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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혁신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
문장 혁신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
저자 : 우멍푸
출판사 : 글항아리
출판년 : 2014
ISBN : 9788967351014

책소개

당송팔대가 한 명 한 명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글쓰기를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개괄하는 첫 인문교양서. 화려하고 난삽한 이전 문장의 구습을 질박하고 명쾌한 사상과 작법으로 개혁한 당송시대의 문장가들, 그 혁신적 글쓰기의 핵심을 폭넓게 조명한 책이다.



언어학과 문학이라는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분석해 당송팔대가의 문제의식과 글쓰기의 특징을 조목조목 파악하였으며, '팔가' 명칭의 유래에서부터 그들의 '고문古文운동'이 거둔 성과와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중국 고전문학을 다각도에서 조망하였다.



'제2장 기기묘묘한 한유와 의기양양한 한유'부터 '제9장 유심주의 문장가 소철'은 한유부터 소철까지, 8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고 그들의 작품이 거둔 예술적 성취를 다양한 작품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그들의 출현 배경과 역사적 지위를 짚어보는 제1장과 그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제10장과 제11장은 팔가를 중심에 놓고 중국 고전문학의 흐름을 조감하는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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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화려하고 난삽한 이전 문장의 구습을

질박하고 명쾌한 사상과 작법으로 개혁한 당송시대의 문장가들

그 혁신적 글쓰기의 핵심을 폭넓게 조명하다



◆ 당송팔대가 한 명 한 명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글쓰기를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개괄하는 첫 인문교양서

◆ 언어학과 문학이라는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분석해 당송팔대가의 문제의식과 글쓰기의 특징을 조목조목 파악

◆ ‘팔가’ 명칭의 유래에서부터 그들의 ‘고문古文운동’이 거둔 성과와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중국 고전문학을 다각도에서 조망



출간 의의



그 중요도와 지명도에 비해 ‘당송팔대가’(이후 ‘팔가’)의 전반을 개괄해 독자대중에게 선보이는 인문교양서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전공자를 위한 학술서적 분위기의 문집 총서나 몇몇 인물의 평전 또는 작품 해설과 주석에 충실한 교과서 같은 책이 대부분인데, 그나마 몇 종 되지 않으며 한 권의 책에 8인의 면면을 유기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번에 글항아리에서 출간하는 『문장 혁신 -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는 팔가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글쓰기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맞춤한 첫 책이 될 것이다. ‘제2장 기기묘묘한 한유와 의기양양한 한유’부터 ‘제9장 유심주의 문장가 소철’은 한유부터 소철까지, 8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고 그들의 작품이 거둔 예술적 성취를 다양한 작품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그들의 출현 배경과 역사적 지위를 짚어보는 제1장과 그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제10장과 제11장은 팔가를 중심에 놓고 중국 고전문학의 흐름을 조감하는 길잡이다.



팔가의 출현 배경과 산문문학에의 공헌



당송시대 이전의 정통문학은 변려문이었다. 사륙변려체라고도 불리는 변려문은 봉건 지배층의 문체로, 반드시 대구對句를 이뤄야 했으며 미사여구를 다듬고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해 엄격한 형식미와 수사적 장식성을 중시한 ‘묘당廟堂문학(조정과 신료들의 글)’이었다. 고상하며 경직된 이런 문장은 통치계급의 공덕을 과장되게 기리며 공허한 아부를 일삼는 데 편리할 뿐 사실을 분명히 반영하지 못하고, 나아가 사상과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남조南朝 시대에 왕검王儉이 쓴 「저연비문褚淵碑文」에서도 “천독川瀆의 영휘靈暉를 부여 받고, 규장珪璋을 머금어 광채를 드러내었다. 화순함은 안으로 엉겨 있고, 영화로움은 밖으로 드러난다. (…) 효경스러움이 깊고 두터운 것도 이로 말미암아 이룬 것이로다”라고 말했다. (중략) 만약 황제가 한 쌍의 옥패를 내릴 경우 산문으로 주문奏文을 바친다면 “삼가 감사합니다”라는 두 마디면 될 것인데, 변려문에서는 매우 많은 말로 설명한다.

_ 27쪽



팔가의 ‘고문운동’이 개혁의 대상으로 변려문을 삼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문운동은 변려문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팔가의 문학 혁신운동이었다(37쪽). 궁정 권력에 복무하는 거짓말과 빈말을 생산해내느라 문장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 변려문에 저항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거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적합한 산문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팔가의 산문은 공통적으로 문장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했으며 어투는 비교적 통속적이었다. 즉 문예만을 문예를 하지 않았으며, 어휘가 평이했던 것이다. 또한 난삽하게 늘어놓아 사리를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변려문에 반해 의론의 분석과 논리가 명쾌했다.



고문운동을 창도한 한유와 유종원



한유와 유종원은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관직에 나가 좌천된 이후 사회현실에 눈을 뜬 당대의 지식인이자 문장가였다. 백성에 해악을 끼친 고위관리와 불교를 반대한 이유로 한직으로 밀려난 한유의 사상은 인민의 질고에 대한 동정에서 시작했다. 그는 백성이 착취당하는 원인으로 환관의 전횡과 번진의 할거, 불가와 도가의 폐단을 들고 이를 비판했다. 또한 성삼품설의 ‘하품자下品者’로 제왕과 공경의 자식을 들어 노동인민을 단지 어리석고 악한 자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진보적인 정치관은 그대로 문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쳐 산문창작에 유례없는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인습에 젖지 않고 진부한 말을 힘써 물리쳤으며, 오히려 잡스러운 이야기를 즐겨 예술적 자양분이 풍부했다. 「모영전」이 그 예로, 익숙한 사물인 붓을 의인화해 인물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유종원은 영정혁신 실패로 말미암아 15년 동안 굴욕적인 유배 생활을 경험했다. 좌천 이전에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그는 유배 생활 동안 사회 하층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겪음으로써 사상이 일변했다. 사상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작법의 변화로 옮아갔으니, 젊은 시절 추구했던 화려한 문풍을 버리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혁신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그는 팔가 가운데 묘사가 핍진하기로 으뜸이다. 특히 약장수, 악사, 목동 등 밑바닥 인생의 인물묘사는 그들이 직접 말하는 듯 구체적이며 생동감이 있다. 「동구기전童區寄傳」은 ‘구기’라는 이름의 열한 살 난 목동이 사람을 납치하는 호적 두 명을 기지로 죽이는 사건을 묘사하는데,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하다.



도적 가운데 “한 사람은 장보러 가고 한 사람은 누워 길가에 칼을 내려놓았을” 때 “목동은 조용히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묶인 팔로 칼을 등지고 위아래로 힘을 써 끊은 뒤, 칼로 그를 죽였다.” 세부묘사가 매우 자세하다. 그러나 구기가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때 장보러 간 자가 돌아와” 다시 잡혀 묶였고, “장차 목동을 죽이려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줄거리가 아슬아슬하여 독자로 하여금 긴장된 마음을 갖게 한다.

_ 134쪽



통속적인 구양수와 주도면밀한 증공



구양수는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송대 초기의 산문 풍조에 반발해 통속적 어투와 일상어를 사용함으로써 산문의 외연을 넓히는 데 힘썼다. 당나라 때 한유와 유종원의 고문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얻었지만 변려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송나라 초기에는 변려문을 숭상하는 ‘서곤파’가 융성해 산문의 입지가 좁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구양수는 한유를 추종함으로써 다시금 고문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구양수는 글은 생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문학론에 입각해 일상적이며 쉬운 언어로 ‘시시콜콜’하게 인물과 사물을 말함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곡진하게 전달했다. 저자는 「붕당론朋黨論」을 예로 든다. “대개 군자와 군자는 같은 도로 벗이 되고, 소인과 소인은 같은 이익으로 벗이 됩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은 벗이 없고 오직 군자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어째서일까요?”(176쪽) 어떠한 과장도 없으며 기이한 글자나 괴상한 구절도 쓰지 않아 쉽게 이해되는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하다.

입신과 처사, 학문과 문학 모두 구양수를 모범으로 삼았던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증공이다. 후세 사람들이 ‘구․증’이라 일컬을 만큼 증공은 스승의 사상과 문풍을 이어받았다. 그렇다고 증공이 스승 구양수의 그늘에만 머물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역사가로서의 문장을 이룩해 팔가 가운데서도 독특한 풍격을 펼쳤던 것이다(300쪽). 증공 문장의 특징은 ‘주도면밀한 조사와 자세한 분석’(312쪽)이라고 할 수 있다. 「월주조공구재기越州趙公救災記」를 보면, 구황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월주 소속의 각 현에서 행한 조사를 다양한 항목과 일련의 숫자를 동원해 매우 상세하게 열거한다. “민 가운데 늙어 고단하거나 병약하여 자급할 수 없는 자가 2만1900여 명이다” “한 해에 궁민窮民을 위한 공급이 쌀 3000석 주는 것으로 그친다” “부자에게 가두어 실어온 것과 승과 도사들이 먹고 남은 것으로 쌀 4만8000여 석을 모았다”(310~311쪽)와 같은 자세하고 풍성한 서사는 사학자 증공의 주도면밀한 문학이 구체적이고 치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왕안석의 정치적 글쓰기와 소순의 추상같은 문장



신법을 통해 관료와 지주의 이익을 제한하고 민생을 돌보고자 했던 진보적 정치가 왕안석은 문예란 세상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물과 경물을 묘사한 서정적인 글보다는 정치를 논한 글이 많다. 「상인종황제만언서上仁宗皇帝言事書」는 왕안석이 송나라 인종에게 개혁에 대한 포부와 방법론을 올린 글로, 법을 개혁하기 위해 인재를 양성해야 함을 조목조목 힘주어 말했다. 인종의 시대는 태평스러운 때였기에 황제를 설득해야 했으므로 간결한 필치에 학문과 식견을 바탕으로 한 깊은 추론의 힘을 실어 복잡한 상황으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짚어내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 본질을 드러냈다. 가령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는 재물을 넉넉히 주되 예도로 단속하며 법으로 제재를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재물이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는 하지만 방탕과 사치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예도로 절제할 필요가 있고, 만약 예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223쪽). 이렇듯 조리 있는 분석은 강한 설득력으로 상대방을 내 편이 되게 한다.

소순 또한 당시 현실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논설문을 주로 남겼다. 유력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유했던 왕안석과는 달리 소순은 청년시절을 세상 편력으로 보낸 뒤 20대 중반에 뒤늦게 글공부에 전념했다. 세상을 편력한 경험은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을 깊게 만들었고, 훗날 시대를 위해 병무와 정치에 관한 내용의 글을 창작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소순의 이런 종횡가縱橫家이자 병가兵家로서의 정신적 면모는 명백하고 시원스러운 문장으로 체현된다. 그는 어떻게 명쾌하고 의기 분발하는 문장을 지었을까? 저자는 주제에 미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점, 내용 전개의 강약을 조절한 점, 비유를 활용하되 절제한 점을 들어 소순이 사상을 주조한 방법을 밝힌다. 특히 첫머리에 논점을 제시하고 곧바로 주제에 들어가는 서술법은 요점이 선명하고 주제도 분명함과 동시에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구성해 소순 문장의 명백하고 투철한 힘을 실어준다(281~282쪽).



최고의 문장가 소식과 유심주의 문장가 소철 형제



소식과 소철은 소순의 아들로, 이들 삼부자는 ‘삼소三蘇’로 불리며 모두 팔가에 속했다. 특히 소동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소식은 문장가들의 문장가로 시와 산문, 사부와 서화에서 두루 그 시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정치적으로는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 의견을 주장하며 거리를 두었으나 인민의 빈궁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며 잘 융합했다. 소식의 문학론은 한마디로 ‘글은 곧 그 사람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고상한 유학자들의 ‘왕도’와 ‘인의’를 좇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수양함으로써 말하려는 바가 실제와 다름이 없게 될 때 바른 글, 진실된 글이 나온다는 이론이다. 요컨대 그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으뜸으로 쳤고, 심오해서 어려운 것은 반대했다. 심오해서 어려운 것은 현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하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소식의 글이 실용적인 면에 절실하고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객관적인 사실과 문제의 핵심을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며, 또한 그래서 말이 완곡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363~364쪽) (이때의 ‘실용’은 변려문이 구사하는 ‘빈말’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소식은 또한 위대한 시인이기에 시적 정취로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은 산문을 많이 남겼다.



「전적벽부前赤壁賦」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설명하려는 이치는 몹시 미묘하지만 설명은 도리어 명백하며 형상하는 것도 선명하다. “객은 또한 물과 달에 대해 아는가? 가는 것이란 물과 같지만 그렇다고 가는 것이 아니며, 차고 기우는 것이란 달과 같지만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는 것은 아니라오.”

_ 371쪽



“가는 것”이 “가는 것이 아니며”고, “차고 기우는 것”이 “사라지거나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모순으로 보인다. 하지만 넓은 공간과 오랜 시간에서 보자면 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며 달 또한 여전히 하늘에 있으니, 변하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물과 나 자신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져도 다 없어지지 않고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강산과 풍월처럼 허무한 부귀영화를 누리려 탐욕을 부릴 것이 아니라 청렴함을 유지할 것을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적 정취로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소철은 다른 팔가의 구성원과는 달리 사상적으로 신중한 온건파에 속했다. 형 소식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했지만 그 성향은 소식보다 보수적이어서 개혁은 지주와 관료 및 상인들이 모두 동의를 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소식과 달리 불교와 도교를 믿은 영향으로 객관적 존재를 부정하고 차별과 모순을 없애 유심주의에 치우쳤으며, 문학사상에서도 내적 수양을 중시하는 ‘양기養氣설’을 주장했다. 소철의 산문은 주장을 다양한 층위에서 논증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상황제서」는 현재의 정책으로는 재화를 마련하기가 어려움을 고하는 글인데, 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소철은 재화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따라야 할 우선순위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그 우선순위에 따라 재화를 풍부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나라의 존망과 일의 성패가 재화에 달려 있다고 제시한 뒤, 새로운 영토를 얻더라도 재화가 마련되지 않으면 그 땅을 보존하기가 어려움을 차례로 설파한다(404~405쪽). 이런 표현방식은 복잡한 사리를 상세히 설명해서 독자로 하여금 의문스러운 점이 없도록 하는 데 있으니, 이는 소철 문장의 핵심이다.



팔가가 이후 산문에 미친 영향



앞서 보았듯, 팔가의 고문운동은 화려함과 난삽함 일색이었던 문풍을 통속적이고 질박하며 자연스럽고 유창한 어체로 이끌었다. 언어가 통속적이거나 질박해지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수련하며 그에 맞는 형식을 궁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팔가 이후의 산문 경향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인용한 문학가들의 글이 잘 나타내준다.



내가 고문을 보건대, 당나라 이후로 크게 한 번 변했다. 당나라 이전에는 문자가 화려했다면, 그 이후로 문자가 질박해졌으며, 당나라 이전에는 구절이 짧았다면, 그 이후로 구절이 길어졌고, 당나라 이전에는 마치 고산유곡과 같았다면, 그 이후에는 평원이나 광야와 같아졌다. 대개 확연히 경계를 지른 듯하다.

- 황종희, 「경술집자서庚戌集自序」(472~473쪽)



한나라 이래로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에 이르러 그 격식이 비로소 갖추어졌고, 송나라의 구양수와 소식과 증공과 왕안석에 이르러 그 변화를 모두 이루었다.

- 장사원, 「진천초서震川抄序」(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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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역자 서문

제1장 ‘팔가’ 명칭의 유래와 역사적 지위
‘팔가’ 명칭의 유래 | 당 이전의 산문발전 | ‘팔가’와 고문운동 | ‘팔가’가 산문에 남긴 공헌

제2장 기기묘묘한 한유와 의기양양한 한유
시대를 견디며 문장의 칼을 갈다 - 소평전 | 이론으로 창작을 밀고나가다 - 문장비평

제3장 핍진한 묘사의 달인, 유종원
좌천 이후 사회 하층민의 삶에 눈뜨다 - 소평전 | 하늘의 도를 지상의 문장으로 - 문학론 | 정밀한 분석과 적확한 묘사 - 예술적 성취

제4장 일상어에서 혁신을 시작한 구양수
과감한 성품으로 정치와 학문의 새 길을 열다 - 소평전 | 문학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 문학론 | 말의 이치로 세상의 논리를 파헤치다 - 예술적 성취

제5장 진보적 정치가 왕안석의 정치적 글쓰기
“고집불통” 개혁가 - 소평전 | 문장의 쓸모는 세상의 쓸모다 - 문학론 | 두터운 학문과 너른 사상의 붓 - 문장비평

제6장 소싯적 협객 소순의 추상같은 문장
세상과 학문을 편력하다 - 소평전 | “자신도 어쩌지 못해서” 지은 글 - 문학론 | 구체적 사물에서 추상적 사유로 - 예술적 성취

제7장 사학자 증공의 주도면밀한 문학
문장은 도덕수양과 학문수련의 결과다 - 소평전 | 엄밀한 기록, 풍성한 문장 - 예술적 성취

제8장 소식, 문장가들의 문장가
강직한 성품과 호방한 글쓰기를 하나로 결합시키다 - 소평전 | 글은 곧 그 사람이다 - 문학론 | 이치와 정감을 자연스러운 언어로 표현하다 - 예술적 성취

제9장 유심주의 문장가 소철
신중한 논조의 온건파 - 소평전 | 문장의 곡절에서 사리를 좇다 - 예술적 성취

제10장 ‘팔가’ 이외의 당송산문
한유?유종원과 같은 시대의 작가들 | 한유의 문인과 재전 문인 | 만당 시기의 산문작가 | 구양수?왕안석 이전 및 동시대의 송대 산문 | 소식 문하와 그뒤의 송대 산문 | 남송 이후의 산문

제11장 ‘팔가’의 언어가 후대에 미친 영향
‘팔가’의 문풍이 후대에 미친 영향 | ‘팔가’ 문장의 ‘법도’가 후대에 미친 영향 | ‘팔가’에 대한 후인들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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