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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턴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
스크랜턴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
저자 : 이덕주
출판사 : 공옥출판사
출판년 : 2014
ISBN : 9788992775090

책소개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잊혀진 개척자, 스크랜턴은 한국교회는 물론 그가 속했던 감리교회에서도 '잊혀진 선교사'였다. 스크랜턴 모자는 1885년 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헤론 가족들과 같이 들어와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고 터를 닦은 개척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그 이름과 사역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 헤론은 남대문교회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공로)자로서 역사적 평가와 인정을 받고 있지만 스크랜턴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나마 어머니 스크랜턴은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인하여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나 아들 스크랜턴은 감리교회에서조차 잊혀진 존재였다. 스크랜턴은 다른 개척 선교사들에게 뒤지지 않은 열정으로 역사 속에 확실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초창기 개척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연구되지 않은, 그래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저자 이덕주 교수는 기독교 역사에 유명한 인물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잘 알려진 역사보다는 잊혀 있거나 묻혀 있는 역사를 발굴하고 부활시키는 것이 역사신학자로서 주어진 사명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뿐 아니라 개신교 선교 개척자로서 분명한 역할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있는 스크랜턴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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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잊혀진 개척자, 스크랜턴을 이야기하다

한국에 처음으로 감리교를 전파한 윌리엄 B. 스크랜턴은 한국교회는 물론 그가 속했던 감리교회에서도 '잊혀진 선교사'였다. 스크랜턴 모자母子는 1885년 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헤론 가족들과 같이 들어와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고 터를 닦은 개척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그 이름과 사역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 헤론은 남대문교회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공로)자로서 역사적 평가와 인정을 받고 있지만 스크랜턴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나마 어머니 스크랜턴은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인하여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나 아들 스크랜턴은 감리교회에서조차 잊혀진 존재였다. 스크랜턴은 다른 개척 선교사들에게 뒤지지 않은 열정으로 역사 속에 확실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초창기 개척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연구되지 않은, 그래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저자 이덕주 교수는 기독교 역사에 유명한 인물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잘 알려진 역사보다는 잊혀 있거나 묻혀 있는 역사를 발굴하고 부활시키는 것이 역사신학자로서 주어진 사명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뿐 아니라 개신교 선교 개척자로서 분명한 역할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있는 스크랜턴은 그의 호기심과 탐구욕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덕주 교수의 20년에 걸친 스크랜턴 탐구의 여정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시작되었다.



스크랜턴은 왜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불모지 조선의 개척선교사가 되었을까?

스크랜턴이 한국에서 사역을 펼치면서 품었던 선교이념의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스크랜턴은 왜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사랑했던 감리교의 품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

스크랜턴은 왜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한국도, 고향인 미국도 아닌 일본에 묻혔을까?



본토를 떠나 여리고 골짜기로 내려온 모자

삼십대 중반에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어 외아들이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으면 안락한 노년 삶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어머니 스크랜턴은 아들을 한국의 개척 선교사로 나가도록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53세 나이로 아들과 함께 여선교회 개척선교사로 나와 1909년 향년 77세로 별세하기까지 선교사들에게는 '어머니'로, 한국 교인과 일반인들에게는 '위대한 부인大夫人'으로 불리면서 이화학당과 공옥여학교, 부인성경학원 등을 설립하고 서울과 경기도 일대 교회와 매일학교들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아들 스크랜턴도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여 명문대학 출신의사로서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고독하고 험난한 개척선교사의 길을 택하였다. 선교 초기에 안전한 정동을 포기하고 위험한 애오개와 상동, 동대문을 선교지로 선택하여 나갔다. 그는 가난한 민중, 고난 받는 민족이 신앙의 힘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립과 독립의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후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토착교회 지도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전덕기와 이필주, 구연영, 우덕순, 김흥순, 배동현 같은 일제시대 감리교회 지도자들이 그의 지도를 받고 교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세계선교사상 보기 드문 모자母子선교

이로써 스크랜턴 가족 2대가 함께 개척 선교사로 나왔으니 부부나 형제가 함께 나오거나, 시차를 두고 부자가 같은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스크랜턴 가족처럼 모자母子가 함께 선교사로 나온 것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다. 이후 스크랜턴' 모자'는' 동료' 선교사로서 때로는 같은 공간에서,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추진하면서 서로 북돋아주는 '협력 선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크랜턴 모자가 서울 상동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수원과 평양, 원산 지방을 함께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 선교사나 한국 교인들은' 혈연관계로서 모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로서 어머니와 아들'(눅 8:21)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S C R A N T O N 선교 패러다임

스크랜턴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을 갖고 개척선교사가 되어 여리고 골짜기 같았던 한국 땅에 와서, 병든 환자를 '치유'하고,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충성하였던바, 그것은 자신을 내려놓고 희생하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었고, 선교현장의 복잡한 정치상황에 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 '순회' 전도자로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가 복음을 전하였고, 교리와 신조가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고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원리에 충실하였으며, 한국에서 스스로 전하고 세우고 관리할 수 있는 교회를 이끌어갈 '토착' 교회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였다. 저자 이덕주 교수는 이렇게 스크랜턴의 선교이념을 Samaritan(사마리아인)-Curing(치유)-Redemption(구원)-Agape(사랑)-Neutral(중립)-Traveling(순회)-Oecumenical(에큐메니칼)-Native(토착)의 8가지 개념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여 이를 'S C R A N T O N(스크랜턴)' 선교 패러다임이라 이름하였다.



교파와 인습을 초월한 스크랜턴

스크랜턴은 감리교를 사랑했으나 그렇다고 교파가 다른 교인을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토착 종교와 문화전통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였다. 그에겐 신앙고백이나 삶의 모습은 다양할지라도 목적하는 바가 같을 때 서로 연대하고 조화할 수 있는 에큐메니컬 정신이 있었다. 그가' 친일파' 해리스 감독에게 '축출당한' 후 성공회와 구세군을 오가며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초교파적 일치운동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크랜턴은 문화와 종교, 교리와 신학, 관습과 전통의 경계선을 사랑으로 무너뜨린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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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머리글-다시 살아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꿈 o 4



Ⅰ. 스크랜턴 일가족, 고향을 떠나다(1832~1884년) o 21



1. 스크랜턴을 찾아서

1.1. 스크랜턴을 찾아 떠난 길 o 24

1.2. 일본 도쿄와 고베 답사 o 28

1.3. 미국 뉴헤이븐과 클리블랜드 답사 o 33

2.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까지

2.1. 스크랜턴의 조상과 신앙배경 o 38

2.2. 뉴헤이븐 홉킨스학교와 예일대학 졸업 o 46

2.3. 결혼과 병원개업 o 57

2.4. 메리 스크랜턴의 해외여선교회 활동 o 68

3. 한국의 문호개방과 스크랜턴 가족의 선교사 지원

3.1. 보빙사절단과 가우처의 만남 o 78

3.2. 매클레이의 내한과 선교 윤허 o 84

3.3. 스크랜턴 가족의 선교사 지원과 파송 o 90



Ⅱ. 선교의 길을 열고 터를 닦다(1885~1890년) o 101



1. 선교 개척의 여정

1.1. 아펜젤러 가족과 동행 o 104스크랜턴 15

1.2. 일본에서 입국 준비 o 110

1.3. 아펜젤러의 입국 시도 o 117

2. 스크랜턴의 내한과 정동 선교부 개설

2.1. 입국과 정동 정착 o 121

2.2. 감리교 정동 선교부지 확보 o 130

2.3. 정동 여학교 설립 o 138

2.4. 정동 병원 설립 o 150

3. 정동 선교부 안정과 사역 확장

3.1. 국왕이 지어준 학교와 병원 이름 o 160

3.2. 이화학당 선교활동 o 171

3.3. 안방으로 통하는 길 o 180

3.4. 여성 선교와 민중 선교 o 189

4. 시련을 딛고 강력한 선교거점이 된 정동

4.1. 영아소동과 민중 시험 o 200

4.2. 이화학당 신앙교육과 신앙집회 재개 o 207

4.3. 정동 여성교회와 보구여관 설립 o 215

5. 확장되는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5.1. 보구여관 전도사역과 한글 전도문서 출판 o 221

5.2.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과 추진 o 234

5.3. 스크랜턴이 본 의료선교의 역할 o 241

5.4. 문서선교와 맥길과의 갈등 o 247



Ⅲ. 선교의 영역과 지경을 넓히다(1891~1894년) o 255



1. 제2기 선교사역의 확장

1.1. 첫 번째 안식년 휴가 o 258

1.2. 선교 관리자로서 선교이론 정립 o 265

1.3. 이화학당과 여선교부 신앙사역 o 275

1.4. 이화학당 졸업생들의 선교활동 o 282

2. 스크랜턴 모자의 남대문과 동대문 사역

2.1. 남대문시약소와 상동교회 목회 o 290

2.2. 상동교회 달성회당 건축 o 298

2.3. 동대문 볼드윈시약소와 예배당 건축 o 306

3. 장로사로서 지방 선교여행

3.1. 인천과 강화지방 선교여행 o 315

3.2. 수원지방 선교여행과 장지내교회 설립 o 322

3.3. 원산과 평양 선교 개척 o 328

3.4. 청일전쟁과 홀의 희생 o 336

4. 고난 받는 민족, 활짝 열린 선교의 문

4.1. 한민족의 수난과 교회 부흥 o 344

4.2. 어머니 스크랜턴의 수원지방 선교여행 o 351

4.3. 상동교회 매일학교와 전도부인 양성과정 o 354

4.4. 국왕 알현과 정부초청 연회 o 362



Ⅳ. 고난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사랑하다(1895~1898년) o 371



1. 선교 10주년 기념대회와 남감리회 선교 지원

1.1. 남대문 시병원 개설과 선교 10주년 기념대회 o 374

1.2. 남감리회의 한국선교 개척 지원 o 380

1.3. 평양 선교여행과 휘장세례 o 387

2. 모자가 함께 한 지방 선교여행

2.1. 원산과 평양 여행 o 393

2.2. 간접 선교에서 직접 선교로 o 400

2.3. 성공적인 선교 현장 o 405

2.4. 애오개 선교와 엡웟청년회 조직 o 412

3. 지속적인 서울과 지방 교회 성장

3.1. 동대문 '메리스크랜턴기념관' 건립과 상동교회 부흥 o 419

3.2. 공주지방 여행과 선교 협력 o 427

3.3. 신학교육과 문서출판 o 433

3.4. 한강나루 '월강송별' o 438



Ⅴ. 약속의 성취를 믿고 기다리다(1899~1903년) o 447



1. 제3기 선교사역의 출발

1.1. 2차 안식년 휴가 o 450

1.2. 스크랜턴의 장로사 직무 복귀 o 454

1.3. 제정 o 458Ⅳ

2. 상동교회와 동대문교회 예배당 건축

2.1. 상동교회 부흥과 미드기념예배당 건축 o 464

2.2. 동대문교회 전도소 개설과 예배당 건축 o 476

2.3. 지방 순회 여행과 신학 교육 o 483

2.4. 민중선교와 민족운동 o 488

3. 연회 조직 개편과 감회사 선임

3.1. 남감리회 선교부와 갈등 o 494

3.2. 무어 감독의 평양여행 o 499

3.3. 한국인 최초 목사 배출과 감회사 임명 o 505

4. 메리 스크랜턴의 지방 사역과 발병 귀국

4.1. 감리교 부인성경학원과 지방 매일학교 설립 o 510

4.2. 어머니의 발병과 귀국 o 523

4.3. 스크랜턴 가족의 귀국 요양 o 529

4.4. 아펜젤러의 순직과 한국선교 위기상황 o 538



Ⅵ.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다(1904~1906년) o 549



1. 스크랜턴 모자의 복귀와 선교사역 재개

1.1. 스크랜턴 가족의 선교지 복귀 결심 o 552

1.2. 러일전쟁과 선교지 복귀 지연 o 560

1.3. 서울로 돌아온 스크랜턴 가족 o 567

1.4. '선교 2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해주지방 선교여행 o 574

2. 스크랜턴 모자의 선교 재개

2.1.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설립 o 583

2.2. 선교 상황 진단과 선교정책 재정립 o 591

2.3. 한국교회 자립운동 o 598

2.4. 맏딸 오거스타의 결혼 o 603

3. 한민족 수난과 선교사 갈등

3.1. '친일파' 해리스 감독의 방한 o 608

3.2. 논산교회 박해사건 o 618

3.3. 1905년 한국선교연회 조직 o 625

3.4. 한국교회 부흥과 일치운동 o 635

4. 격동의 1905년, 혼돈 속에 새 질서 모색

4.1. 루스벨트 대통령 딸의 방한 o 643

4.2. 을사조약 체결과 엡웟청년회 해산 o 653

4.3. 장·감 선교협력 및 교파합동 문제 o 665

4.4. 감리교 정체성과 전통 수호 o 674

5. 견제와 갈등 속에서 마지막 사역

5.1. 우울했던 1906년 연회 o 680

5.2. 연회 직제 개편과 총리사 직책 박탈 o 686

5.3. 상동교회 여성사역 o 693

5.4. 마지막 지방여행 o 702



Ⅶ. 죽어서 약속의 땅에 묻히다(1907~1922년) o 715



1. 윌리엄 스크랜턴의 선교사 사임

1.1. 강화지방 사경회와 교인 충돌사건 o 718

1.2. 선교사직 사임의사 표명 o 729

1.3. 마지막 장로사 보고 o 738

1.4. 퇴장인가, 퇴출인가? o 748

2. 감리교회 경계 밖에서 계속된 선교사역

2.1. 대한의원 촉탁의사 겸 의학부 교사 o 757

2.2.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 설립 o 763

2.3. 구세군 및 성공회 선교 지원과 프리메이슨 한국지부 설립 o 769

3. 어머니의 마지막 사역과 별세

3.1. 진명여학교 설립 지원 o 777

3.2. 상동여자중학교 설립 o 782

3.3. 메리 스크랜턴의 별세 o 790

3.4. 스크랜턴 대부인 장례와 추모 o 796

4. 윌리엄 스크랜턴의 남은 사역

4.1. 서울요양원 설립 o 806

4.2. 금광회사 부속병원 근무와 시란돈병원 설립 o 812

4.3. 중국 대련을 거쳐 일본 고베에 정착 o 820

4.4. 스크랜턴의 별세와 장례 o 825

5. 망각에서 기억으로

5.1. 선교 50주년 기념 선교대회 o 831

5.2.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와 스크랜턴 재조명 o 836

5.3. 기억하고 구현해야 할 '스크랜턴 가치' o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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