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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
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
저자 : 요나하라 케이
출판사 : 사계절
출판년 : 2018
ISBN : 9791160943474

책소개

“역사는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마쿠라 요시타로와 수많은 류큐ㆍ오키나와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의 슈리성 복원기
류큐?오키나와는 동아시아 해상로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번성했고, 또한 그 조건 때문에 전쟁에 휘말렸다. 1429년 이래로 독립왕조로 존재하던 류큐는 1879년에 일본에 편입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이 섬은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본토의 ‘버린 돌’이 되어 수십만 발의 포탄을 견뎌내야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27년에 걸친 미군 통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옛 류큐의 전통과 독자성은 한순간도 흩어지지 않고 제 모습을 간직해왔다.
그 상징이 바로 슈리성이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슈리성을 되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 가마쿠라 요시타로가 남긴 방대한 조사 자료, 그리고 그와 함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한 근대 류큐?오키나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오키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문화 연구 조사를 진행한 가마쿠라는 그 섬에서 만난 사람들, 이를테면 류큐왕국의 옛 왕족, 민속학자, 화가, 기자, 사진사, 공예가 등 다양한 자리에서 자신들이 나고 자란 섬을 자부하고 사랑하는 인물과 교류하면서 류큐?오키나와의 문화와 역사를 채록했다. 또한 가마쿠라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류큐의 예술, 민속, 종교, 언어 등 과거를 증명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한 뒤 그것을 다시 다음 세대에게 전달했다. 이 모든 과정에 말로는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인연’과 ‘우연’이 사방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 오키나와 연구자가 수행한 민속학 연구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의 족적을 날줄로 삼고, 그 위에 류큐와 오키나와의 역사를 씨줄로 엮어 세상에 나온 이 책은 문화인류학자인 나의 눈에 아카데미가 덧씌워놓은 꺼풀을 벗겨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연구하고 살아간다’는 인류학의 명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임경택(전북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역사
한 해 평균 45만 명의 한국인이 방문하는 익숙한 관광지가 된 오키나와는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는 사실과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 등에서 어딘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닮은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오키나와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해마다 오키나와 현민들이 ‘미군기지’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섬에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걷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 섬에 살고 있는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은 20세기 초반에 우연히 류큐ㆍ오키나와에 모여 그곳의 전통과 예술을 탐구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류큐ㆍ오키나와와 그 역사를 상징하던 슈리성이 2차 세계대전의 전화로 파괴된 후 반세기에 걸쳐 제 모습을 되찾아간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근현대사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조금 더 실감나게 류큐?오키나와를 느끼게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근대의 섬과 여성을 주제로 여러 글을 쓴 에세이스트이자 문화연구자인 요나하라 케이는 이 책에서 자연의 풍광 속에서 몇 차례나 반짝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 ‘슈리성’의 기구한 운명 위에 류큐ㆍ오키나와에서 활동하고 그곳을 연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여러 겹 겹쳐놓으면서 류큐ㆍ오키나와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특히 이 책의 중심인물인 가마쿠라 요시타로가 오키나와를 현지조사한 후 남긴 81권의 필드노트와 수많은 고문서의 필사본ㆍ복사본, 1,236장의 유리 건판, 1,296장의 사진, 1,114점의 빈가타(오키나와 전통 염색물), 627점의 기레지(빈가타 천으로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조각) 등은 그 방대한 규모와 내용의 치밀함 양쪽 모두에서 놀라울 정도이다. 그가 남긴 자료는 1992년 슈리성을 복원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요나하라 케이는 한 세기 전에 가마쿠라가 걸어갔던 길을 조용히 뒤따라가면서 일본 본토로부터 ‘지체된 야만’이라고 배척되었던 류큐ㆍ오키나와의 역사를 정성스레 복원한다.

요나하라는 가마쿠라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희미해진 기억을 추적하는 힘든 조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열과 성을 다해 ‘가마쿠라 요시타로와 오키나와’라는 주제를 완성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가마쿠라 요시타로가 요나하라 케이의 손을 빌려 그의 본격적인 실상을 우리 앞에 처음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카라 구라요시

바다 한가운데의 섬, 붉게 빛나던 성
오늘날 오키나와는 일본을 구성하는 47개의 광역자치단체(현) 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46개 지역과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15세기부터 약 500년간 존속한 류큐왕국의 수도였던 슈리는 완만한 언덕 위에 서 있는 슈리성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흥망을 거듭한 끝에 류큐왕국이 하나의 통일 왕조로 성립한 것은 1429년이다. 왕국은 중국 명나라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 질서였던 ‘책봉冊封 체제’의 일원으로, ‘진공進貢’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사신들을 보내고 일본?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무역선을 파견하고 아시아 해상 교역로의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번영을 일구었다. 류큐인이 바다를 건넌 범위는 동북으로는 1,000킬로미터 떨어진 조선과 명, 일본 본토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4,000킬로미터 건너에 있는 베트남, 타이 등과 무역을 하였으며, 특히 말라카왕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해발 136미터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슈리성은 지형의 기복을 교묘히 이용한 건축물로, 바깥은 성벽이 곡선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 동서로 약 400미터, 남북으로 약 200미터의 타원형 부지에 서 있는 이 성의 창건은 14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류큐왕국이 오키나와와 주변의 여러 섬들을 통일한 뒤에는 왕국의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슈리성은 약 450년에 걸쳐 왕국의 정치?행정?외교?무역을 관장하는 사령탑이었고, ‘류큐 문화’가 만들어지는 장이었으며, 왕국 제사 체계의 요체이기도 했다.
1609년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이 류큐를 침공했다. 시마즈는 침공의 이유로 여러 가지를 댔지만, 가장 주요한 목적은 책봉 체제하에서 류큐가 교역으로 얻던 부富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국이 잘 닦아놓은 도로를 따라 진군했고, 슈리성이 포위된 지 3일 만에 쇼네이왕은 항복을 선언했다. 류큐왕국이 지배하던 아마미제도는 이때부터 사쓰마번의 직할령이 되고, 사쓰마는 사탕의 전매제도 등을 실행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872년에 일본 메이지 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국왕을 ‘번주’로 정했다. 류큐번 설치를 서두른 것은 타이완 출병(1874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879년, 메이지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슈리성을 강제로 비운 뒤 그곳에 군부대를 주둔시켰다(이른바 ‘류큐 처분’). 이 무렵 서구 세계가 오키나와 일대로 진출할 기미를 보이자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불안정한 상황이 서구 국가들의 침략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일거에 ‘처분’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아시아 각국을 연결하던 천혜의 지리 조건은 왕국에 번영을 안겨주었고, 또한 붕괴를 초래했다. 이후 오키나와는 일본의 지방 현이 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미일 양군이 격돌하는 전장으로 변해 슈리성을 비롯한 모든 것이 파괴된다. 전후에는 27년간 미국 군정부의 통치를 받다가 1972년에야 일본으로 반환된다.

류큐 문화 전반에 걸친 최고의 필드워커, 가마쿠라 요시타로
1921년 봄, 오키나와 나하항에 당시 20세의 청년 가마쿠라 요시타로가 발을 내딛었다. 가가와현에서 태어난 그는 1921년 봄에 도쿄미술학교 도화사범과를 졸업하고 미술 교사가 되어 오키나와에 부임했다. 본토와 너무나 다른 오키나와의 풍경은 그에게 신선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청년 교사는 ‘이국의 정서에 매료된 여행자’의 기분으로 오키나와를 바라보며 강렬한 태양과 짙은 녹음 사이에 자리 잡은 왕국 시대의 건축물을 자신의 노트에 열심히 기록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류큐왕국은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옛 수도인 슈리에는 빈집이 늘어났고 왕국과 함께 몰락한 귀족들은 집과 생활용품 등을 팔고 슈리에서 나하로 옮겨와 월급쟁이 직장인이 되거나 시골로 낙향해 농사꾼이 되었다.
가마쿠라는 ‘류큐’의 흔적이 점점 지워지고 일본과의 일체화가 가속화되던 슈리에서 지나간 시대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와 사람들을 만났다. 공통어(일본 본토의 말)와 닮은 듯 달라 그 미묘한 차이로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슈리의 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여러 민요. 오키나와의 자연환경을 문양으로 표현한 정교한 섬유공예. 현지인들의 일상과 국왕의 위엄을 기록한 그림. 그리고 중국의 양식과 일본의 양식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건축. 이 모든 것에 매료된 가마쿠라는 “어디까지든 걸어가는 다리, 모든 것을 응시하는 눈, 뛰어난 귀”로 기록하고 연구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23년까지 2년간 교사로 일하면서, 이후 게이메이카이(일본의 학술 연구 지원 재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5월부터 1년을 보낸 뒤 다시 1925년 가을부터 1927년 9월까지, 그리고 1933년 여름과 1936년 말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오키나와에 체류하면서 본도와 주변 섬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잠시 도쿄에 머물던 1924년 3월에는 신문 기사로 슈리성 정전이 곧 철거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이토 주타(건축가)와 함께 내무성을 움직여 철거를 저지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도쿄에 기거하던 가마쿠라는 도쿄대공습으로 자택이 파괴되고 방공호로 몸을 옮겨 생활하면서도 자신이 수집한 오키나와 관련 사료만큼은 훌륭하게 지켜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가마쿠라가 수집한 사료들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또한 생활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연구를 포기하고 류큐 빈가타를 발전시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가타에조메型繪染 작가로 일했다(그는 이 활동을 인정받아 1973년 ‘인간국보’로 지정되었다).
가마쿠라가 1920년대의 조사 결과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 분위기가 고조되던 197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 400여 점이 오키나와 본토 복귀를 기념하며 열린 《50년 전의 오키나와》 전시회에 소개되어 류큐왕국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렸고, 그가 수집했던 류큐 예술 공예품들이 현지의 예술가들에게 전달되어 전통 양식을 부활시켰으며, 그는 일흔이 훌쩍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켰다. 그리고 1982년 여든이 된 가마쿠라는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진 자신과 류큐ㆍ오키나와의 인연을 『오키나와 문화의 유보沖?文化の遺寶』로 집대성했다.

근대 오키나와 사람들의 인물사전
류큐?오키나와는 가마쿠라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저자인 요나하라 케이는 이것을 “류큐 문화 그 자체의 힘이 이끌어내는 행운”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이 행운과 인연들이 겹치면서 가마쿠라 주위에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가마쿠라가 일군 성과는 바로 이들과 공동으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류큐 학자 삼총사’라고 불린 스에요시 바쿠몬토, 이하 후유, 마지키나 안코는 20세기 초반에 오키나와학의 초석을 쌓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류큐왕국 시절의 사료를 수집하고 본토화가 가속화되던 근대 오키나와의 시대 조류를 분석하며 류큐의 생활 풍속과 역사를 집필했다.
류큐왕국의 왕가인 쇼씨 가문은 왕국이 몰락한 뒤에도 누대에 걸쳐 류큐 문화 최후의 보루로 활약했다. 그들은 도쿄에 기숙사를 지어 오키나와 출신 학생들의 유학을 지원하고 지역 신문을 발행하며 전통 미술과 예능을 전승했다.
메이지 시기에 신사 건축의 일인자로 활약한 건축가 이토 주타는 가마쿠라와 함께 류큐의 건축과 예술을 조사하고 일본 본토의 정책이 류큐?오키나와의 전통을 파괴하지 못하게끔 실력을 행사하면서 한 사회가 가진 역량의 총체인 ‘문화’를 지켜내려 했다.
가마쿠라가 오키나와에 처음 머물던 시기에 하숙을 했던 자마미가는 류큐왕국의 귀족 가문으로, 어머니 자미미 쓰루를 중심으로 전통 가요와 민요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족은 류큐의 남성들이 배를 타고 일본 본토나 중국 등으로 떠날 때 그들의 무사와 안녕을 빌며 노래하고 춤추던 전통 예술인 ‘우두에’를 레코드판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류큐?오키나와 최초의 사진사로 현지의 다양한 세시풍속을 촬영한 사키야마 요엔, 가마쿠라가 오키나와사범학교에 재직하던 시절의 제자이자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운동을 이끌고 초대 민선 류큐정부 행정주석을 역임한 야라 조뵤, 역시 가마쿠라의 제자로 오키나와 섬들의 민요를 채보하고 그것을 클래식 가곡으로 발전시켜 서구 사회에까지 알린 가나이 기쿠코, 오키나와의 역사ㆍ지리ㆍ의학 등을 섭렵하고 특히 출신 인물들의 일대기를 상세히 밝힌 히가시온나 간준, 그리고 가마쿠라의 아내이자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 속에 옮겨 담은 화가 야마우치 시즈에…. 이들 모두가 가마쿠라 주변에 모여 류큐?오키나와에 함께 공명했기 때문에 류큐?오키나와의 근대는 혼란을 견뎌내고 미래로 전해질 수 있었다.

역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가마쿠라는 『오키나와 문화의 유보』를 출간한 다음 해인 1983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키나와 관련 자료와 사료 일체를 오키나와에 기증한 후 곧바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은 슈리성과 그 일대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가마쿠라가 1924년의 슈리성 철거 계획을 저지한 후 곧바로 모사해두았던 슈리성의 도면과 직접 찍은 건물 사진이 슈리성 복원 사업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복원팀은 이 자료로 성의 외관이나 기본 구조는 알 수 있었지만 정전의 내부까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바로 이때 한 번 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86년 슈리성 복원 공사를 맡고 있던 건축가 후쿠시마 기요시는 『오키나와 문화의 유보』를 찬찬히 살펴보던 중 사진 속에서 아주 작은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가마쿠라가 1927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확대해본 결과 그것이 1768년의 슈리성 중수 공사 설계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는 여러 전각의 정면도와 각 층의 평면도, 실내 장식의 크기와 모양, 내외부 벽면의 형태와 색깔은 물론 건축자재의 수종, 치수, 수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역이 담겨 있었다. 이로써 슈리의 언덕 위에서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여러 문화와 문물이 교차하던 붉은 슈리성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사료는 찾아내고자 하는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불가사의를 느꼈습니다. 가마쿠라 요시타로도 그랬겠지요. 그는 슈리성에는 배울 것이 가득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도 꼭 같은 것을 느낍니다. 슈리성을 보고 있노라면 … 여태까지 몰랐던 역사나 문화가 여러 가지 단편들의 틈새를 통해 보입니다. 슈리성은 아시아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 후쿠시마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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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추천의 말 ˚9
한국의 독자들에게 ˚13
프롤로그 ˚19

1. 그가 걸어간 언덕길
봉래의 섬˚29 / 그가 걸어간 언덕길˚32 / 슈리성 이야기˚39 오키나와에 가기까지˚46 / 다이쇼 10년의 방문자˚54 / 하숙집 자마미가˚59 / 슈리 말을 배우다˚65

2. ‘오키나와학’의 청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청년 교사˚75 / 류큐화가전˚82 / 가보-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다˚87 / 바쿠몬토의 청춘˚90 / 대립하는 신문들˚95 / 바쿠몬토와 구마구스˚98 / 이하 후유와 다지마 리사부로-오키나와학의 탄생˚102 / 천재 화가 ‘지료’에 매료되다˚111 / 미야코와 야에야마˚115 / 이와사키 다쿠지, 기샤바 에이준과 만나다˚120 / 최후의 구라모토 화공˚125 / 사진사 사키야마 요엔˚127 / 다라마 ?카니˚130

3. 위험해! 슈리성
도쿄미술학교의 탄생과 교수들˚141 / 건축계의 권위자, 이토 주타˚148 / 화가 지료에 대해 쓰다˚151 / 흔들리고 흔들리다 - 관동대진재 ˚157 / 『역대보안』과 구메무라˚160 / 게이메이카이와 아카보시 집안˚162 / 바쿠몬토와 이하 후유의 고뇌˚173 / 슈리성 철거˚178 / 달리다, 가마쿠라˚183

4. 꿈과 같은 연회-이토 주타의 오키나와
모리 교수의 특훈 ‘신즉물주의로!˚193 / 다시 오키나와로˚201 / 빈가타 곤야를 방문하다˚205 / 1년 만의 재회˚213 / 백지 답안지 사건, 하-리-˚216 / 이토 주타가 오다˚219/ 쓰지, 뎅기열, 태풍 ˚225 / 요리와 예능, 사치의 극치를 보인 슈리의 연회˚229 / 러시아문학자 노보리 쇼무˚240 / 류히의 샘물에 씻겨˚245

5. 안녕! 바쿠몬토
비 내리는 슈리의 언덕길˚249 / 차가운 바다 속으로˚252 / 히가 조켄과 가마쿠라˚259 / 민예운동과의 거리˚263 / 왕의 초상화 오고에 촬영˚275

6. 섬 여행-800킬로미터의 류큐 예술 조사
류큐예술전람회˚283 / 이하 후유의 각오˚291 / 류큐의 종교 연구˚293 / 다시, 섬으로˚300 / 이토에게 보낸 편지˚307 / 800킬로미터 여행의 끝˚311 / 쇼와 초기의 류큐 붐˚315 / 자마미가의 화재˚325 / 야마우치 시즈에와 결혼˚327 / 『역대보안』 나타나다!˚332 / 쓰루와의 재회, 슈리성 수리 공사˚340 / 류큐를 사랑한 사람들˚344 / 패전 전 마지막 오키나와 방문˚349

7. 슬픈 오키나와, 전장으로 변하다
전시의 미술학교˚357 / 미술학교 퇴직˚365 / 방공호 안에서 지켜낸 유리 건판˚368 / 오키나와 전투˚372 / 폐허가 된 슈리˚379 / 남부의 참극, 방황하는 쇼준˚384

8. 빈가타가 다시 ‘태어나다’
빈가타 연구를 시작하다˚393 / 이하 후유의 말년˚398 / 생혼이여, 생혼이여(마부야-마부야)˚404 / 초토화된 현장에서˚407 미군의 대오키나와 문화 전략과 예능의 부활˚409/ 쓰보야 재흥, 미술가들의 예술촌˚415 / 되살아나는 빈가타 ˚421 / 슈리성 터에 류큐대학이 서다˚427 / 쓰루의 머나먼 여행길˚433 / 빈가타 형지의 반환. 슈사이시키본의 간행˚435 / 가타에조메 작가가 되다˚442 / 빈가타 연구의 일인자˚445 / 복귀로의 움직임, 전람회˚447

9. 케-이미-소치(잘 다녀왔어요? 어서 와요!)
나카구스쿠우둔 터에 세워진 박물관˚455 / 완네-, 나마, 챠-비탄˚459 / 생도들과의 재회, 유리 건판의 존재를 밝히다 ˚462 / 양주 무역자유화와 오키나와 문화 지원 ˚465 / 되살아나는 유리 건판, 《50년 전의 오키나와》전˚467 / 〈야에야마 화고〉를 최초로 공개하다 ˚474 / 『오키나와 문화의 유보』ㆍ인간국보ㆍ해양박람회˚478 / 〈야에야마 화고〉, 이시가키지마로 돌아가다˚482 / 바쿠몬토의 딸˚484 / 결국 나는 본토에서 온 나그네˚489 / 일생의 책무를 다하고˚496

10. 되살아난 붉은 성
『치수기』의 발견˚505 / ‘소녀폭행사건’을 보도한 자마미 쓰루의 손자˚513 / 되살아난 나카구스쿠우둔과 오고에˚517

에필로그˚524
후기˚527
문고판 후기˚536
옮긴이의 말˚540

참고문헌˚552
인명 찾아보기˚570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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