다. 왕왕 대립각을 세울 때도 있었지만, 교회가 근대 과학의 성장을 견인하고 종교와 과학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밀월’의 풍경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따르자면, 과학사에 대한 대중의 일방적인 통념이 굳어진 시기는 19세기 후반, 무신론적 성향의 과학 저술가들이 책을 통해 대중들을 선동하면서부터다. 특히, 1874년 출간된 존 윌리엄 드레이퍼의 『과학과 종교, 그 대립의 역사』와 1896년 출간된 앤드루 딕슨 화이트의『기독교계에서 과학과 신학의 전쟁사』는 기독교 대중들의 보편적인 인식에 충격파를 던진다.(▶서문 참고) 때마침 태동한 진화론의 여파로 ‘창조주’로서의 ‘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지고, 중세에 자행되었던 ‘과학 순교’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면서 종교가 근대 과학의 성장을 억눌렀다는 통념은 고착화된다. 자연의 ‘진리’는 신의 ‘섭리’로 설명될 수 있는 범주가 아님을 다수 대중들이 수긍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코페르니쿠스, 브루노, 갈릴레오 등 근대 과학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종교의 일방적 압제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로 윤색되었다. 기술 우위의 시대, ‘과학’이 역사 서술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런 과장과 왜곡은 외려 정당성을 부여받고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책 속의 기고자들은 이와 같은 흐름에서 의도적으로 무시된 정보들을 복기하고, 우리의 통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명쾌히 짚어주고 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 브루노, 갈릴레오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근대의 ‘불운’한 과학자들은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종교와 사사건건 불화하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뒤흔들어놓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실은 교황청으로부터 천문학 연구기금을 받아 탄생한 결과물이었고(▶본문 11장), 최초의 과학 순교자로 잘 알려진 조르다노 브루노의 경우도 실은 자신을 ‘신학 교수’라고 지칭할 만큼 신실했으며, 교회가 설립한 대학의 교수로 일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애썼다. 그가 화형당한 이유는 세간에 알려진 대로 과학적 소신을 고집한 탓이라기보다는 당대에는 용납이 불가능한 새로운 신학이론을 전개한 탓이었다(▶ 본문 7장). 교황청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사례 역시 사실과 다르다. 자료에 따르자면 갈릴레오는 토스카나 공국의 대주교나 교황청의 주교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종교재판에 소환된 적은 있으나 가택연금 이상의 형벌을 받은 기록은 없다(▶ 본문 8장). 그가 고문을 받았다는 것은 갈릴레오의 일화를 극적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후대인들의 과장과 추측일 따름인 것이다.
종교와 결부된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오류와 곡해는 현대 과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스티븐 굴드 제이도 이런 곡해에 한몫을 했다. 에른스트 헤켈(독일 다윈주의의 권위자)이 주창했던 ‘생물 발생 이론’이 인종차별적 의미와 반유대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나치가 이를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굴드를 비롯한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헤켈은 외려 친유대적 성향이 강했고, 나치즘과 같은 민족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치에 의해 변질되고 악용되었을 뿐인 헤켈의 업적이,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헤켈 자신의 성향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본문 19장).
이처럼 이 책은 집단의 목적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기록된 과학사의 풍경을 짚어가며,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안목을 갖춰야 함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사를 치열했던 ‘혈투’로만 기록한 지금까지의 관점을 벗어나, ‘전투적’이었지만 ‘동거’가 가능했던 풍경을 찾아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인식 전환을 시도한 점이 돋보인다. 깊이 있는 서술로, 과학사의 각종 이슈들을 되새김질하며 과학사의 속살을 파헤치는 재미가 쏠쏠하다.

[ 책속으로 추가 ]

16세기 유럽인의 기준에 따르면,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단이었다. 그는 처녀가 잉태를 하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심했다. 그리스도가 대단히 총명한 마법사라고 생각한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모든 주요 기독교 교파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는 이 발언과 그밖에 여러 발언을 철회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16세기의 마지막 해에 로마 종교 재판소에 의해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600년 1월, 브루노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월 17일에 로마의 캄포 디 피오리Campo dei Fiori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채로 불태워졌다. 브루노의 사형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잔인하지만, 근대 초기에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반란 주동자나 중죄인들의 경우, 산 채로 내장을 끄집어내 사지를 절단한 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교수대나 다리 위에 매달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천의 등장, 곧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대중적인 글은 물론 학술적인 연구에서도 브루노의 죽음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좀 더 신중한 역사학자들은 브루노를 확실히 이단이라고 밝히지만, 이들 대부분도 그의 이단 행위를 과학적 우주론의 중요한 혁신과 연결시킨다. 특히 브루노는 우리 우주가 수많은 태양과 행성이 있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는데, 이는 훗날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와 아이작 뉴턴,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의 열린 우주론의 기초가 되는 탐구로 여겨졌다. 이런 연관성 때문에 심지어 일부에서는 브루노를 최초의 과학 순교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엄격한 신학적 교의와 자연철학 안에서의 자유로운 사색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에 불을 붙여 다가올 근대과학을 예견한 사례로 여긴 것이다. (… 중략…) 브루노는 혁신적인 자연철학자였고 그의 사상은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지만, 결국 교회는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다. 따라서 교회는 과학적 개념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한하기 위해 브루노를 죽였다는 것이다. 영생과 죄사함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핵심을 이루는 성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아 이단으로 파문을 당한 수도사 브루노는 어떻게 “세계 최초의 과학 순교자”가 되었을까?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역사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은 귀족 정부의 권위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형적인 인물로 브루노를 격상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브루노의 우주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서구 사조의 공식적인 발전에 포함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존 틴들John Tyndall, 헨리 페어필드 오즈번Henry Fairfield Osborn 같은 대중적인 작가들이 과학사에서 브루노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19세기 말엽에는 이와 같은 주장이 추진력으로 작용해 근대주의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포부가 생겼으며, 브루노가 화형을 당한 자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노력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브루노는 폭정에 항거하는 인물로도 그려져, 20세기에 전체주의가 휩쓸던 시기에도 훌륭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역사 서술 방법론의 편견과 기회주의로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미 17세기부터 브루노가 철학, 특히 자연철학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과학 혁명을 이끈 바로 그 과학자들이 쓴 새로운 과학의 태동 이야기도 브루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태양 중심적 우주론의 승리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한다. 여기에 실제보다 축소된 갈릴레이의 구실이 더해지자, 갈릴레이에 앞서 억압에 항거해 철학적 자유를 위해 싸운 통찰력 있는 선구자이자 순교자라는 브루노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MYTH 7. 조르다노 브루노는 근대과학으로 인한 최초의 순교자였다? 中에서
P. 97~10

갈릴레이의 재판에서 나온 판결문과 이단 포기 각서에 있는 1차적인 증거만 보면, 갈릴레이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이런 오해는 갈릴레이가 투옥과 고문을 둘 다 겪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나올 때까지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투옥 이야기는 약 150년 동안, 고문 이야기는 약 250년 동안 이어졌다).
투옥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1633년에 있었던 편지들에서 나왔는데, 첫 번째 편지는 로마 주재 토스카나 대사(프란체스코 니콜리니Francesco Niccolini)가 피렌체에 있던 토스카나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고, 두 번째는 토스카나 대사가 갈릴레이와 주고받은 편지였다. 토스카나 당국자들이 갈릴레이에게 각별한 관심을 둔 까닭은, 그가 토스카나 대공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이는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토스카나 대공에게 헌정했으며, 피렌체에서 이 책을 성공적으로 출간하는 데 대공의 도움을 구했다. 따라서 토스카나 정부는 이 재판을 정부의 일인 것처럼 여겼다. 니콜리니 대사는 이 상황에 대해 정기적으로 교황을 알현해 직접 논의를 하고, 그 결과를 피렌체에 보고했다. 게다가 갈릴레이는 니콜리니 대사 부부와 대단히 막역한 사이였다.
1774년에서 1775년 사이에 발견된 1633년 편지를 보면,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소의 소환을 받고 1월 20일에 피렌체를 출발해 2월 13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이가 토스카나 대사관에 묵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갈릴레이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격리되어 있었다. 4월 12일에 갈릴레이는 첫 번째 심문을 받기 위해 종교 재판소로 갔다. 그는 추가 심문을 받기 위해 그곳에 18일 동안 머물렀지만 6개의 방이 있던 검찰관 숙소에서 하인과 함께 지냈으며, 하인은 하루 두 번씩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그의 식사를 가져왔다. 두 번째 증언에 대한 기록과 서명이 끝난 후인 4월 30일, 갈릴레이는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갈릴레이는 51일 동안 머물렀고, 그 사이에 세 번째 증언을 하기 위해 한 차례 종교 재판소를 다녀갔다. 6월 20일 월요일, 갈릴레이는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화요일에 엄격한 조사를 받고, 6월 24일까지 종교 재판소에 있었다. 이때 갈릴레이가 감옥에 수감되었는지 검찰관 숙소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6월 22일에는 선고를 받고 이단 포기 선서를 하기 위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의 수도원에 나타났다. 이틀 후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소를 떠나 로마에 위치한 메디치 저택Villa Medici으로 숙소를 옮겼다. 메디치 저택은 토스카나 대공이 소유한 호화 궁궐이었다. 6월 30일, 교황은 갈릴레이가 가택 연금 생활을 할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시에나Siena까지 여행 허가를 내주었다. 갈릴레이가 연금될 집은 갈릴레이의 절친한 친구인 대주교의 집이었다. 대주교는 갈릴레이를 5개월 동안 이곳에 묵게 했다. 1633년 12월, 갈릴레이는 피렌체 인근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고, 1638년에 잠시 피렌체 외곽에 머물던 기간을 제외하고 1642년 숨을 거둘 때까지 자택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다. … (중략) …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타당한 주장은 갈릴레이가 고문의 위협 속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실제로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실제 위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1633년 재판 기간과 그 후 9년 동안 갈릴레이는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결코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각각 150년과 250년 동안, 갈릴레이가 재판이 끝난 뒤 투옥되었다는 것과 갈릴레이가 고문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갈릴레이의 고문과 투옥에 관한 통념은 사실이 아님에도 사실로 보였던 완전히 그릇된 통념이다. 그리고 일부 어설프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나 부주의한 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MYTH 8.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죄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까지 받았다? 中에서
P. 117~124

다윈주의 이론은 일부 종이 다른 종에 비해 ‘더 고등’하다고 생각한 진보적인 이론이었을까? 일부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더 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인종차별적인 이론이었을까? 유대인들을 하등한 인종으로 매도한 특별히 반유대주의적인 이론이었을까? 다윈주의 이론이 윤리학의 박애주의 전통을 파괴하여 이기적 편의주의에 기초한 사악한 나치의 도덕을 조장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치가 헤켈의 다윈주의를 포용했을까?
19세기 유럽은 과학적, 기술적, 상업적인 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직접 목격했다. 이는 신의 은총을 확인시켜주는 종교적 증표인 것 같았다. 위에 있는 지층일수록 더 복잡한 화석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지구상의 생명이 일반적으로 점차 발전해왔다는 것을 나타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이렇게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는 생물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자연선택이 오로지 각각의 생명체의 이득을 위해서, 그리고 이득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유형무형의 모든 유산도 완벽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윈은 각각의 종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화석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헤켈과 마찬가지로 진화 역사를 관통하면서 차츰 발전하는 형태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역동적인 ‘그림’이 남아 있는 배 발생 과정을 통해서도 점진적인 발전을 간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윈 역시 헤켈의 법칙을 활용한 것이다. (… 중략 …)
헤켈은 다윈의 이타주의적 도덕 개념을 지지했다. 다윈의 개념이 전통적인 기독교 도덕을 위한 토대로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헤켈은 1870~1871년에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군 선택military selection”이라고 칭한 비열한 현상을 묘사했다. 가장 용감하고 똑똑한 사람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반면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은 집에 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덕성이 낮은 성격이 후대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헤켈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술회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가장 좋은 무기를 가진 사람이 아닌 가장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승리를 이끈 그 두뇌라는 자산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렇게 헤켈이 친유대적이고 군에 반대하는 성향을 나타냈는데도, 나치가 그를 포섭하고 그의 다윈주의를 포용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나치는 권력을 잡기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평판이라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30년대에 나치 정부는 이전 세기의 저명한 독일 석학들의 시각을 활용해 새로운 정치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나치의 선동가였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는 1세기 전의 독일 최고 과학자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국가사회주의의 이상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훔볼트는 유대인 친구가 있는 동성애자였는데도 말이다. 헤켈 역시 하인츠 브뤼허Heinz Brucher같은 몇몇 야심찬 학자들에 의해 나치에 이름이 올랐다. 브뤼허는 헤켈의 진화론적 일원론이 히틀러의 인종에 대한 견해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했다.
- MYTH 19. 다윈과 헤켈은 나치 생물학의 공범이었다? 中에서
P. 263~268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서문
과학사에 잘못 채워진 25가지 통념(MYTH)들에 관하여 / 로널드 L. 넘버스

MYTH 01. 기독교의 융성이 고대 과학의 쇠퇴를 가져왔다?
- 데이비드 C. 린드버그

MYTH 02. 중세 교회는 과학 발전의 걸림돌일 뿐이었다?
- 마이클 H. 생크

MYTH 03. 중세 기독교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가르쳤다?
- 레슬리 B. 코맥

MYTH 04. 중세 이슬람 문화는 과학의 불모지였다?
- 사이드 노마눌 하크

MYTH 05. 중세 교회는 인체 해부를 전면 금지했다?
- 캐서린 파크

MYTH 06.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이 인간의 지위를 우주의 중심에서 내몰았다?
- 데니스 R. 다니엘손

MYTH 07. 조르다노 브루노는 근대과학으로 인한 최초의 순교자였다?
- 졸 섀클포드

MYTH 08.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한 죄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까지 받았다?
- 모리스 A. 피노치아로

MYTH 09. 현대 과학은 기독교 신앙에서 태어났다?
- 노아 J. 에프론

MYTH 10. 과학 혁명이 과학을 종교에서 해방시켰다?
- 마거릿 J. 오슬러

MYTH 11. 가톨릭은 과학 혁명에 기여하지 않았다?
- 로렌스 M. 프린시페

MYTH 12. 데카르트가 물심이원론을 창시했다?
- 피터 해리슨

MYTH 13.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론이 신의 필요성을 제거했다?
- 에드워드 B. 데이비스

MYTH 14. 교회는 성경을 토대로 출산 시 마취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 레니 B. 쇼플린

MYTH 15. 유기적 진화는 순환논법에 기초한다?
- 니콜라스 A. 루프케

MYTH 16. 다윈은 진화론 때문에 신앙을 버렸다가 임종 직전에 회개했다?
- 제임스 무어

MYTH 17. 진화에 관한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논쟁은 헉슬리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 데이비드 N. 리빙스턴

MYTH 18.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신학을 파괴했다?
- 존 H. 로버츠

MYTH 19. 다윈과 헤켈은 나치 생물학의 공범이었다?
- 로버트 J. 리처드

MYTH 20. 스코프스 재판은 반진화론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 에드워드 J. 라슨

MYTH 21.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신’을 믿었다?
- 매튜 스탠리

MYTH 22. 양자물리학은 자유의지 교리를 증명했다?
- 대니얼 P. 서스

MYTH 23. ‘지적 설계론’은 진화에 대한 창조론의 과학적 도전을 대표한다?
- 마이클 루즈

MYTH 24. 창조론은 미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 로널드 L. 넘버스

MYTH 25. 현대 과학은 서구 문화를 세속화시켰다?
- 존 헤들리 브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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