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본문

동학ㆍ천도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1893~1919
동학ㆍ천도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1893~1919
저자 : 이영호
출판사 : 푸른역사
출판년 : 2020
ISBN : 9791156121701

책소개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손을 잡았나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불교의 시대, 유학의 시대를 지나고, 1860년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1919년 3ㆍ1운동에 이르기까지 60년은 근대전환기 종교지형의 변동이 격심하게 일어난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자주독립과 근대화의 과제를 놓고, 민족종교=신흥종교와 외래종교=서양종교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 시기였다.
이쯤에서 3ㆍ1운동과 관련한 가장 소박한 질문이 제기된다. 동학과 ‘서학’이란 대척점에 서 있는 듯 보이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독립운동의 축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다. 《동학과 농민전쟁》(2004)을 내는 등 민중운동사에 큰 관심을 기울여온 지은이는 이 책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1919년 3ㆍ1운동 사이 동학ㆍ천도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기포드학당 등에 붙은 기독교 비판 격문, 영문잡지에 실린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의 체험담 등 다양하고도 귀한 사료와 통계를 이용해 3ㆍ1운동에서의 연대는 갑자기 민족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 아니라 15년에 걸친 모방과 경쟁 위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논증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 이후 영학당 등 동학여당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동학의 남접 변혁세력과 결별한 천도교의 창건과 기독교 ‘따라잡기’, 두 종교 간 연대의 한계 등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주장을 선명히 드러낸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갈등 속에서도 존재한 두 종교 간의 소통 통로 규명
제1부 ‘동학 세력의 변혁운동과 기독교와의 갈등’에서는 두 종교 간의 갈등과 소통에 초점을 두고 몇 가지 사례를 분석했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반대하여 창도 되었으나 실제로 서로 간에 큰 충돌은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이 천주교 성당과 교우촌을 공격한 적은 있으나 이후 서로 충돌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41쪽). 1885년 처음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도 서학의 범주에 속하므로 동학과는 본래적으로 적대적이었으나 동학은 기독교와도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의 남접세력이 기독교란 외피를 쓰고 변혁운동을 전개한 영학당 사례나 황해도 동학군 봉기를 지켜본 매켄지 선교사 이야기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존스와 매켄지 사례를 통해 한울님, 하나님이란 신관神觀의 유사성을 통해 두 종교의 소통 통로가 상존했음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다.

천도교의 기독교 따라잡기 배경과 의미를 짚다
제2부 ‘근대종교 천도교와 기독교의 경쟁과 연대’에서는 3ㆍ1운동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선도적으로 촉발한 천도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파헤쳤다. 1905년 12월 창건된 천도교는 기독교를 모델로 삼아 근대종교로의 개편을 꾀했다. 서울에 천도교 중앙대교당, 지방의 각 교구에 교회당을 건립해 나갔다. 제사 형식의 의례를 일요일의 공중예배 형식으로 바꾸었다. 중앙집권적 교구제를 통해 포덕을 공개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교회당 설립, 예배형식, 포덕방식에 있어서 천도교는 기독교를 모방하고(211~216쪽) 또 경쟁하면서 교세를 급격히 확대했다. 천도교인 40만, 기독교인 20만을 일컬을 정도로 천도교세가 기독교의 2배에 달했다(266쪽). 민족적 의제에 의기투합하여 천도교와 기독교가 3ㆍ1운동에서 연대하게 된 배경에 기독교를 모델로 한 천도교의 근대종교화, 천도교와 기독교의 경쟁을 통한 상호 교세의 확장 등이 자리 잡고 있었던 점을 의주ㆍ선천 등 서북지방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동학과 천도교의 노선 전환과 단절을 조명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한 변혁운동은 1904년경에 이르면 소진된다. 이미 동학의 남접 변혁세력은 동학의 북접교단과는 결별하여 노선을 달리해왔다. 북접교단도 남접 변혁세력을 배척하면서 교단의 재건과 포덕의 확장에 매진했다.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는 문명개화로의 노선 전환을 선택했다. 서북지방에서의 포덕 성공을 바탕으로 교단 재건에 매진했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손병희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1904년 진보회운동은 문명개화노선의 기조하에 전개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지원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친러파 광무정권을 비판하는 정치운동이었다. 교세의 확장, 진보회운동 등을 기반으로 1905년 12월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했다. 천도교는 동학의 남접세력이 주도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교단사에서 완전히 삭제하여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책에 따르면 1905년 12월 1일 신문에 실린 천도교 창건 광고문에는 동학에 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을 정도였다(194쪽). 이렇게 천도교가 문명개화노선으로 전환함으로써 그 계통에 속한 기독교와도 연대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이 과정에서 서북지방에서 벌어졌던 두 종교의 교세 확장 경쟁 등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은 식민지가 되면서 민족종교와 외래종교의 각축은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근대화의 과제가 부각되는 추세 속에서 민족종교의 역할은 위축되어 갔다. 그렇지만 적어도 1919년까지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화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민족종교=신흥종교와 외래종교의 연대가 빛을 발했다. 흔히 종교 문제를 정치사회와는 무관하게 종교사, 교단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근대 전환기는 정치사회적 혼란과 동요가 종교에도 그대로 반영된 시기이고, 종교가 정치사회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간 시기이기도 하다.
3ㆍ1운동은 초기에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대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촉발했지만, 후기에는 민중의 역동성이 아래로부터 분출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3ㆍ1운동에 이르는 이러한 민중운동의 계보가 충실히 규명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동학의 변혁세력과 기독교, 그리고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의미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머리말

1부 동학 세력의 변혁운동과 기독교와의 갈등

1장 동학과 서학의 대립
동학의 서학 비판
동학 세력의 신원운동과 외세 비판
동학과 천주교의 충돌

2장 동학 세력의 반기독교 격문
격문에 등장한 기독교
격문 발신자의 정체
상호 이해의 가능성

3장 매켄지 선교사와 황해도 동학군
황해도 동학군의 봉기와 기독교 선교사
매켄지의 선교 활동과 동학군
동학과 기독교의 소통

4장 영학당의 결성과 기독교
영학당의 봉기와 주도 세력
종교적 외피로서의 ‘영학’
영학과 기독교의 관계

2부 근대종교 천도교와 기독교의 경쟁과 연대

5장 천도교의 창건과 기독교 모델
변혁운동의 해소
서북 지방 포덕과 천도교 창건
천도교의 근대 종교화와 기독교 모델

6장 천도교와 기독교의 경쟁
연원제에서 교구제로
기독교의 선교 시스템
현장의 경쟁

7장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세 비교
교세의 양적 성장
평안남북도 지방의 교세
평안북도 군 단위 지역적 분포

8장 천도교와 기독교의 3ㆍ1운동 연대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
중심 지역 평양의 3ㆍ1운동과 연대
경쟁 지역 의주의 3ㆍ1운동과 연대
경계 지역 선천-정주의 3ㆍ1운동과 연대
연대의 한계

결론
주석
찾아보기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Quick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