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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다 (이이화 자서전)
역사를 쓰다 (이이화 자서전)
저자 : 이이화
출판사 : 한겨레출판
출판년 : 2011
ISBN : 9788984314825

책소개

대중 속으로 들어간 역사학자, 이이화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다!

이이화의 자서전『역사를 쓰다』. 의 저자 이이화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이야기를 보충하여 네 가지 주제를 토대로 ‘자신의 역사’를 담아냈다. 먼저 어린 시절의 애기로 태생과 관련된 사실, 아버지와 가정환경, 가출을 해서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고학한 내력,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문학에 심취해 벌인 활동 등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드러냈다. 또한 일제시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4·19혁명의 시기를 거치면서 몸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청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생활고에 시달려 방황한 이야기와 청년시절 문학도의 꿈을 접고 독학으로 역사학자의 길로 가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처럼 저자는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사를 담담히 이야기하고, 이와 함께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야기체로 잘 풀어내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당대의 역사가가 쓴, 너무나 진솔한 자서전

역사가가 쓴 자서전은 그리 많지 않다. 학계의 주류에 있던 이들이 회갑연이나 정년퇴임 등의 기념일에 맞춰 서둘러 출간하는 자기 중심적 서술로 일관한 책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오랜 집필 과정을 거친 진솔한 회고록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10년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이 출간되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편 강만길 선생과 이이화 선생은 같은 진보학계의 진영에 있지만, 역사학자로서 성장한 내력은 판이하다. 강만길 선생은 기존의 보수적 역사학계의 반대편에서 최초로 분단 시대의 역사학을 주창하고, 좌익계열의 독립운동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사에 포함시킴으로써 근현대사 연구의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선생 역시 기성학계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이이화 선생은 고졸 학력에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다. 팔삭둥이 서자로 태어나 작은 키와 허약한 체질의 신체적 조건을 지닌 채,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하며 공부의 꿈을 키웠다. 이이화 선생이 짊어진 삶의 조건은 대다수 국민들이 궁핍했던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 시절을 감안하더라도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주역의 대가 아버지 이달 선생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남다른 총기,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정으로 선생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역사가가 되었다. 당대의 역사가가 쓴 ‘자신의 역사’는 어떤 무늬를 빚을 것인가? 그는 ‘진솔함과 자기 과시의 차이’에서 긴장했다고 담담히 밝히지만, 이 책의 미덕은 단연 ‘진솔함’이다. 감추고 싶은 가족사, 남달리 혹독한 유년기 청년기를 거쳐온 신고의 세월을 선생은 진실하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때로는 철저하지 못했던 정직성이나 민주운동 과정에서 한 발 뒤에 서 소심히 방관했던 부끄러움도 이 자서전에 담아냈다.

가출 소년에서 민중의 역사가로

그는 가출 소년이었다. 신학문을 배우는 것은 일본놈이 되는 것이라는 부친의 엄격한 신념에 따라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문만을 배웠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전쟁통에 고아원에 들어가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했다. 명문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가 ‘여관뽀이’ 생활을 하며, 생애 유일한 졸업장을 손에 쥐지만, ‘문학도’의 꿈을 안고 들어간 서라벌예술대학은 1년을 채 다니지 못한다. 그러고는 먹고살기 위한 십수 가지 직업을 거친다. 가짜로 서울대 배지를 달고 문제집 장사를 하기도 하고, 아이스케끼, 빈대약, 가루치약 장사, 보험사 외무원, 술집 웨이터, 급기야 매혈까지. 큰 장애물이었던 병역 문제가 해결되고, 역사가로서 출발하는 큰 계기를 마련해준 동아일보사 연감 작업 임시직이 된 것이 선생의 나이 서른한 살 때다. 인생의 승부처였다.
선생은 국립도서관과 동아일보사 조사부의 책을 훑으며 평생 한국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시 이이화가 동아일보사 조사부 책을 다 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부친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문학도로서의 글쓰기 능력, 그리고 본인이 체험한 ‘민중적 삶’이 결부된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창작과비평》《신동아》《뿌리깊은나무》《월간중앙》 등의 매체에 실리고, 독자들은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역사 텍스트’에 열렬히 호응한다. 한편 척사위정과 북벌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담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기성학계에서도 소장 역사학자로 인정을 받고,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위원, 규장각 고전 해제 집필, 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등을 거치며 기존의 학제에서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었다.

전업 역사저술가의 롤 모델

선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생각이 삐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하는데, 선생의 굴곡진 삶과 바로 그 ‘삐딱한 생각’은 남들과는 다르게 역사를 바라보는 이이화식 시선의 바탕이 된다. 1970년대 말 무렵부터 이미 영호남의 지역감정이나 파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한국의 파벌’이란 제목으로 한국사 속의 당파, 지벌, 문벌, 학벌 문제를 《월간중앙》에 연재해 인기를 얻었으며, 이미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던졌다. 폐륜적 폭군으로 폄하되었던 광해군을 새로이 조명했으며, 정여립ㆍ강홍립ㆍ정인홍 등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재평가하고, 전봉준ㆍ이필제 등의 동학지도자, 신돌석ㆍ장지필 등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인물들을 발굴했다. 역사 속의 잊혀진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거나 특정 사건을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식의 역사 서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1990년대 이후임을 감안했을 때, 이이화 선생의 당시 작업은 명실공히 선구적이었다. 물론 역사 집필가로서 선생의 능력과 안목, 그리고 치열한 열정이 집대성된 작업은 10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원고지 2만7천 매에 새겨진 22권의 한국통사 『한국사 이야기』였다.

『한국사 이야기』라는 ‘역사를 쓰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통사를 22권의 책으로 한 개인이 집필한 것은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집필 기간과 분량만이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역사에서의 평등’이라는 자신만의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왕조사ㆍ정치사ㆍ사건사 위주의 역사 서술이 아닌 역사의 또 다른 주인으로서 일반 백성, 노비, 백정, 여성 등 민중들의 삶과 생활사를 포괄한 ‘완전히 새로운 한국사’를 펴냈다. 서술 방식도 논문식이 아닌, 일반인의 눈높이를 염두에 둔 이야기체를 지향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누구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길 위의 역사가로서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문헌에 파묻히지 않고, 전국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기록을 발굴하거나 현장의 목소리를 채록했다. 선생이 오랫동안 관여하고 활동한 역사문제연구소의 중요한 행동과제가 ‘현장 답사’였던 것이나, 자서전 속에 담긴 많은 내용이 답사나 역사 기행, 역사 강좌 등에 할애된 까닭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역사가의 시대정신

선생이 인생의 후반기, 역사 집필뿐만 아니라 역사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내력도 그와 이어진다. 선생만의 독보적 영역을 이룬 주전공 분야가 ‘동학농민전쟁’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선생은 관련 저서의 집필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운동사의 재조명’이라는 사회운동으로 확장한다. 이는 선생이 뒤에 고구려사 보전 운동, 과거사 정리 운동, 친일청산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행보와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이 지나온 ‘사회’와 ‘세계’를 돌아보는 것이며, 그 ‘세계와 맞섰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리라.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성찰과 독서의 감흥이 그다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신의 생을 들여다보는 역사가의 렌즈가 자서전의 흔한 맹점이라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의 흔적을 공들여 걷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추천글]
이이화, 그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소설이다.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다. 공식 학력은 고졸이다. 서러움이 얽혀 있는 생래적 소수자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 무렵 한문 공부만 시키던 아버지 곁을 떠나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새로운 세계를 동경한다. 그 문학 체험을 통해 그는 소수자냐 아니냐가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고뇌하고, 성취하고, 열망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기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평생의 영감을 얻었다. 이 자서전은 그런 바탕 위에서 씌어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많은 치부를 거침없이 공개하겠는가. 또 하나, 그의 글 속에는 그가 처했던 어려움, 곤궁했던 처지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누구 탓으로 돌리는 흔적을 볼 수 없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몰염치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그가 보여준 자기 성찰의 태도는 그 자체가 미덕이다. 십대 시절부터 이이화와 교유한 나는 그가 고3때 쓴 「까뮈와 창조적 윤리」라는 글 속에 담긴 인간 존중 의식을 기억한다. 나아가 역사학자이자 역사운동가로서 그가 장년기 이후 쉼 없이 벌이고 있는 역사 운동을 보면 그 모두가 인권과 평화와 연관된 것이다. 이 자서전을 꿰뚫고 있는 주제가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임을 감안할 때, 그의 인생은 삶과 글이 일치했다. 존경할 따름이다. 일독을 감히 권한다.
- 박재승 (변호사, 전 대한변협회장)

선생의 글에는 번뜩이는 섬광이 있다. 다른 학자들이 못 보는 것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에서는 노숙자 인생에서 우러나온 ‘길 위의 역사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체취가 느껴진다. 걷고 또 걸으면서 현장에서 체득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이미 유년기, 청년기에 남한 각지에서 수십 가지 떠돌이 직업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서민과 고통을 함께 나눴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 상황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는 파란에 찬 인생 곳곳에 흐르는 진한 인간미와 더불어 저자가 왜 ‘민중의 역사가’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연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또한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에 외롭게 뛰어다니는 활동가로서의 모습도 담겨 있다. 대부분의 회고록이 가식과 허위투성이인 데 반해, 이 책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사를 굴곡 심했던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포개어 담담한 이야기체로 풀어내고 있다. 너무나 진솔하다.

- 서중석 (역사학자,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이화 선생님은 역사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쓰면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기록자이면서 창조자인 것입니다. 파란만장하고 험악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흔들림 없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해 왔습니다. 재야 사학자로서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역사학의 장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가는 운동가로서 제주 4ㆍ3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앞장섰고, 한국전쟁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온 힘을 쏟고 계신 평화운동가입니다. 선생님의 이 책은 그러한 역사를 말해줄 귀중한 자료입니다.

- 강창일 (국회의원, 역사학 교수)



1975년 한국사연구회에서 주제발표를 하면서부터 얼치기 연구자였던 나는 한국사학계의 중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 나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뒤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이로 해서 국외자의 위치에서 역사학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신문이나 월간 잡지에 한국사 관련 글을 쓰며 집필가로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두어 가지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사 관련 글만 쓰기로 결심했다.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려는 뜻이었다. 또 역사 대중화를 위해서 논문만이 아니라 일반인 대상의 한국사 관련 교양서를 써보기로 했다. 당시 이른바 순수학문을 한다고 표방한 인사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을 ‘잡문’이라 해서 쓰지 않는 것을 품위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교수’ 같은 전문 직업을 갖지 않은 ‘프리랜서’로서 원고료나 인세로 살아가야만 했으니 대중을 위한 글을 쓰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었다. pp.139~140

이들 저술에는 발굴의 성격이 강한 주제와 내용이 많았다. 이미 알려진 역사 사건이라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특히 지리산이나 구월산 일대에서 활동한 변혁세력의 활동을 새롭게 조명했다. 또 인물사에서는 흔히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재평가했는데, 광해군·강홍립·정여립·정인홍 등 임금이나 벼슬아치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 의적 또는 이필제·전봉준 등 동학세력들, 신돌석·장지필 등 평민 의병장이나 백정 인권운동을 벌인 기층민중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로 다루어져 왔었다. p.185

1986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의 탄생이었고 또 하나는 내 딸 응소가 ‘쉰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역문연이 나의 학문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뿐더러 나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만들어주었다면, 늦둥이 딸은 가정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해 1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서 1박2일로 첫 준비모임을 했다. 이때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우리는 두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는, 정치가나 민주화 운동가보다는 역사학 전공자들을 조직의 선두에 두자는 것, 둘째는, 연구소 형식을 빌려서 한국사를 중심에 두고 인접 분야인 각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조직을 만들되 이름은 ‘역사문제연구소’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역문연의 설립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해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이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 바로 그것이었다. pp.191~192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봉오동전투 현장, 하지만 전투가 벌어졌던 골짜기는 당시 저수지로 바뀌어 ‘봉오동 반일유적지’라는 팻말만 서 있었다. 1920년대 초 홍범도 부대는 국경지대에서 무장활동으로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에 남양 주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추격에 나섰다. 그해 6월 6일, 독립군 연합부대로 편성해 700여 명 규모를 갖추었던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골짜기로 유인해 사면 총공격으로 전사 150명, 총상 200여 명에, 소총 160정, 기관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립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항일독립전쟁 과정에서 최초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 봉오동전투를 두고 연변의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정작 홍범도 부대가 전투의 중심부에 있었고 김좌진 부대는 2선에서 도왔다고들 했다. 연변 일대에서는 홍범도를 봉오동전투의 영웅으로 받들고 김좌진은 보조역할을 한 것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남쪽의 교과서 등에서 청산리전투만 부각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이 전투의 중간지휘관이었던 철기 이범석(훗날 국무총리)이 김좌진과 자신이 모든 걸 지휘했다고 주장하며 홍범도를 완전히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엉터리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한 나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p.255~258

백추위에서는 우선 ‘동학’ 관련 역사 용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많이 쓰는 용어로는 동학란을 비롯해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또는 혁명·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했다. 동학란은 왕조 시대의 용어로, 민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를테면 ‘역적질’을 했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천도교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동학이 주도해서 혁명을 추구했다는 의미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동학농민전쟁은 농민이 주체세력이었지만 동학이란 조직 또는 평등사상을 포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이 결합해서 혁명을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썼고 남쪽의 진보학계에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곧 그 운동 주체는 생산대중인 농민이란 것,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존재를 배제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답습한 것이다. 먼저 이런 여러 용어를 두고, 역사학자·정치학자·사회학자 들을 모아 1990년 6월 토론회를 열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니 결론이 날 턱이 없었다. 다양한 학문 경향을 추구하는 풍토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도 탈 잡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인 소장학자들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바꾸어 썼다. 나는 동학은 외피보다 인간존중사상과 봉기과정에서 나타난 조직 동원 등의 사실을 들어 일단 ‘동학농민전쟁’으로 쓰기로 했고, 이 용어를 백추위에 반영했다. pp.290~291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므로 각기 ‘조-일 전쟁’과 ‘조-청 전쟁’으로 불러야 국제교류사의 관점에서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의 경우,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간지의 연대를 쓰고 일본 민족을 얕잡아보는 ‘왜(倭)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을 담은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의 호란(胡亂)이란 용어의 경우도 ‘북방 오랑캐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교과서에 이런 용어를 쓰게 되면 설명이 길어지고 민족 차별관을 유발하게 된다. 다만 주체와 전쟁이란 용어를 써서 그 실상을 알리면 된다는 뜻이다. 그사이에 대두한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현실 대응을 두고 타협적인 주화파의 정당성을 부각하려 했다. 주자학으로 무장한 척화파는 중화주의에 매몰되어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실체가 없는 명분론에 따른 ‘존명배청(尊明排淸)’으로 일관해서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했다.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벗어나 다른 민족을 인정하면서 교류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송시열 계통의 노론 세력이 주화파를 마치 매국노처럼 다루는 행태를 경계하려 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역동적 사회를 이루어냈다고 보았다. 물이 고여서 썩은 게 아니라 줄기차게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을 둔 실학의 추구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논리였으며, 노비 등 민중의 저항과 중인-서민문화의 대두는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내재적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 이런 관점에서 민중사·생활사 기술에 열중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된 통과의례와 놀이문화와 고유의 풍속과 독자적인 문화 창달을 부각하려 했다. 그래서 서민문학의 유행과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그리고 판소리와 가면극의 등장이 민중에 토대를 두고 유교의 엄숙주의 또는 지배문화의 근엄성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실학과는 달리 중세와 근대의 중간 지대에서 태생한 민중정서 분출의 한 모습이었다. pp.372~373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 갈등과 과거사 청산의 중심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문제가 놓여 있다. 그 피해자들은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숨죽이며 살아왔으며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또 군이나 경찰에 들어가 출세할 수도 없었으며 외국 유학이나 여행을 갈 적에도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극한의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두 가지 전제, 곧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유족들에게 적용되는 연좌법의 철폐가 이뤄져야 했다.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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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머리글|진솔함과 자기 과시의 차이

1장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
가출
아버지 야산 이달 선생
역사 공부의 밑천이 된 한문을 배우다

2장 고학의 길
소설을 읽으며 꿈꾼 새로운 세상
고아원 생활
유일한 학력증서, 광주고 졸업장
짧은 대학생활
고단했던 밥벌이

3장 편집자에서 한국사 집필가로
번듯한 학사과정, 동아일보사 임시직 시절
학계에 데뷔하다

4장 대중 속으로 들어간 역사학
일반 독자들이 읽을 역사 글을 쓰다
서울대 규장각 시절
10·26과 서울의 봄
아치울에 정착하다
대중들과 함께 호흡한 역사기행·역사강좌

5장 역사문제연구소와
신군부 독재에 맞선 '역사문제연구소' 발족
을 창간하다
6월 항쟁 이후의 변화들

6장 한국사의 흔적을 찾아서, 미개척지 중국 답사
한국사의 미개척지, 수교 전인 중국 답사
박완서·송우혜 선생과 함께한 두 번째 중국 답사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아나선 중국 서쪽 답사
실록 사건과 세 번째 중국 답사

7장 동학 농민군의 역사를 재조명하다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 '선봉장'맡아
동학군을 재조명한 실질적 주역, 향토사학자들
동학농민혁명 100돌 사업의 성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출범

8장 민족, 민중을 중심에 둔 첫 '한국사 이야기'
평생의 소원, 한국통사 집필
고대사와 고려사를 각 4권으로 출간하다
집필의 피로를 덜어준 문밖 나들이
10년 결실, 22권의 한국통사 완간

9장 고구려사 보전과 과거사 청산
고구려사 지키기와 동북공정
남북학자들이 함께한 고려사 학술토론
과거사 청산의 중심, 민간인 학살 문제
과거사 정리법 통과와 한계

10장 역사의 현장에서
통합민주당 공천 심사에 참여하다
촛불의 현장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다
압록강·두만강 국경지대 탐방
친일 문제와 국치 100년

에필로그|남기고 싶은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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