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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의 그림 (조선시대 궁중회화 2)
조선 궁궐의 그림 (조선시대 궁중회화 2)
저자 : 박정혜|황정연|강민기|윤진영
출판사 : 돌베개
출판년 : 2012
ISBN : 9788971994870

책소개

궁중의 그림, 조선시대 최고의 회화예술을 만나다!

궁궐의 장식화와 감상화를 통해 만나는 조선시대 최고의 회화예술『조선 궁궐의 그림』. 이 책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궁궐의 실내와 의례공간을 장식했던 궁중 장식화와, 왕족과 신료 등 왕실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수신과 취미를 위해 제작하고 향유했던 궁중 감상화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궁궐 그림의 대표적인 주제는 일월오봉도, 모란도, 십장생도 등으로, 이들 다양한 주제의 궁궐 그림에는 장수와 영원, 다남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비는 다양한 상징세계가 펼쳐져 있다. 또한 이러한 길상의 상징체계를 풀어나가는 것은 궁중미술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이 책에서는 왕실의 드높은 권위와 다양한 길상ㆍ의례의 상징을 담고 있는 궁궐의 그림들을 통해,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문화의 일면과 조선시대 최고의 회화예술을 만나볼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왕실의 드높은 권위와 다양한 길상·의례적 상징의 보고寶庫,
궁궐의 장식화와 감상화를 통해 만나는 조선시대 최고의 회화예술


이 책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궁궐의 실내를 장식하고 의례 공간을 장엄했던 궁중 장식화와, 왕족과 신료 등 왕실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수신修身과 취미를 위해 제작하고 향유했던 궁중 감상화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왕실의 드높은 권위와 다양한 길상·의례의 상징을 담고 있는 궁궐의 그림들을 통해,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문화의 일면과 조선시대 최고의 회화예술을 만나게 된다.

조선의 궁궐은 목조건축이고, 궁궐의 실내는 온돌 바닥과 도배한 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궐 내부는 사면 모두 종이 창호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고, 단조로운 흰 벽면을 선호하는 성향 때문에 영구적인 벽화가 그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러한 당시의 미감과 구조적·재료적인 특성상 궁궐의 외부에는 오방색을 기초로 한 단청이 그려지고, 창문과 벽체의 빈 공간에는 각 건물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지거나 장식되었다. 궁궐의 장식용 그림으로는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부벽화付壁畵와, 운반과 형태 변형이 자유로운 병풍그림, 그리고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며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발휘했던 장지문 그림(미닫이문에 그려진 그림)이 가장 많았다. 특히 조선 궁궐에서 병풍은 모든 전각에 놓였고 모든 의례에 배경으로 설치되었으며, 공간을 구획하는 장지문에는 오봉도와 십장생도가 주로 그려졌다.

궁궐 그림의 대표적인 주제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모란도(牧丹圖), 십장생도十長生圖,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 백동자도百童子圖, 책가도冊架圖 등이다. 이들 다양한 주제의 궁궐 그림에는 장수와 영원, 다남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비는 다양한 상징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이러한 길상의 상징체계를 풀어나가는 것은 궁중미술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궁궐의 그림 가운데는 오랜 전통을 갖고 전개된 주제와 양식의 그림이 있는가하면, 조선 후기와 말기에 정립된 주제나 양식의 그림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유래와 다채로운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궁궐의 그림들은 장중한 조형미와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 화려하고 강렬한 채색, 평면적이고 대칭적인 구성, 명암법과 투시의 표현이라는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갖고 전개되었다.

궁중회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제작 연도나 그려진 연유가 확실한 각종 기록화나 궁중 행사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바 있는 의궤 그림, 왕실의 발원에 의해 그려진 어진과 공신상, 왕 및 왕족과 관련된 실질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그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에 비해 궁중 장식화의 경우는 당시 활동하던 왕실 최고 화원에 의해 최고의 솜씨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쓰임새나 양식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형편이었다. 왕실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나 시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무명화가의 “속화”俗畵 즉 민화의 범주에 속해졌던 과거의 상황과, 근대에 이르러 궁중의 회화가 민간으로 흘러들어가 두 회화간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에 궁중 장식화를 민화의 한 축으로 상정하여 연구해왔던 그간의 연구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뚜렷한 양식적 차이를 보이는 두 회화간의 경계가 명확해지면서 관련 연구들이 활발히 진전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단편적인 연구 성과들을 기초로 궁궐 회화의 쓰임새 및 상징성, 양식적 특징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함으로써, 궁중 장식화의 역사와 현황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장중한 조형미와 섬세한 묘사가 응축된
조선 궁궐의 그림들

궁궐의 그림으로 가장 많은 수량이 남아 있는 것은 장식병풍이다. 왕실의 모든 전각에 놓이고 모든 행사와 의례에 사용되었던 만큼, 많은 수량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1부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장식병풍을 유래와 상징 의미, 기능과 쓰임, 유형과 양식 변화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어좌 뒤를 장식하며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오봉병, 꽃 중의 왕이라는 인식과 함께 왕실의 각종 의례에 배경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모란병, 길상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되어 다양하게 활용된 십장생도, 다양한 복을 바라는 의미와 함께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적 향유에 적합하여 궁중 실내 장식용으로 가장 많이 쓰인 화조도, 왕실 가족들의 다복과 다산을 기원하는 곽분양행락도, 장수와 복락을 기원하는 요지연도, 궁궐의 편전이나 왕세자가 거주하는 동궁에 설치하여 학구적이고 교육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던 책가도, 왕실 여성의 공간에서 다산을 상징하는 장식병풍으로 쓰이거나 혼례의식에 쓰였던 백자도 등이다.

궁중 장식화의 경우 대부분 조선시대 최고 화원화가의 그림이지만, 제2부에서 다루는 궁중 감상화의 제작자는 전문 화원에서 궁 밖의 화가, 왕과 왕족 혹은 신료들까지 다양했다. 또한 그림의 제작국도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 및 일본 작품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제작자와 제작국은 다양했지만, 엄격한 신분 질서와 유교적인 의례가 중시되던 궁중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감상화의 주제와 표현기법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왕실과 관련하여 어떤 그림을 누가 감상했는가에 대한 근거는 다양한 문헌 기록과 남아 있는 그림 위에 적힌 제발題跋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궁궐 감상화의 주제는 크게 교화敎化와 치도治道를 위한 그림, 왕조의 개창과 번영이 담긴 그림, 군·신의 덕목을 상징한 그림, 순수 감상용 그림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제2부에서는 이들 주제를 중심으로 궁중에서 소용된 감상화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궁궐 장식화를 좀 더 건축적인 시각에서 접근한다. 즉 궁궐 정전 어좌의 당가와 보개천장, 궁궐 전각의 문을 장식하는 장식 창호, 목조 건물을 보호하고 치장하는 단청, 궁궐 내외 벽에 그려진 벽화를 다룬다. 특히 근대 전환기 최고 화가들의 역량과 열정이 집약된 창덕궁 벽화들을 통해서, 조선 황실에서 그려진 마지막 궁궐 벽화가 보여주는 민족 정기와 국가의 영속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의 벽화 그림들은 그 의미와 상징성, 뛰어난 작품성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와 근대를 잇는 새로운 양식의 채색화로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제4부에서는 궁궐의 장식화가 궁 밖으로 전해져 민간 그림에 영향을 준 경로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 말기 궁중회화의 대중화가 진행된 데는 18세기 후반부터 부를 축적한 상인과 부농을 비롯한 신흥 부유층의 역할이 컸는데, 궁중양식 장식화 저변화의 중심에 바로 이들의 존재와 수요가 있었다. 19세기~20세기 초의 지도나 문헌 자료, 기사 등에 등장하는 회화 매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서울 종로의 지전(종이가게)이나 광통교 부근에 그림의 유통 공간이 존재하였고 그곳에서 궁중양식의 그림들이 판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구한말 주인섭이라는 지전 상인의 가족사진 한 장과 실제 현전하는 사진 속 작품의 비교를 통해 궁중의 그림 혹은 궁중양식의 그림이 민간에 전해지고, 그러한 양식의 그림이 다시 외국의 박물관까지 전해진 경로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길상과 의례의 상징,
궁중 장식화의 세계

1. 오직 왕의 존재만을 상징했던 그림,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왕이 공식적으로 임어하는 곳이나 왕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배경으로 설치되었다. 남아 있는 5개 궁궐에서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인 정전正殿, 왕의 초상이 그려진 후 선원전에 보관될 때까지 머무는 모든 공간, 국장 때 재궁(임금의 관)을 안치하는 빈전과 혼전 등, 최고의 권위와 위엄의 존재인 ‘왕’을 상징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그 배경에 일월오봉도가 함께했다. 남아 있는 중국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중국의 경우 어좌의 배경으로 특정 그림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반면, 조선에서는 왕이 임재하는 곳과 왕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에 어김없이 일월오봉도가 배치되었다. 그 형식은 흔히 알려진 6내지 10폭의 병풍그림과, 삽병, 장지문 등이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과 물결이 그려진 비교적 단순한 일월오봉도 도상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며, 한국의 고유문화와 음양오행론을 포함한 유가사상의 융합이라는 포괄적인 주장이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도상이 언제부터 왜, 조선에서 왕을 상징하는 배경이 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나 근거가 없는 형편이다.

2. 왕실의 모든 의례에 쓰였던 모란도
모란병은 왕실 국상의 전 과정, 어진(왕의 초상화) 모사와 봉안의 과정,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진상 절차, 실록의 봉안 과정, 왕실의 다양한 관례의식, 혼례의식, 연회의식 등 궁중에서 행해지는 의례 대부분의 전 과정에 사용되었던 그림이다. 즉 국가의 흉례나 가례, 상량이나 진상 의식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궁궐의 의례 공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전통적으로 ‘꽃 중의 왕’,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온 모란은 그러한 상징적 의미와 함께 비교적 단순한 형식으로 도안화되어 다른 주제의 병풍보다 그리기 쉽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더해져,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위호하고 그 공간을 장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그림병풍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모란병의 형식은 대부분 언덕 위에 혹은 언덕 위 괴석과 함께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모란이 병풍의 매 첩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는 형식으로, 각 폭이 비슷한 도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매우 형식화된 경향을 보인다. 용처가 다양하여 많은 수량이 필요했던 만큼, 다량 제작이 용이한 방향으로 양식과 화법의 변화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3. 장수의 소망을 담은 그림, 십장생도
오복五福 중 첫 번째가 ‘수’壽로 여겨지듯 지금처럼 사람의 수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 장수長壽는 사람들의 가장 큰 염원이었다. 장생도長生圖는 기념일에 선물을 위한 길상화로 많이 그려졌으며, 장식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궁중에서도 장식그림 중에 장생도는 인기 있는 주제였다. 특히 십장생의 제재는 도자기, 금속, 목재, 직물 등 다양한 재료로 각종 가구와 장신구, 일상용품에 폭넓게 애용되었다. 흔히 십장생도를 열 가지의 장생물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고 정의내리지만 십장생도가 언제나 열 가지의 장생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며, 열 가지의 장생물도 딱히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해, 달, 구름, 산, 돌,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대나무, 영지, 천도복숭아 등 13가지의 장생물 중에 열 개 안팎의 소재가 그때그때 다르게 선택되었다. 소재의 숫자와 선택에 상관없이 장생물 중에 열 가지를 한 화면에 구성하고자 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 고유의 창안으로, 장생도는 동아시아 회화의 공통된 주제이지만 ‘십장생’이란 개념은 한국이 유일하다. 장수의 소망을 담은 내용인 까닭에 궁중이나 사가에서 모두 회갑연 등에 많이 사용되었고, 왕세자와 관련된 경하의례에서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궁궐 전각의 공간을 구획하는 장지문에 가장 많이 쓰였던 소재이다.

4. 장식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화조도
화조도는 궁중에서 장식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그림이었다. 꽃과 풀, 새의 아름다운 자태는 실내를 장식하는 데 더없이 적합하였고, 복을 바라는 무한한 길상의 세계가 그 속에 가득 담겨 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적 향유를 넘어 부귀영화, 불로장수, 다남과 자손번창, 과거합격과 출세 같은 폭넓은 상징성을 무궁무진하게 펼칠 수 있는 소재였다. 화조화는 궁중에서도 여성의 공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1829년(순조 29) 기축 진찬에서 순원왕후의 대차로 사용된 자경전 동온돌에 화조도 8첩 병풍이 설치되었음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조화가 여성과 관련이 깊은 사실은 궁중 가례 때에 별궁, 개복청, 동뢰연청(가례 절차가 이뤄지는 공간들) 등에 설치되었으며 자수그림 중에 화조화가 많은 점에서도 짐작된다. 궁중 소용품으로서의 예술성과 맑고 고운 격조의 작품으로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화조도》 병풍은 한국에서 자생하는 현실적인 꽃과 새가 그려진 경우이고, 이와는 대비되는 양식으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서수낙원도》는 길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현실과 상상의 다양한 새와 동물이 그려진 예이다.

5. 다복과 장수, 태평을 기원하는 곽분양행락도
곽자의郭子儀(697~781)는 당나라 현종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長安을 수복했던 명장名將이다. 개인적으로도 부귀를 누리며 80세 넘게 장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이상적인 일생을 영위한 인물로 회자되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곽분양행락’을 주요한 화제로 채택했던 것은, 왕실의 가족들도 곽자의처럼 다복하게 살고 싶은 염원을 행락도라는 일상이 강조된 그림으로 제작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곽분양’의 주제는 궁중에서나 민간에서나 혼병婚屛으로서 역할이 컸으며 병풍 그림 외에는 미술품에서 보기 어려운 주제이다. 조선시대 곽분양행락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며, 화면 중심부에는 정원의 임시로 설치된 차일 아래 곽자의가 어린 손자로부터 장성한 아들 사위까지 남자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무희舞姬의 춤을 감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6. 만수무강의 뜻이 담긴 요지연도
조선시대의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서왕모西王母가 주나라 목왕穆王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여기에 초대받은 불보살과 군선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그림의 명칭은 서왕모가 자신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의 ‘요지’에서 주나라 목왕의 방문을 받아 베푼 연회를 그린 ‘요지연’도이지만 사실상 그림의 내용은 중국 원·명대를 지나며 포괄적으로 확대된 개념의 요지연이다. 서왕모와 관련된 고사 중에 ‘반도대회’蟠桃大會라는 것이 있는데, 서왕모의 탄신일이나 삼천년마다 한 번씩 선도仙桃가 익는 것을 기념하여 불보살과 신선들이 요지瑤池에 모두 모이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요지연도에는 ‘요지연’과 ‘반도대회’의 내용이 절충되어 있으니, 중국에서 건너온 소재이지만 조선시대 화가들이 이를 한국인의 기호를 살려 응용한 것이다. 서왕모가 이야기의 중심인 만큼 궁극적으로 장수와 기복祈福의 의미를 담은 점은 양국이 공통적이지만 제재의 선택과 화면 구성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요지연도는 길상적인 장식화로 쓰이기도 했지만 19세기에 국가의 경사스러운 행사를 마친 후 관원들이 제작하여 나눠 소장하는 계병?屛의 주제로도 애용되었다.

7. 서실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림, 책가도
책가도冊架圖는 책과 여러 가지 골동기물로 꾸민 정물화 병풍이다. 민화로 더 잘 알려져 왔던 그림이지만 최근 궁중에서 그려지기 시작한 궁중 장식화의 한 주제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책가도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유행한 궁중 장식화로,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 활발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조는 어좌 뒤의 책가도를 진짜 책으로 혼동할지 모를 신하들에게 “그림일 뿐”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책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는 모습이 실제를 방불케 했다는 뜻이며, 신하들이 이를 생경하게 여겼던 것을 보면 정조 대 이전에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그림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책가도는 주로 궁궐의 편전이나 왕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설치되어 서실書室과 같은 학구적이고 교육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책가도가 왕세자와 가까운 병풍이었음은 19세기 말 이후 궁중 연향에서의 쓰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내연內宴이나 야연夜宴에서 왕세자(황태자)나 왕세자빈(황태자빈)의 소차小次에 문방도文房圖 병풍이 설치되었던 기록에서도 짐작된다. 이종현, 이윤민, 이형록 3대에 걸쳐 책가도를 그려온 화원 집안의 전통이 존재하는 등 책가도는 많은 경험과 세심한 기법이 요구되는 화목으로, 그 연원은 청대의 ‘다보각도’라는 명칭의 회화에 있으며, 원근을 표현하는 서양화법의 수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소망이 담긴
창덕궁 벽화사업의 기록

우리나라의 궁궐은 화려함보다 소박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선호하여 깨끗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에 항구적인 벽화보다는 이동이 쉽고 가변적인 병풍이나 족자를 이용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에는 궁궐을 장식하는 사업의 하나로 다양한 형식의 많은 회화작품들이 제작되었고, 외국에서 가구와 공예품들이 수입되기도 하면서 조선의 궁궐은 서구와 동양·근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복합적 성격의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왕조 초기에 지어진 궁궐로 경복궁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인접해 있는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예종과 연산군을 비롯해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순종 등 여러 왕들의 즉위식이 창덕궁에서 이루어졌고,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런데 이 창덕궁에 1917년 11월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왕의 침전이었던 대조전을 비롯해 희정당, 경훈각, 통명문 등 열대여섯 채의 전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창덕궁의 화재 직후 대한제국 황실은 궁궐의 재건 사업에 즉각적으로 착수했지만, 고종의 승하와 기미독립운동으로 인해 미뤄지다가 1920년에야 본격적인 재건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왕직李王職은 총독부總督府와 협의하여 창덕궁의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기 위해 공교롭게도 조선왕조의 정전正殿이었던 경복궁의 여러 전각에서 옛 목재를 가져오기로 하였다. 이때 헐린 경복궁의 전각은 교태전, 강녕전, 경성전, 흠경각, 함원전, 만경전 등이었다.

창덕궁의 재건 사업에는 소실된 궁중의 많은 서화, 특히 궁중을 장식했던 회화작품을 다시 제작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 중에는 국왕에게 헌상한 여러 점의 회화가 남아 있는데, 1917년 12월부터 1920년까지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때의 작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이 1920년에 있었던 창덕궁의 벽화제작이다. 이 작업은 1917년에 있었던 창덕궁의 대화재 이후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 경훈각景薰閣을 재건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창덕궁의 벽화제작은 안중식과 조석진이 타계한 이후 화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김규진과 김응원이 총책임을 맡았으며, 벽화제작을 실제로 담당했던 화가는 서화연구회의 김규진, 서화미술회의 신진화가들인 김은호, 이상범, 오일영, 이용우, 노수현이었다. 한국은 1910년부터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기에 들어가 국가정책에서 일본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창덕궁 벽화작업에서도 본래 한국 화가들은 제외되고 일본 화가들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순종은 이 이국적이고 변형된 새 궁궐에 벽화마저 일본화로 장식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조선왕조의 영화가 깃든 이곳에 일본 화가들의 작품이 걸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벽화작업을 한국 화가들에게 맡길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창덕궁의 희정당은 왕이 평소에 집무를 보는 편전便殿으로, 건물 중앙의 대청 동·서벽의 벽화를 해강 김규진이 맡았다. 이곳은 전통건축에서 상인방上引枋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래 우리나라는 이곳에 그림을 장식하는 일이 없었으나 서양식과 일본식 건축양식이 가미되어 새로운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김규진은 동서벽에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그렸다. 순종의 어명을 받고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한 이 실경산수화는 김규진 생애 최고의 회심작이다. 벽화가 그려진 희정당은 국왕의 접견실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을 영접할 기회도 많았을 것이며, 이곳에 금강산을 그리도록 한 것은 금강산이 상징하는 민족적 정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순종의 뜻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던 듯하다.

순종과 순종비의 침전인 대조전에는 〈봉황도〉와 〈백학도〉가 장식되었다. 이 벽화는 서화미술회의 신진 화가들인 이용우, 오일영, 김은호 세 화가가 맡았는데 모두 장생불사와 왕·왕비를 상징하는 봉황과 학, 해와 달을 서로 대비시켜 그렸다. 섬세하고 화려한 봉황과 학의 자태, 곳곳을 장식한 구름, 해, 폭포, 바위, 오동나무, 대나무, 모란. 그리고 망망한 바다 위 서운이 흐르는 하늘의 붉은 해 등 상서러운 표현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선경을 보여주고 있다. 경훈각의 동·서벽 위에 있는 〈조일선관도〉와 〈삼선관파도〉는 중국의 전설을 그림으로 조형한 산수인물화이다. 〈조일선관도〉는 대담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진 청록산수로 20대 초의 노수현이 그린 작품이며, 〈삼선관파도〉는 맑은 녹색조가 압도적으로 쓰인 청록산수로 역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이상범이 그렸다.

유럽과 일본의 외래양식을 가미한 조선 궁궐의 새로운 공간에 장식된 이들 벽화는 종종 일본화풍의 영향이라고 분석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동시기 일본화 또는 장벽화 형태로 그려진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적절하지 않은 평가다.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대조전·경훈각에 각각 2폭씩 걸린 벽화는 대한제국 황실이 주도한 대표적인 미술 사업으로, 중진 화가였던 김규진 외에 신진 화가였던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오일영, 이용우 등이 모두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총 6폭의 그림들에는, 민족 정기와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화려한 채색과 다채로운 도상적 의미가 조화된 장식성을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궁궐의 장식벽화는, 다국적 문화가 유입되고 있던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려진 창덕궁 벽화에 이르러 근대적 채색화로 절정의 꽃을 피웠다.

궁중양식의 장식화,
민화로 다시 태어나다

궁중 장식화는 궁궐의 안팎을 꾸미는 기능을 했지만, 결코 궁궐의 높은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궁 밖으로도 전해졌고, 민간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다. 민간으로 전래된 궁중 장식화는 한동안 ‘민화’民畵에 포함되거나 ‘궁중 민화’로 소개되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궁중회화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궁중 장식화’를 ‘민화’와 구분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적극 거론되었다. 이후 민화로 분류되어왔던 궁중양식의 그림들은 점차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민화가 모두 서민층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궁중회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궁중화풍의 장식화는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는데, 궁 밖으로 전해진 궁중양식은 신흥 부유층의 구매와 수요에 의해 높은 화격을 유지한 그림으로 전래되었다. 반면 서민층으로 확산된 궁중양식은 점차 소박한 화풍으로 그려져 민화의 양식으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화원화가가 궁중의 장식화를 그려 민간에 유통시킨 경우는 궁중양식이 민간으로 전해지는 경로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고위 관료들이 행사를 기념하여 만든 후 나눠 소장한 계병?屛이다. 궁중의 일급 화가들이 주로 그린 계병은 여러 점을 그려 나누어 가졌기에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궁중양식이 민간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궁중양식 장식화가 민간에 유통된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후반기의 「한경사」漢京詞가 가장 이르다. 여기에 실린 서울의 풍물을 읊은 106수의 시 중에는 광통교의 기둥에 그림을 걸어두고 팔았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순조純祖 3년(1803)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의 녹취재방에 출제된 ‘광통교매화’廣通橋賣畵라는 화제 또한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는데, ‘광통교의 그림 파는 시장’이라는 화제는 순조가 출제하고 채점한 주제로 주목할 만하다. 19세기 전반기의 가사 「한양가」(1848)에는 청계천 광통교의 남단에 있던 그림 가게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여기에는 궁중회화와 일반 사대부 취향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다. 19세기 후반기의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1864년 이후)에는 광통교의 시전市廛과 포사?肆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있다. 이곳의 그림 가게를 서화사書畵肆라 하였다.

궁중양식 장식화는 묘사가 섬세하고 장식성이 풍부하며 양식에 있어 일정한 정형을 갖고 있어 화가의 개성적 요소는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갖는 반면, 같은 주제의 민화는 기량과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소박한 화풍으로 형식화되거나 자유분방한 조형으로 화가의 개성이 표출되기도 했다. 일월오봉도의 경우 상징성이 강하고 용처가 제한적이었던 그림이었던 만큼, 민간에 전해지는 예는 거의 없다. 반면 십장생도는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로서 민간에서도 활발히 그려졌다. 민간 양식 십장생도의 경우, 한 화면에 열 가지 내외의 십장생 제재를 한꺼번에 그린 화폭은 거의 없고, 10개 중 2~3개 정도의 소재를 골라 작은 화면에 배치한 경우가 많다. 모란도의 경우 모란의 개수가 줄어들고, 괴석의 모양이 소략화되거나 의인화, 동물화된 경우도 있다. 곽분양행락도나 요지연도의 경우 궁중화원이 아닌 민간화가의 솜씨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고난위도의 그림으로, 전체 그림의 일부분이나 몇몇 신선의 모티프를 발췌하여 그린 예가 전한다.

궁중양식 장식화의 민간 전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예로, 구한말 서울 종로에서 지전을 경영했던 “주인섭”이라는 상인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현전하는 그의 가족사진 한 장에는 화원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높은 수준의 곽분양행락도와 십장생도가 등장하는데, 이와 거의 유사한 양식의 그림이 현재 외국의 박물관에 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제4부에는 그 두 작품의 유통 경로를 밝히고 추적하는 치밀한 과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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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책머리에

제1부 궁중 장식화의 세계 - 박정혜
1 궁궐 실내의 그림 장식 전통
목조건축 양식에 알맞은 그림 치장, 장지와 병풍|벽체와 창호의 치장,장지문 그림|공간의 활용, 병풍 그림
2 장엄과 위의
일월오봉도|모란도
3 길상과 장생
십장생도|해학반도도|화조화
4 태평과 복락
곽분양행락도|요지연도|한궁도
5 공궁과 교육
책가도|백자도|서병
6 궁중 장식화에 담긴 왕실의 염원

제2부 조선시대 궁중 감상화 - 황정연
1 궁중 감상화의 전통
2 궁중 감상화의 개념과 범주
3 조선시대 궁중 감상화의 유형과 내용
교화敎化와 치도治道를 위한 그림|왕조의 개창과 번영이 담긴 그림
군ㆍ신의 덕목을 상징한 그림|순수 김상용 그림
4 조선시대 궁중 감상화의 특징과 의미

제3부 궁궐을 장식한 벽화 - 강민기
1 궁궐의 벽화와 장식화
2.건축 공간과 회화
당가唐家의 장식화|정전正殿의 천장화|영화로운 공간을 장식한 벽화, 장지화
목재의 보호와 의장 효과를 겸한 단청
3 대한제국의 궁궐 재건사업과 벽화
궁궐의 재건사업|재건된 궁궐의 황궁화皇宮化
4 창덕궁의 벽화
창덕궁의 재건 300|당대 최고의 화가를 결집시키다|창덕궁 벽화의 근대적 의의
5 궁궐의 장식벽화에서 공공벽화로

제4부 조선 말기 궁중양식 장식화의 유통과 확산 - 윤진영
1 궁중양식 장식화의 대중화
2 구한말 그림의 유통 공간
그림의 매매와 유통의 공간, 광통교| 태평방 도화서의 안과 밖
3 궁중양식의 장식화와 민간 그림의 경계
일월오봉도|모란도|십장생도|곽분양행락도|요지연도|백동자도|책가도
4 궁중양식 회화의 유통과 지전 상인 주인섭
지전 상인 주인섭|주인섭의 지전 경영|주인섭의 지전에 나온 궁중양식의 그림병풍
주인섭 관련 자료의 의의
5 글을 마치며

부록

참고문헌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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